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한국 사회는 작금의 복지국가 이슈를 진보적 지식인집단이 주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특징적이다. 독일의 복지체제는 비스마르크에 의해 권위주의적으로 위로부터 도입되었고, 전후에 다른 유럽 국가는 모두 정당들이 주도했다. 한국 사회에서 복지국가 요구가 커지고 있는 이유는 국가-재벌연합이 주도한 성장일변도 정책이 그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현재의 성장체제에서는 시장경쟁에서의 열패자들을 보호할 사회적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거나 극히 취약하다. 성장과 분배의 불균형, 정규직-비정규직에 의한 노동시장 양극화로 사회성원 다수가 행복하지 못하고 불만이 증대하고 있다. 성장일변도의 시장경제체제를 더는 허용하지 않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한국의 복지국가 이슈에서는 특히 적극적인 노동시장정책 영역에 주목해야 한다. 노동시장을 개혁해 고용을 확대하고 일자리의 질을 향상시키고 고용보호를 실현하려면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관계를 조정해야 하고, 정규-비정규직 노동시장 양극화를 완화·해소해야 한다. 특히 교육문제를 복지국가의 틀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학생의 사회경제적 배경과 노동시장에서 경쟁력을 갖는 대학입학 사이에 높은 상관관계가 강화돼왔다. 이는 사회적 상향이동의 문을 닫아버리고 양극화를 재생산하고 있는 요인이다. 좋은 교육제도를 발전시키면 노동시장 경쟁에 들어오는 조건을 평등하게 함으로써 공정경쟁을 실현할 수 있다.
복지국가 건설 프로젝트에서는 이를 떠받치는 정치적 행위자가 중요하다. 거기에는 조직노동이 필수적으로 포함돼야 하는데 작금의 복지 논의에서는 이 문제가 빠져 있거나 잘 보이지 않는다. 서구 유럽국가의 복지체제 출발점은 모두 노동과 관련돼 있었다. 노동자들의 요구에 대응했거나 그 요구를 포섭했고, 노동자들과 연합했거나 그들을 정치과정에 참여시켰다. 노동자들과 더불어 복지국가 합의를 만들지 않고서는 복지국가 프로젝트가 불가능하다. 복지국가의 중심적인 지지세력은 노동이다. 노동자들이 복지국가를 가장 필요로 하고, 그 복지의 주요 사안들이 대체로 노동문제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이다.
노동이라는 행위자가 빠진 채 국가가 복지행정을 중심으로 위로부터 복지혜택을 확대하면 복지체제를 도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비스마르크식 권위주의 복지체제가 수립될 것이다. 복지국가의 도입은 민주주의 가치와 병행해야 한다. 즉 노동운동이 사회적 시민권과 아울러 정치적 시민권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복지의 개념을 수용하는 생산체제 즉, ‘복지 있는 성장’이어야 한다.
복지국가의 목표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도 중요하다. 우리 삶의 사회경제적 조건은 복지가 더는 지체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가의 재정적자 증대, 저성장-저고용, 노년그룹의 증가와 출산율 저하, 세계시장에서 경쟁의 가열화라는 조건에 의해 복지국가의 범위에 근본적인 제약이 가해지고 있다. 복지국가에 대한 필요와 제약 사이에 놓여 있는 딜레마를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복지국가 프로젝트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정치세력의 형성이다.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한림국제대학원대 정치경영연구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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