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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죽은 사람’으로 기구한 16년
“먹고 살려니 할건 도둑질밖에…”

등록 2011-10-18 20:26

가족 실종신고로 사망 처리
신분증 없어 막일도 못해
절도만 8번 감옥 들락날락
“호적 살려달라” 번번이 좌절
“생계를 해결할 길이 없어 절도를 반복하였습니다.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이었습니다.”

18일 서울중앙지법 417호 대법정에 선 이아무개(44)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씨는 지난 6월 술에 취해 길에 쓰러져 잠든 박아무개(21)씨의 지갑을 훔치다 현장에서 붙잡혔다. ‘절도’로 재판을 받는 것만 이번이 아홉번째다.

하지만 이씨에게도 사정은 있었다. 그는 16년 전부터 법률상으론 ‘사망자’다. 그래서 이씨는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도둑질’밖에 없었다고 했다. 1967년 3월 태어나자마자 이씨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출생신고도 못한 채 할머니 손에 자란 이씨는 11살이 돼서야 큰아버지의 호적에 이름을 올렸다. 20살 때는 함께 살던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났고, 그때부터 홀로 생계를 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씨와 연락이 끊긴 가족들은 그를 실종자로 신고했고, 법원은 1995년 ‘실종기간이 만료했다’는 이유로 실종선고를 했다. 당시 절도죄로 교도소에 수감중이던 이씨는 졸지에 사망자가 됐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했을 때, 사망자인 이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막노동 현장에서도 세금 원천징수를 이유로 신분증을 요구했다고 했다. 호적을 살리려 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씨는 결국 도둑질을 다시 시작했고, 그 뒤 다섯차례나 더 교도소를 오갔다. “경찰에서는 구청으로 가라고 하고, 구청은 법원으로 가라고 하고, 법원은 사망자라는 것을 증명할 서류가 없다는 이유로 안 된다고 했습니다.” 도둑질로 붙잡힐 때마다 사망자라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경찰·검찰·법원 그 어느 곳도 잘못된 사망선고를 바로잡아주지 않았다.

아홉번째 법정에 서서야 이씨는 16년 동안 따라다닌, 사망자란 이름의 족쇄를 벗을 수 있었다. “실종선고를 먼저 취소하고 재판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는 이씨의 호소를 재판부가 받아들인 결과다. 그 뒤 이씨는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같은 범죄로 이미 여덟차례나 처벌을 받아 무거운 형이 예상되지만, 이씨는 16년에 걸친 고통을 배심원 앞에서 토로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날 법정에는 배심원 8명이 참석해 이씨와, 증인으로 참석한 이씨의 사촌형제의 이야기를 들었다. 배심원들은 ‘죽은 사람’이 어떻게 교도소에 수감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재판부(형사합의27부·재판장 김형두)는 “법적으로는 사망했지만, 실제로는 살아있기 때문에 재판을 하고 형집행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며 “절도죄로 기소가 될 때마다 지문 확인을 통해 피고인임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배심원들이 이씨의 딱한 사정을 받아들이면, 실제 선고 형량은 ‘감경사유’를 적용해 권고형의 절반인 3년까지 낮춰질 수 있다. 이씨의 변호인은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범행이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 어느 정도의 형벌이 온당한지 판단해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황춘화 기자 sflow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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