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행우씨가 20일 오후 경기 양주시 은현면 자신의 농장에서 텅 빈 돼지우리를 둘러보고 있다. 지난해 겨울 구제역으로 돼지를 모두 잃은 김씨에게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은 엎친 데 덮친 격의 재앙이다. 양주/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FTA와 나] 어느 축산농민의 하소연
연이은 ‘협정 폭탄’에 축사 못채우고 애간장
“영세농가들 문닫을판 저희에겐 재앙입니다”
연이은 ‘협정 폭탄’에 축사 못채우고 애간장
“영세농가들 문닫을판 저희에겐 재앙입니다”
몸서리치게 추웠던 지난 겨울이 생각났다. 밤새 아내를 붙잡고 울고, 정들었던 돼지를 묻고, 돌아서서 또 울었다. 그렇게 2200마리를 떠나보내고, 이제 1년이 다 돼 간다. “25년 양돈했는데,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왜 이렇게 갈수록 힘이 들지요?” 혼자서 돈사를 정리하던 김행우(59·경기 양주시 은현면)씨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김씨는 지난 8월 어미돼지 180마리를 다시 사들였다. 빨리 출하해 수입을 올리자면 새끼돼지를 많이 들여놓아야 하지만 꿈도 못 꿀 일이다. 돈사 3개 중 2개는 아직도 놀리고 있다. 구제역 보상금도 다 받지 못했고, 유럽연합에 이어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 폭탄까지 떨어졌다.
“어미돼지 입식해 새끼 낳고, 그놈을 길러서 출하하자면 꼬박 1년이 걸립니다. 그동안 들어오는 돈은 한푼 없고, 사료값과 약값으로 한달에 수천만원 나갑니다. 욕심내서 많이 들여올 수가 없지요. 이런 와중에 에프티에이라니, 저희들에게는 재앙입니다.”
경기 양주의 다른 양돈농가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농가 셋 중 하나는 구제역이 끝났지만 돈사를 다시 채우지 못하고 있다. 재입식 자금 부족에 에프티에이 불안까지 겹친 탓이다.
“몇 년 전 유럽의 양돈농가를 둘러봤어요. 돈사가 빨간 벽돌로 지어졌는데, 사람 사는 집인 줄 알았어요. 동물복지도 분뇨처리도 완벽해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좁은 땅덩어리에 밀식사육하고, 분뇨처리도 문제잖아요. 당연히 질병이 많지요. 이대로 준비 없이 개방하는 것은 초등학생더러 링에 올라가라는 격이에요. 도저히 경쟁이 안 됩니다.”
실제로 우리 양돈산업은 기본적 생산성 지표인 ‘어미돼지 연간 출하 마릿수’(MSY)에서 유럽이나 미국에 비해 30%가량 뒤처진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어미돼지 한 마리가 해마다 새끼 30마리를 낳아 22~24마리를 시장에 내는데, 우리는 겨우 15마리를 살려 출하하는 데 그치고 있다. 정현규 도드람축산 기술고문은 “에프티에이가 발효되면 하위 30%의 양돈농가는 버티기 어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김씨는 사료 먹이고 분뇨 처리하는 일까지, 일꾼 도움 없이 아내와 해오고 있다. “나이가 들어가니 몸에 아픈 곳이 늘어나고 있지만, 무엇보다 마음이 가장 아프다”고 말하고 난 김씨는 고개를 돌려 눈물을 훔쳤다. “자동차와 아이티(IT)가 좋다고, 거기에서 이긴다고 농업을 쉽게 죽여서야 되겠습니까. 농자천하지대본의 기본정신은 가져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랑비가 촉촉이 땅을 적시던 지난 19일 이른 아침, 국내 최대의 포도 집산지인 경북 상주시 모서면으로 들어서니, 골짜기마다 작은 포도밭이 점점이 펼쳐져 있었다. 벼농사를 포기한 문전옥답에도, 갈아엎은 인삼밭에도 새로 심는 작목은 어김없이 포도였다. 토박이 농부 박동준(44)씨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이 바꿔놓은 풍경’이라고 했다. “수입산 때문에 값은 떨어지는데 생산비는 턱없이 올라가니, 너나없이 규모화에서 돌파구를 찾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박씨 역시 5300㎡ 짓던 포도농사를 2009년에 4000㎡ 더 늘렸다. 나무를 새로 심고 비가림 시설을 하는 데 모두 2000만원이 또 들어갔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모두 포도 농사만 늘리고 있어요. 달리 지어 먹을 게 있어야죠. 이렇게 포도 하나로 단작화하다가는 한방에 다 날아간다고 속으론 불안해하면서도 일단은 달려드는 겁니다.”
박씨도 정부 보조금을 받고 5년 동안 포도농사를 중단했던 4500㎡ 비닐하우스에 내년 봄에는 다시 포도를 심을 생각이다. 박씨는 이 비닐하우스에 생강·고구마·수박 등 여러 작물을 했지만 모두 실패한 뒤, 지난해에는 아예 한 귀농인에게 임대해 주었다. 하지만 고추농사를 시작한 이 귀농인도 탄저병으로 낭패를 당하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한-칠레 에프티에이로 시설포도 농가 피해가 없었다고 홍보하고 있다지요. 정말 물정 모르는 소리예요. 이곳의 시설포도 농가들은 칠레 포도가 수입되는 3~5월 사이를 피하기 위해 출하 시기를 7~8월로 늦춰야 했습니다. 일반 노지포도와 출하 시기가 겹치면서 공급물량이 넘치고, 전반적인 수익성이 떨어졌지요. 그 결과 빚내서 재배면적 늘리고 생산성 높이겠다고 시설에 더 투자하는 현상이 나타난 겁니다.”
박씨는 “에프티에이가 농사를 투기판으로 만들고 있다”고 걱정했다. “우리 동네에서는 포도 작목 하나로 쏠려가고, 사과 집산지에서는 모두 사과만 지으려 해요. 조만간 공급과잉으로 일이 터질 게 불 보듯 뻔한데, 그때 농가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소비자들도 혼란스런 가격 급등락의 피해자가 될 겁니다.”
양주 상주/김현대 선임기자 koala5@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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