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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찾아서] YS 맏사위가 준 ‘마닐라 봉투’ 안에 든 지침 / 한완상

등록 2012-05-16 20:18

1992년 14대 대선 무렵 김영삼 후보와 부인 손명순씨가 직계가족과 함께했다. 맨 왼쪽부터 맏아들 은철씨, 둘째아들 현철씨, 맏사위 이창해씨와 혜영씨, 둘째딸 혜경씨, 막내딸 혜숙씨가 부부끼리 나란히 자리했다.  자료사진
1992년 14대 대선 무렵 김영삼 후보와 부인 손명순씨가 직계가족과 함께했다. 맨 왼쪽부터 맏아들 은철씨, 둘째아들 현철씨, 맏사위 이창해씨와 혜영씨, 둘째딸 혜경씨, 막내딸 혜숙씨가 부부끼리 나란히 자리했다. 자료사진
한완상 비망록-햇볕 따라 평화 따라 ③
1993년 2월1일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은 단둘이 마주한 자리에서 비서실장을 맡아달라고 제의했다. 그러면서 노태우 정부 때 안기부장을 지낸 서동권씨가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을 추천했다며 그 이유를 들려줬다.

우선 새 정부를 청와대 중심으로 강력하게 끌고 가려면 최병렬씨를 기용하라고 했단다. 그의 추진력과 박력을 높이 평가했던 것이다. 반대로 청와대를 부드럽게 관리하면서 정부를 이끌려면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유연한 이홍구씨가 적임자라고 했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임기 5년간 개혁에 박차를 가할 생각이라면 내가 적임자라고 추천했단다. 아마도 당선인은 서 부장의 의견을 존중했기에 나에게 비서실장을 맡으라고 했던 것 같다.

당선인은 이어 25일 취임식 직후 국회로부터 총리와 감사원장 임명 동의를 얻고, 26일 국무위원을 임명하자마자 오후에 국무회의를 열어 대사면을 결의해 새 정부 출범과 함께 국민 대통합의 기운을 진작시키자는 얘기를 했다.

비서실장 제의를 받고 무엇보다 내가 잘할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비서실장은 행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힘차게 개혁을 추진해야 하는 한편, 국회 및 정치권과도 소통의 문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에서 개혁을 잘 관철시켜야 한다. 국민에게 희망과 인내를 동시에 요구하면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도록 대통령을 보좌하는 일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혼자 그렇게 속앓이를 하고 있는데, 당선인의 가신그룹인 상도동 쪽에서 ‘비서실장 내정’의 낌새를 감지한 듯 최형우 의원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는 점심을 함께 하며 당선인이 개혁에 성공하는 대통령이 되도록 힘을 보태자고 뜻을 모았다. 하지만 나는 끝내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지는 않았다.

속앓이를 했던 또다른 이유는 당선인의 맏사위 이창해씨로부터 전해받은 ‘마닐라 봉투’ 때문이었다. 봉투 안에는 대통령의 친인척 관리 지침이 들어 있었는데, 역사적으로 부정적 평가를 받은 대통령일수록 그 가족들의 잘못된 처신에서 비롯된 사례가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었다.

앞서 지난 연말 성탄절은 독실한 기독교 장로로서 대통령이 된 만큼 당선인 가족들에게 어느 때보다 기쁜 축하의 자리가 됐을 터였다. 그런데 듣자하니 그 자리에 긴장감이 감돌았다고 했다. 선거 때 월권에 가까운 차남 현철씨의 행동을 지켜본 가족들이 진솔한 충고를 했는데, 현철씨가 이에 격분하는 바람에 서로 유쾌하지 않은 말을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특히 이창해씨와 손아래 처남인 현철씨 사이에 격한 감정이 오간 모양이었다.

당시 당선인은 2남3녀를 모두 출가시켜 세 명의 사위가 있었다. 연세대를 나온 큰딸 혜영씨와 결혼한 이창해씨는 무역회사를 다니다 야당 정치인을 장인으로 둔 죄로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지난 대선 때는 잠시 귀국해 장인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드러나지 않게 헌신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논공행상’도 바라지 않고 연초 다시 미국으로 조용히 떠나는 길에 나를 만나 봉투를 주며 부탁을 했던 것이다. 그날 이후 지금껏 그를 다시 만난 적은 없다.

2월 중순까지 취임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작성팀원들에게도 비서실장 제의에 대해 절대 침묵했다. 당시 나는 한 가지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새 정부가 개혁에 성공하려면 새 술은 반드시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술이 신한국 개혁의 비전과 정책이라면, 새 부대는 비전과 정책을 실행에 옮기는 인물이다.’ 당선인이 국무위원을 비롯한 새 정부 핵심 인사에 어떤 인물을 기용할지, 그들이 과연 새 술을 담아낼 수 있을지 나는 솔직히 염려되었다. 그래서 당선인과 통화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술이 아무리 새로워도 헌 부대에 담으면 줄줄 새기 때문에 개혁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런 만큼 당선인이 인선을 두고 누구와 의논하는지는 몰랐지만 신중하게 인재를 등용할 거라고 내심 기대했다.

나는 ‘신한국’의 새 술은 우선 취임사에서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고 믿었고, 문제는 새 부대의 질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한완상 전 통일·교육 부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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