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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2대에 걸친 백년 인연 ‘천년 한지’를 지키다

등록 2010-11-22 08:59수정 2010-11-22 16:02

‘종이를 지키라’는 선대의 뜻을 받아 60년 세월 ‘따로 또 같이’ 한길을 걸어온 ‘한지장’ 장용훈(오른쪽)·홍춘수(왼쪽) 선생이 첫 동반 전시장인 갤러리 류가헌에서 음양지를 펼쳐 보이고 있다. 사진 갤러리 류가헌 제공
‘종이를 지키라’는 선대의 뜻을 받아 60년 세월 ‘따로 또 같이’ 한길을 걸어온 ‘한지장’ 장용훈(오른쪽)·홍춘수(왼쪽) 선생이 첫 동반 전시장인 갤러리 류가헌에서 음양지를 펼쳐 보이고 있다. 사진 갤러리 류가헌 제공
[한겨레가 만난 사람] 무형문화재 ‘한지장’ 장용훈·홍춘수

전라도 순창 장터의 어느날이었다. 종이를 팔러 나온 장세권은 역시 지게에 종이를 지고 나온 홍순성을 처음 만났다. 나이는 세권이 열살이나 위였지만 두 사람은 금세 마음이 통했다. 오일장이 서는 날이면 나란히 앉아 종이를 팔았고, 막걸리 사발을 부딪치며 종이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6·25 전쟁통엔 한동안 소식이 끊어졌다가 거짓말처럼 전주에서 다시 만났다. 닥나무가 많이 나던 서학동이었으니 ‘종이쟁이’들에게는 필연이었다. 그곳에서 세권의 아들 용훈은 순성의 아들 춘수를 만났다. 용훈이 열일곱, 춘수가 열둘이었다. 두 집안 다 형제가 많았지만 두 사람이 유독 종이 만드는 일을 좋아했고, 또 서로를 좋아했다. 용훈은 어린 춘수에게 아버지들을 대신해 자기가 아는 것들을 꼼꼼히 일러줬다. 전쟁 직후 두 집안은 아예 순성의 고향 전북 임실 청웅면으로 내려가 지붕을 마주하고 종이를 만들었다. 용훈이 일감을 찾아 마을을 뜨면서 인연은 끊어진 듯했지만, 춘수는 20년 넘게 세권의 무덤을 돌보며 기다렸다.

많은 한지 장인들이 값싼 기계종이에 밀려 공방을 닫은 뒤에도 한눈을 팔지 않은 두 사람, ‘장지방’과 ‘청웅 한지’의 명장이 되었다. 한지 천년의 명맥을 함께 잇고 있는 백년 인연의 장씨가와 홍씨가는 그렇게 또 한번의 천년을 향해 오늘도 한지를 만들고 있다. 그런 두 사람이 지난 2월 나란히 중요무형문화재 제117호 한지장 기능보유자에 올랐다. 아버지 세권과 아버지 순성이 호형호제한 지 80여년, 아들 용훈과 아들 춘수가 서로 언 손을 녹여주며 한지를 뜨기 시작한 지 60여년 만이다.

21일까지 서울 서촌 한옥마을에 숨은 듯이 자리잡은 갤러리 류가헌에서 처음으로 함께 한지 전시회를 연 백지 장용훈(77), 지우 홍춘수(72) 두 지장(紙匠)을 만났다. ‘천년 한지 백년 인연’의 내력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인터뷰/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선친들 1920년대 순창 장터에서 첫 인연
한국전쟁 때 다시 만나 임실에 함께 정착
‘새마을 재앙’ 한지 시들…생활고 시달려

“고생스러운데 왜 했느냐고? 그냥 종이가 좋고 재미졌어.”


60년 세월 한눈 한번 팔지 않고 한지만 만들어온 두 칠순 명인의 대답은 미리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 똑같았다. 한 사람은 경기도 가평의 작업장에서 직접 만나서, 전북 임실에 사는 또 한 사람에게는 전화로 물었는데도 그랬다.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음이 한결같으니께.”

두번째 물음에도 답은 같았다. 20년 넘게 소식이 끊긴 적도 있고 지금도 떨어져 살고 있지만 인연이 끊기지 않은 이유다.

“죽는 날까지 만들다 갈 거여.”

‘백년 인연’의 시작

“우리는 지금 4대째인 셈인데, 애초 전남 장성에서 할아버지(장경순)께서 말년에 종이를 만드셨다고 해. 그 일을 아버지(장세권)가 이어서 67살로 돌아가실 때까지 업으로 삼았지. 아버지 때에는 오일장마다 종이를 팔러 다녔는데 1920~30년대 인근 순창 장터에서 역시 종이를 팔러 온 춘수네 아버지(홍순성)를 알게 됐다고 들었어. 두 분은 ‘형님 동생’ 하며 지내셨지.(장용훈) “난 용훈 형님보다 5살 아래여서 그때 기억은 잘 안 나는데, 6·25 전쟁이 나서 한동안 연이 끊겼다가 이듬해 전주에서 약속한 것처럼 두 집안이 만났어. 피난 다니다 닥나무가 많이 나는 서학동 약수터 밑 종이공장지대로 모여든 거니께, 어쩌면 필연인 것도 같고. 형님과 나는 그때 처음 봤어.”(홍춘수)

종이와의 인연

(장) “맏이로 어릴 때부터 보고 자라서 나도 따라 해보고 싶었는데, 아버지가 한사코 고생한다며, 공부하라며 말렸어. 그래도 마냥 하고 싶어서 16살 때인가 몰래 혼자서 떠본 게 처음이었을 거야. 내가 만들어놓은 종이를 보고 아버지가 ‘정말 너 혼자 떴냐’고 놀라워하더니 더는 말리지 않았어. 그길로 학교는 그만두고 전주로 온 17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했지. 이듬해부턴가 전쟁통에 불타거나 없어진 호적대장이며 토지대장이며 관공서 문서를 복원하느라 종이 주문이 몰려들자, 아버지는 기술자 3명을 두고 공장을 차렸는데 일손이 달려서 나까지 거들어야 했어. 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준 닥섬유로 첫날 하루 동안 240장을 떴는데 다 통과였어. 한장 한장 쌓는 재미에 힘든 줄을 몰랐지.”

(홍) “나 역시 아버지 어깨너머로 익히다 전주로 온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배웠으니까 올해 꼭 60년 된 셈이여. 나야 달리 배운 게 없으니, 힘들고 알아주지 않아도 그저 내가 할 일이라 믿고 미련스럽게 해왔지. 닥나무 줄기나 황초규(닥풀의 뿌리)나 찬물에 불려야 해서 사시사철 손이 시리다 못해 터졌지만 고생스럽다거나 도망갈 생각은 안 들었으니께, 천생 종이쟁이로 났나봐.”

종이가 돈이 되던 시절

(장) “전쟁 말기부터 종이 수요가 급증하자 공장을 차렸다고 했잖아? 종이 업자들이 닥나무를 싸들고 와서는 줄 서서 기다리다 종이가 마르기가 바쁘게 쟁탈전을 벌이던 시절이었어. 밀가루 포대에 돈을 담아 아랫목에 이불로 덮어놓고 다닐 정도로 쌓였으니까. 석달 만에 변두리 한칸짜리 피난집에서 초가집이나마 3칸짜리를 장만했어. 아버지는 오후 5시면 일손을 놓고 시내 남문거리까지 술집 순례를 나가셨는데, 월말이면 술 외상값 갚는 일은 내 몫이었어. 모두들 나보고 효자라고 칭찬들 했지.”

(홍) “그러다 53년말쯤인가 두 집안이 나란히 전북 임실군 청웅면 구고리로 이사를 해서 정착했어. 그때 박춘식(전 전북상공회의소 회장)씨의 청웅제지공업이 정부의 종이 조달권을 갖고 있어서 일감이 많았어. 마침 친척이 우산공장도 해서 물에 젖지 않는 기름종이를 납품하기도 했고. 나는 한창 일을 배울 때였지. 형님 말씀대로 한 십년 잘나가던 시절이었어.”

끊어진 인연, 20년 만의 재회

(장) “전쟁 특수도 끝나고 60년대 들어 기계로 만든 값싼 종이가 대량으로 나오면서 일감이 줄었어. 공장 기술자도 다 내보내고 아버지와 내가 직접 장마다 돌아다니며 팔아야 겨우 인건비나 건졌지. 나중엔 남의 공장에 다니다 몇년 뒤에는 그마저 문닫고 떠나버려서 다시 장터를 전전해야 했고. 34살 때 큰아들 성우가 태어났는데 이러다 식솔들 다 굶기겠다 싶어, 쌀 서너말하고 보리쌀 몇되 팔아놓고는 일감을 찾아 떠돌아다녔어. 그 와중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청웅 땅에 남겨두고 경기도 마석 답내리 종이공장촌으로 올라온 게 70년 무렵이었을까….”

(홍) “그때만 해도 전화도 드물고 교통편도 어려운 시절이었잖아. 나 역시 종이 떠서 먹고살기에 바쁘다보니 소식이 차츰 끊겨버렸어. 그게 어느새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꼭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제.”

(장) “그게 다 춘수 동상 덕분이여. 성우가 군 제대를 하고 92년부터 종이 일을 배우기 시작하더니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성묘를 가자고 이끌었어. 그런데 청웅에 와 보고 깜짝 놀랐어. 그 오랜 세월 동상이 두 분의 산소를 정성껏 돌봐줬더라구. 그저 고마울 뿐이여.”

(홍) “형님의 선친은 나한테도 아버지 같은 분이었으니께, 내가 살아있는 한 당연히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어. 해마다 명절이면 혹여 형님이 오시나 싶어 미루다 미루다 맨 마지막에 벌초를 하곤 했지.”

장씨네 외로이 명맥 잇다 ‘장지방’ 명성
홍씨네 ‘형님네 묘’ 돌보며 ‘청웅한지’ 세워
“전통 한지 가치 대접받는 날 어서 왔으면”

한지의 위기, 인연의 위기

(장) “첫번째 위기는 마석으로 올라온 직후 불어닥친 새마을운동이었어. 특히 주택개량사업으로 한옥은 헐리고 양옥이 유행한 것은 한지에는 재앙이었지. 날마다 끼니 걱정하며 정말 고생고생했어. 10년 넘게 낮에는 남의 공장에서 일해주고 밤이면 집에서 내 종이를 만들어 팔아 모은 400만원으로 닥나무 많던 가평의 청평공고 앞 저지대 땅을 빌려 내 공장을 차렸지. ‘장지방’(張紙房)이야. 기술자 7명에 보조 4~5명을 두고 시작했는데 3년 만에 큰 물난리가 터져서 다 잠기고 떠내려가버렸어. 집사람은 그만두자고도 했지만 난 어떻게든 종이를 되살려야 한다는 생각만 들더라구.” 아들 성우씨 말로는, 장지방은 90년과 98년 두차례 수해를 더 겪은 뒤 지금의 상천리 오폐수처리장 터로 옮겨왔다. 그나마 군유지여서 이동식 가건물만 지을 수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홍) “그저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업이니 딴생각이 들어올 틈이 없었어.”

‘한지장’에 오른 사연

(장) “다시 춘수 동상을 만나 들어보니, 동상 부인이 30년 넘게 수술을 7번이나 하면서 고생이 많았더라구. 뭔가 도울 방법이 없을까 늘 마음이 쓰여서, 일본 수출길이 트여 제값을 받게 된 음양지 원료를 대주기도 했는데, 몇해 전 전북도 지정 지방문화재가 됐어. 그러다 지난해 문화재청에서 요청을 받고 같이 신청을 했지.” 부인 조정자(73)씨 말로는, 애초 2005년 그에게 일을 배운 후배가 먼저 한지장으로 지정을 받는 바람에, 한동안 앓아누울 만큼 크게 낙담을 하기도 했단다. 그가 여러 사정으로 일을 할 수 없어 2008년 명예보유자로 바뀌고, 지난해 다시 심사를 거쳐 올해 초 두 사람이 나란히 지정을 받게 됐다.

(홍) “다 형님 덕분이제. 나는 애초에 기대도 안 했는데 문화재청에서 서류를 전해받고 얼마나 기쁘던지 곧장 형님한테 ‘감사 전화’를 드렸어.”

(장) “내가 된 것보다 동상이 함께 인정받아서 좋았어. 한지장 수여식 때 동상네 가족들이 다 참석해서 나한테 꽃다발을 안겨주는데 그제서야 실감이 나더구만.”

후계자로 나선 자식들

(장) “4남1녀를 뒀는데, 종이 일은 막내(갑진)가 맨 먼저 배웠고 그다음에 둘째(진우)가 나서고 또 큰애(성우)까지 가세해서 한동안 4부자네 공방으로 불렸지. 애초 성우는 군제대 직전 수해로 진 빚을 갚을 때까지 5년만 돕겠다고 했는데, 어느새 20년 경력의 전문가가 됐어. 고마울 뿐이여. 나는 오로지 아버지한테 배운 그대로, 한지를 지키는 데만 애써왔지만 아이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종이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니 든든해.”

(홍) “3남3녀 중에 아들 셋과 둘째 딸이 목사가 됐어요. 대신 맏사위(노정훈·48)가 일을 물려받아주니 다행이여. 맏딸도 열심히 거들어주니 고맙고.”

죽을 때까지 좋은 한지 만들고 싶어
한겨레가 만난 사람
한겨레가 만난 사람

(장) “한지는 얇을수록 질기고 오래가서 명품인디, 운좋게 잠자리 날개처럼 얇게 떠진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가 정말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참 좋아. 차곡차곡 쌓인 음양지를 보고 있으면 큰 부자인 듯 넉넉해져서 좋고.”

(홍) “종이를 한 장 한 장 하늘에 비춰보면 그 안에 천지가 다 들어 있는 듯해. 우리네 인생이 다 그렇겠지만 내 손으로 만들어도 사람의 일만은 아니지 싶을 때가 있어.”

(장) “평생 일해서 내 땅 한평 장만하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어. 아버지 유언대로 한지를 지켰고 이제 나라에서 인정받아 이름까지 남기게 됐으니. 어깨가 결려 잠을 잘 못 잘 때도 많지만 기운 닿는 날까지 종이를 뜰 수 있었으면 좋겠어.”

(홍) “당장은 우리 용훈 형님 귀가 다시 열리는 게 소원이여. 8년 전쯤 뇌혈관 이상으로 두통을 앓고 난 뒤부터 귀가 어두워져서 전화 통화를 못하는 게 안타까워. 더 바란다면 함께 전시할 기회가 자주 있었으면 해, 무엇보다 전통 한지의 가치가 제대로 대접을 받는 날이 어서 왔으면 좋겄어.”

장지방-사카모토 특별한 인연

일본 화지의 원류 ‘음양지’ 찾아 한국에
97년 ‘전국 유일 장인’ 장씨 만나자 큰절
탁월한 보존성 전세계 알리는 ‘홍보대사’

지난주 서울 조계사 맞은편 골목에 자리한 ‘장지방’ 서울매장에서 만난 일본인 사카모토 나오아키(62·오른쪽·페이퍼 나오 사장)는 자칫 끊길 뻔한 한국과 일본의 500년 종이 인연을 되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다.

장용훈(가운데) 한지장의 맏아들이자 전수자인 장성우(43·맨 왼쪽)씨는 사카모토 사장을 처음 만난 때를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한다고 한다. “1997년 어느날 점잖은 외국 신사가 멀리 청평 공장까지 찾아와서는 아버지 손을 덥석 잡고 큰절까지 올리는 거였어요. 처음으로 아버지가 존경스러워 보였고 내가 해온 일에 자부심을 느낀 순간이었죠.”

사카모토 나오아키(62·오른쪽·페이퍼 나오 사장)·장용훈(가운데)·장성우(맨 왼쪽)
사카모토 나오아키(62·오른쪽·페이퍼 나오 사장)·장용훈(가운데)·장성우(맨 왼쪽)

장성우씨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 시코쿠 ‘센카지’(泉貨紙)의 원류인 음양지를 드디어 찾았다’며 감격해하는 사카모토 사장에게서 큰 격려와 자극을 받은 것이 계기가 돼 2000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6호 지장 전수자가 됐고, 동생 진우씨와 함께 다양한 색깔의 한지를 만들 수 있는 옷칠·감물 등 ‘종이물감’을 개발하기도 했다.

사카모토 사장을 감동시킨 음양지는 흔히 문창호지로 쓰던 두 겹의 두꺼운 한지를 말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무구정광 대다라니경>이 쓰인 종이도 이것으로, ‘천년 한지’의 명성이 여기서 비롯됐다. “처음 한국에 왔던 88년만 해도 인사동에서 음양지를 구할 수 있었는데 10년 뒤 와보니 전주에도 원주에도 만드는 장인이 없어 놀랐다”는 사카모토 사장은 그때 이후 해마다 10만~20만장의 음양지를 주문해 가는 장지방의 큰 손님이 되었다. 그의 손에서 다양한 색과 용도로 재가공된 음양지는 일본만이 아니라 영국을 비롯한 유럽과 북미 등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명품을 알아보고 그것을 만든 장인을 찾아 장인정신을 북돋워준 사카모토 사장의 안목 또한 명장급이 아닐 수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호는 ‘지인(紙人)-종이를 지키는 사람’이다. 김경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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