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혼 관계를 정리하는 조건으로 제공한 정자가 인공수정을 통해 아이로 태어났다면, 이를 친자로 봐야 한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3일 서울가정법원의 설명을 종합하면, 2001년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박아무개(당시 20살)씨는 인터넷 채팅을 통해 서아무개(당시 29살)씨를 알게 됐다. 두 사람은 2003년부터 2008년 말까지 동거했고, 그 기간에 서씨는 한 차례 임신중절수술과 두 차례의 자연유산을 겪었다. 박씨는 2007년 서씨의 고향에 가 친척들에게 결혼계획을 밝히고 결혼식장을 알아보는 등 결혼준비를 시작했다. 하지만 2008년 박씨가 인터넷 채팅으로 여대생 안아무개씨를 만나면서 둘의 관계는 틀어졌다. 박씨는 같은 해 12월 서씨에게 집안에서 반대한다며 관계를 정리하자고 요구한 반면, 다른 여자가 있는 줄 몰랐던 서씨는 아이를 갖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박씨는 헤어질 것을 고집하면서 ‘정자를 제공하는 대신 모든 연락을 끊고, 임신·양육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각서를 받은 뒤 정자를 제공했다.
2009년 3월 서씨는 인공수정을 통해 아들 둘을 낳았다. 뒤늦게 안씨의 존재도 알게 됐다. 이에 서씨는 박씨에게 양육비와 위자료 등을 지급하라며 법원에 소송을 냈다. 박씨는 재판에서 “불특정 다수를 위해 정자은행에 정자를 기증한 것과 다름없으며, 비배우자 간 인공수정에 따른 출산이므로 친자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맞섰다.
그러나 법원은 이들의 사실혼과 친자관계가 성립한다며 아들 한명당 양육비 50만원과 위자료 3500만원을 서씨에게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서울가정법원 가사3부(재판장 박종택)는 “정자 제공자였고 사실혼 관계였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는 상황에서 ‘부모가 될 의사가 없었다’는 박씨의 주장만으로 아이들의 신분적 이익을 박탈하고 인격의 독립성을 침해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황춘화 기자 sflow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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