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탈북 가족 항소심
“북한 정치보복 고려했어야”
“북한 정치보복 고려했어야”
2006년 3월17일 북한 주민 이아무개(42)씨는 아내와 두 아들, 의형제 김아무개(31)씨와 함께 소형목선을 타고 탈북했다. 이들을 태운 배는 이튿날 밤 11시께 강원도 고성군 통일전망대 앞 해안에서 육군 초병에게 발견됐고, 곧장 조사를 받았다. 조사 내내 이씨는 북한에 남겨진 가족의 신변 위협을 이유로 귀순사실과 인적사항을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강원지방경찰청은 3월19일 이씨의 탈북사실을 담은 ‘북한주민 일가족 귀순 보고’라는 자료를 냈고, 자료에는 이씨 가족의 성과 나이 등 인적사항과, 탈북 수단 등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이씨가 북한에서 인민위원회 지도원으로 활동했고, 김씨는 무역선 선원으로 일했다” 등의 보도가 뒤따르면서 이들의 인적사항은 다 드러나고 말았다.
북한에 남은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과 상실감으로 고통받던 이씨가 관계기관에 수차례 진정을 넣었지만 정부로부터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과 친인척의 소식을 어렵게 확인했지만, 부모와 형제 등 22명은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08년 5월 이씨는 “대한민국 정부의 신상공개로 북한에 있는 친인척이 실종됐다”며 국가를 상대로 11억5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이어 2009년 4월 이씨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1심 재판부는 3500만원의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지난해 10월 서울중앙지법 민사19부(재판장 노정희)는 “북한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신변 위협 가능성을 불러일으켰다”면서도 “가족들이 북한에 의해 처형당했거나 수용소에 수감됐다는 사실을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19일 열린 항소심에서 법원은 1심 배상액이 너무 적다며 원심의 세배가량인 1억2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서울고등법원 민사5부(재판장 노태악)는 “신상정보 유출이 국민의 알권리 충족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광범위한 정치보복이 행해지는 북한의 특수상황 등을 고려했을 때 북한이탈주민의 신변보호 요청은 언론·출판의 자유나 국민의 알권리보다 우선 존중돼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북한 가족이 처형됐다는 증거는 없지만, 북한 사회의 폐쇄성에 비춰 이씨 등에게 직접 증거를 요구하는 것도 무리”라며 “탈북으로 인해 일부 가족에게 심각한 위해가 발생했을 상당한 개연성이 있어 보여 1심의 액수는 지나치게 적다”고 덧붙였다. 재판이 끝난 뒤 이씨는 “이런 나라에서는 더이상 소송을 진행할 생각이 없다”며 상고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황춘화 기자 sflow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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