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사회일반

전두환쪽 맞서다 숨진 김오랑 가족 “보상커녕 불이익 걱정”

등록 2013-05-21 21:13수정 2013-05-22 18:06

김오랑 소령의 33주기인 지난해 12월12일 서울 동작구 현충원 묘역에서 추모객들이 분향하며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김 소령은 반란군에 맞서 사령관 체포작전을 저지하다 희생됐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김오랑 소령의 33주기인 지난해 12월12일 서울 동작구 현충원 묘역에서 추모객들이 분향하며 고인의 넋을 기리고 있다. 1979년 12·12 군사반란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 비서실장이었던 김 소령은 반란군에 맞서 사령관 체포작전을 저지하다 희생됐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한겨레 ‘크라우드소싱’ 기획|전두환 재산을 찾아라
② 너무 늦게 온 정의 김오랑에 대한 세개의 기억
* 김오랑 : 12·12 쿠데타 당시 특전사령관 비서실장

12·12직전 부부동반 식사도 했던
2기 선배 박종규 중령 총에 맞아

허삼수·장세동 등 쿠데타 세력
선거 나오는 것 보며 화가 나

‘추모비 결의안’에 그나마 안도
“우리 동생 다시 태어나는 느낌”

가해자는 잘 살고 있다. 1672억원의 추징금을 내지 않고 5·18 민주화운동 참여자들에게 사과하지 않아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잘 산다. 전 전 대통령은 권력을 잡기 위해 일으킨 12·12 군사반란 과정에서 숨진 이름 없는 사병과 하급장교의 유가족에게도 사과하지 않았다.

1979년 12월12일 밤~13일 새벽 김오랑 당시 소령은 반란군에 맞서다 숨졌다. 역사적 평가는 34년 만에야 비로소 바로잡혔다. ‘고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 수정안이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에서 가결된 것이다. 하지만 국방부의 반대로 ‘무공훈장’은 ‘훈장’으로 바뀌었다. 결의안이 실천될지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법적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두 사병의 죽음은 더욱 까마득하게 잊혀졌다. 국방부 헌병대 소속이었던 정선엽 병장은 국방부를 점거하려는 신군부에 저항하다 숨졌고, 신군부 쪽 33헌병대 소속이던 박윤관 일병은 참모총장공관 초소를 점령한 뒤 해병대가 초소를 되찾는 과정에서 숨졌다.

추징금을 내지 않고도 풍요로운 전두환 전 대통령의 가족과 달리, 두 사병과 김오랑 소령의 가족은 풍비박산났다. <한겨레>는 시민의 힘으로 전 전 대통령의 은닉 재산을 찾아 추징하는 ‘크라우드 소싱 기획’의 일환으로, 군사반란 희생자들의 죽음에 대한 기억을 소개한다.

고나무 김선식 기자 dokko@hani.co.kr


12·12 쿠데타에 저항하다 숨진 김오랑 당시 소령의 형 김태랑(77)씨가 지난 6일 부산 사상구 엄궁동 자택에서 <한겨레> 기자와 인터뷰하며 울먹이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12·12 쿠데타에 저항하다 숨진 김오랑 당시 소령의 형 김태랑(77)씨가 지난 6일 부산 사상구 엄궁동 자택에서 <한겨레> 기자와 인터뷰하며 울먹이고 있다. 류우종 기자 wjryu@hani.co.kr
12·12직전 부부동반 식사도 했던
2기 선배 박종규 중령 총에 맞아

허삼수·장세동 등 쿠데타 세력
선거 나오는 것 보며 화가 나

‘추모비 결의안’에 그나마 안도
“우리 동생 다시 태어나는 느낌”

34년 전 상처를 ‘죽을 때까지 안고 산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8살 아래 동생 김오랑 소령을 잃은 형 김태랑(77)씨다.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숨졌다. 유신헌법을 만든 독재자가 숨지자 국민 대부분은 민주화가 오리라 전망했다. 박 전 대통령이 총애하고 특혜를 줘온 군부 사조직 ‘하나회’가 권력투쟁에 나섰다. 유신체제에서 누린 기득권을 잃으리라는 위기감의 발로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 등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그해 12월12일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최규하 당시 대통령의 재가 없이 불법적으로 상관인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무력으로 연행했다. 정병주 당시 특전사령관은 ‘군인 정치’는 안 된다며 군사반란에 맞섰다. 김오랑 소령은 당시 정병주 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김 소령은 신군부에 맞선 사령관을 지키다 반란군의 총격으로 35살에 숨졌다.

김씨는 동생의 죽음에 대해 사과한 신군부 인사가 아직 한명도 없었다고 증언했다. 34년 맺힌 한은 풀리지 않고 있다. 국가에 의한 생채기를 안고 평생을 소시민으로 살아온 그가 8년 만에 언론 앞에 섰다. 기자가 “당시 김오랑 소령 사망소식을 어떻게 전해 들었냐”고 묻자 그는 그날 저녁 상황을 생생히 떠올렸다.

“그날(1979년 12월13일) 군부에 총격 사건이 있었다고 방송에 나오더라고요. 경미한 피해가 있었다고 했고 피해당한 사람 이름은 안 나왔는데…. 저녁에 김해 부모님댁에서 ‘동생이 숨졌다’는 전화가 왔습니다. 다음날 바로 열차 타고 서울로 올라갔지요.”

1979년 군사반란 뒤 노재현 국방부 장관은 특별담화문에서 “12월13일 상오 2시께 국방부 청사에서 일어난 총성은 계엄군의 증가배치 중 이미 배치되어 있던 초병과의 오인충돌로 인한 것이었고 사상자는 없다”(<경향신문> 12월13일치)고 밝혔다. 김씨는 뉴스와 현실의 간극에 혼란스러웠다.

그는 “그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아무것도 안 보이고. 솔직히 내가 환경이 나빠가지고 공부도 못하고 그러는 입장에서 말이죠, 너(김 소령)는 나같이 그리 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대리만족으로 희망을 그쪽(김 소령)에 걸고 그랬거든요. ‘니라도 잘돼야 한다….’”

그는 아직도 상실감을 못 떨치고 있었다. “그런 일 있고 나서는 누구한테 떳떳하게 얘기할 수도 없고, 내 혼자서 막 울고 그랬죠. 노력을 많이 한 아이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생각하면 막….” 그는 문장을 끝내지 못하고 눈물을 떨궜다.

형에게 공부 잘하는 동생은 ‘집안의 기둥’이었다. 김태랑씨는 집안이 가난해 대학 진학을 못했다. 닥치는 대로 일하고 어떤 회사든 다녔다. 김 소령도 초등학교 졸업 뒤 영세한 화투공장에서 일했지만, 김씨가 아버지에게 항의해 공장을 그만두게 했다.

김씨는 다니던 직물회사 월급으로 동생의 학비를 댔다. 다른 가난한 수재들처럼, 김 소령은 국립대학인 부산대에 합격했지만 돈이 전혀 들지 않는 육사에 가기 위해 재수를 선택했다. 재수생 김오랑은 공부방 벽에 ‘꿈의 상처에 신음 않고, 밝히리라 횃불’이라고 써붙였다. 이 말을 전하며 형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신군부 쪽 인사들이 유족들에게 찾아와 사과한 적이 있습니까?”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한명도 없습니다. 풍문에 (김오랑) 추모사업회 같은 곳에 (신군부 인사가) 찾아왔나 모르겠는데, 사과도 하고 그런 말도 전해는 오는데… 직접 유족들한테 사과를 해야 정당한 사과지.”

김씨에게 국가의 보상은 사치였다. “오히려 말 잘못해서 (가족이) 다치지 않을까를 걱정했습니다. 예우나 보상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어요. 보상이야 부인(백영옥씨)이 받는 거고, 오히려 (우리는) 불이익을 당할까 걱정했지….”

김 소령의 순직에 대해 국가가 지급한 보상금은 부인 백영옥씨가 받아왔으나 백씨가 숨진 1991년 6월 이후 더는 지급되지 않고 있다. 백씨에게 마지막으로 지급된 보상금은 35만8000원(1991년 매달 지급금)이었다.

기자가 “동생이 죽고 나서 불안했냐”고 물었다. “노태우 대통령 때까진 불안했죠. 제일 기억에 남는 게, (신군부 보안사 인사처장이었던) 허삼수가 옥중에서 국회의원 출마했잖아요.” 김 소령의 죽음에 책임져야 할 이들이 되레 힘을 얻게 되는 상황은 그에게 몹시 불안하고 불쾌한 것이었다. 그는 “장세동이 대통령 출마다 뭐다 하는 상황도 괴로웠다”고 말했다.

군사반란 공범으로 1996년 구속수감중이던 허삼수씨는 그해 4월 치러진 15대 총선에 옥중출마했다. 정승화 육참총장을 체포한 당사자다. 허화평씨도 15대 총선에 경북 포항에서 옥중출마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희생양이라고 주장했다. 허화평씨만 당선됐다. 군사반란 핵심인 장세동 전 안기부장은 2002년 10월 16대 대선 출마를 선언하며 후보 등록을 했고, 대선 하루 전 후보직을 사퇴했다.

“화나죠. 그래선 안 되는 거지요. 유족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이 나라의 국민 된 입장에서 절대로 안 되는 겁니다. 나라를 위해서 어쩌고 떠벌리는데, 그래선 안 되는 겁니다. 거꾸로 가는 사람이 바로 가는 사람을 다 없애가지고 됩니까. 안 죽일라면 얼마든지 안 죽이잖아요. 왜 죽입니까, 사람을 갖다가. 군인도 사람인데. 그런 군인 하나 키워내려면 국가 예산이 얼마나 들어가고 그런 사람이 키운다고 키워집니까, 보통 사람이 아닌데.”(울음)

국회에서 ‘고 김오랑 중령 무공훈장 추서 및 추모비 건립 촉구 결의안’ 수정안이 지난달 29일 통과된 데 대해 김씨는 그나마 안도했다. “인자는 마, 우리 동생이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느꼈죠. 저쪽(신군부)에서 하는 거는 위법적인 거고, 판결이 이미 끝난 상태 아닙니까. 육사에 추모비를 세우고 군에서도 훈장을 추서해서 올바른 군인정신을 함양을 해 가지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그런 군인이 돼야 하는 거 아닙니까.”

김씨는 기자와 함께 지난 6일 경남 김해시 삼정동 김오랑의 생가 터를 30여년 만에 방문했다. 김 소령의 생가인 초가집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동네 경로당에서 종고모 김순금(89)씨와 30여년 만에 조우했다. 김씨가 대뜸 말했다. “고모님, 육군사관학교에 오랑이 추모비 세우고 그리할 겁니다.” 그는 동생의 죽음이 언젠가 정당하게 평가받으리라 굳게 믿고 있었다.

부산·김해/김선식 기자 kss@hani.co.kr

※ 전두환 전 대통령이 내지 않은 추징금 1672억원이 올해 10월 추징 시효가 만료됩니다. <한겨레>가 전 전 대통령의 숨은 재산을 찾기 위해 독자 여러분께 ‘크라우드 소싱’(crowd sourcing)을 제안합니다. <한겨레>가 제공하는 ‘잊지 말자 전두환 사전 1.0’을 마음껏 내려받으실 수 있습니다.(http://c.hani.co.kr/facebook/2139505) 여기엔 전 전 대통령의 은닉 재산을 찾는 데 실마리가 될 정보들이 들어 있습니다. 독자와 시민들이 함께 정보를 분석하고, 추가 사실을 제보하며, 취재 방향에 의견을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한겨레>가 탐사에 나서겠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재산찾기 협업’은 올해 10월까지 계속됩니다.

제보 연락처: 전자우편 dokko@hani.co.kr, 트위터 @dokko518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노무현 전 대통령 미공개 사진 7장 추가 공개
‘일베’ 중독된 회원 만나보니…“‘김치X’라고 쓰면 기분이 풀린다”
“홍어 택배라니요?”…일베 언어 테러에 518 유족 피멍
전두환에 맞서다 숨진 김오랑 소령 가족 “보상커녕 불이익 걱정”
국제중이 뭐길래…12살 영태의 대입 뺨치는 입시전쟁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속보] 법원, 윤석열 체포영장 재발부 1.

[속보] 법원, 윤석열 체포영장 재발부

“사탄 쫓는 등불 같았다”...‘아미밤’ 들고 화장실로 시민 이끈 신부 2.

“사탄 쫓는 등불 같았다”...‘아미밤’ 들고 화장실로 시민 이끈 신부

‘관저 김건희 개 산책 사진’ 어디서 찍었나…“남산에서 보인다길래” 3.

‘관저 김건희 개 산책 사진’ 어디서 찍었나…“남산에서 보인다길래”

무장한 특전사 112명, 계엄 해제 5분 전 민주당사로 출동했다 4.

무장한 특전사 112명, 계엄 해제 5분 전 민주당사로 출동했다

유동규, 이재명에게 “왜 째려보냐”…재판장 “두 분 눈싸움 하시나” 5.

유동규, 이재명에게 “왜 째려보냐”…재판장 “두 분 눈싸움 하시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