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탄압맞선 저항 ‘18년 악연’

등록 2009-08-20 19:25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움직임에 맞서 시위를 벌이다 사복 경찰에 연행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 사진).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 소장의 모습. 보도사진연감
1969년 박정희 정권의 3선개헌 움직임에 맞서 시위를 벌이다 사복 경찰에 연행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왼쪽 사진).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 소장의 모습. 보도사진연감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박정희와 김대중
박, 71년 대선 이긴뒤 납치·고문 등 탄압
DJ, 비난 삼가…재임땐 박 기념관 지원
그를 인권과 민주의 기수로 키운 건 역설적이게도 박정희의 모진 탄압이었다. 그가 탁월한 정치인으로 우뚝선 데는 김영삼과의 40년 애증관계를 빼놓을 수 없다. 민주정권 10년의 새역사를 함께 만든 노무현은 그에게 ‘몸의 절반’이었다. 김대중과 박정희, 김영삼, 노무현의 얼키고설킨 인연은 그대로 우리의 현대사다.

김대중과 박정희, 두 사람은 단둘이 만나 눈빛을 나눠본 적이 없다. 말을 길게 섞어본 적도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역사의 자기장 양극에 서서 상대의 ‘존재’를 겪었다. 한 사람은 언덕 아래로 끊임없이 바위를 떨어뜨렸고, 또 한 사람은 한결같이 그 바위를 밀어올려야 했다. 상대방의 음모로 여러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던 한 사람은 살았고, 다른 한쪽은 스스로 파멸을 향해 치달았다.

충돌의 시작은 71년 대선이었다. 69년 3선개헌을 통해 독재의 기반을 다진 박 전 대통령은 혜성처럼 나타난 김대중에 당혹해했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형욱은 회고록에 70년 9월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김영삼 후보에 역전승을 거둔 날의 박 전 대통령을 이렇게 묘사했다. “표정은 시푸르덩하였고 앞엔 한두번 빨다가 비벼끈 담배꽁초들이 재떨이에 수북이 쌓여있었다.”

김대중은 시퍼렇게 날선 현직 대통령 박정희의 서슬에 주눅들지 않았다. 1960년대를 ‘개발을 빙자한 독재시대’, 70년대를 ‘희망에 찬 대중의 시대’라고 당차게 선언했다.“박정희씨! 당신은 30원짜리 미나리 도둑은 구속해도 50억, 500억원의 거대한 도둑놈들을 처단하지 못하는 이유를 묻고 싶다”고 공개 비난했다. 또 “국내 정치를 악용만 하려하지 말고 국제정세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공부 좀 하라”고 일갈했다. 박 전 대통령으로선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박정희 연구의 일인자인 고 전인권 박사는 “선거에 임하는 양쪽의 입장이 상대방을 인정할 수 없는 정책 포지션을 취하고 있었다”고 지적했다. 박 전 대통령이 대결적 안보체제를 강조한 반면, 김 전 대통령은 미일중소 4대국의 한반도 전쟁억지 보장, 예비군제 폐지, 남북교류 추진 공약을 들고 나온 것이다.

선거는 94만6천표로 박 전 대통령이 승리했지만, 부정투표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당시 중앙정보부 제1차장으로 근무했던 강창성 전 한나라당 의원조차 뒤에 “원칙대로 투·개표를 했다면 우리가 졌을지도 모른다”고 증언했다.


탄압맞선 저항 ‘18년 악연’
탄압맞선 저항 ‘18년 악연’
김 전 대통령이 ‘대통령직을 빼앗긴 지도자’로 인식되며 박정희체제의 대항마로 떠오른 반면, 71년은 박 전 대통령에게 ‘최악의 해’였다. 공안부 검사가 현직 판사들의 구속영장을 청구한 데 항의해 서울지방법원 판사 전원이 사표를 제출하는 사법파동이 벌어졌고, 대학가엔 연일 반독재 타도 시위가 열렸다. 고 전인권 박사는 “횡적인 관계와 타협이 무능했던 박정희는 (국가비상사태 선언·유신이라는) 멈출 수 없는 기차에 타게 됐다”고 짚었다. 박 전 대통령이 바짝 조인 독재의 고삐는 곧 김 전 대통령의 수난으로 이어졌다


73년 8월 도쿄 납치사건은 정권 차원의 ‘김대중 죽이기’ 완결판이었다.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으로 활동했던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심증만 있고 물증은 없지만, 김 전 대통령이 살아서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놀란 사람은 아마 박 전 대통령과 당시 이후락 중정부장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구속·가택연금을 반복하며 정치적으로 매장당하게 된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저항의 칼날을 벼렸다. 1978년 9월 고문과 투옥으로 쇠잔해진 김 전 대통령은 병실에서 들키지 않기 위해 ‘못으로’ 편지를 쓰면서도 “올 가을이 중요한데, ‘물가 내려라’, ‘농민들의 곡가를 보장하라, 폭풍피해를 완액 보상하라’ 같은 국민 생활에 밀접한 이슈로 싸워라’”라는 내용을 빼곡히 적었다.

박 전 대통령은 죽이고 싶을 만큼 김대중을 미워했지만, 김 전 대통령이 ‘인간 박정희’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난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설훈 전 의원은 “김 전 대통령이 박정희정권의 정책은 반대했지만, 국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준 건 높이 샀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재임 시절 ‘정치공학적 판단에 의한 위선’이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기념관 건립을 지원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04년 8월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동교동 자택을 방문해 “그동안 아버지 시절에 많은 피해 입고 고생한 것을 딸로서 사과드린다”고 말하자 “과거 일에 대해 그렇게 말씀하시니 감사드린다”고 화답했다. 한홍구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은 ‘착한 남자 콤플렉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평생 용서·화합을 강조했는데, 이 때문에 철저한 과거사 청산으로 이어지지 못한 한계도 있다”고 지적했다.

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비극적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두 사람의 악연은 마침표를 찍었지만, 박 전 대통령이 낙인찍었던 ‘빨갱이’ ‘호남 지역주의의 대변자’라는 꼬리표는 평생 그를 따라다녔다.

역설적이게도 김 전 대통령을 ‘역사의 큰별’로 만든 자양분은 박 전 대통령이 안겨준 시련이었다. 김형욱은 생전에 이렇게 말했다. “박정희가 김대중의 성장을 결과적으로 도왔다. 박정희란 인물은 어지간한 정적쯤은 눈아래로 보고 상대조차 안하거나 아니면 돈으로 매수하거나 폭력으로 입을 막아버렸다. 그러나 김대중은 돈에 매수되지도 않았고 폭력에 굴하지도 않았다. 그러기에 박정희는 김대중을 없애려들었지만 그럴수록 김대중은 더욱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하고 말았다.”

이유주현 기자 edigna@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 구속되면 수용복 입고 ‘머그샷’ 1.

윤석열 구속되면 수용복 입고 ‘머그샷’

윤석열, 법정 중앙에 앉아…구속영장 심사 진행 중 2.

윤석열, 법정 중앙에 앉아…구속영장 심사 진행 중

경찰버스 밀며 “위조 영장·불법 체포”…윤석열 지지자 격앙 3.

경찰버스 밀며 “위조 영장·불법 체포”…윤석열 지지자 격앙

‘윤석열 영장집행 방해’ 이광우 체포…“정당한 임무일 뿐” 4.

‘윤석열 영장집행 방해’ 이광우 체포…“정당한 임무일 뿐”

“역시 오실 줄 알았거든”…윤석열 서부지법 출석 소식에 고조감 5.

“역시 오실 줄 알았거든”…윤석열 서부지법 출석 소식에 고조감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