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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교단의 적’ 없애려 살인까지 저질렀나

등록 2013-09-06 19:15수정 2013-09-08 20:06

범인을 잡기까지 9년이 걸렸다. 쪽지문을 채취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지문 소유자가 검거된 뒤, 공범 두 명도 연이어 체포됐다. 사건의 주범들은 증산교도였으나, 교단은 “우리 교단 사람이 아니다”라고 꼬리를 잘랐다. 그들은 ‘언젠가는 교단이 다시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2010년 4월13일치 <에스비에스> 화면 갈무리
범인을 잡기까지 9년이 걸렸다. 쪽지문을 채취했지만 당시 기술로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지문 소유자가 검거된 뒤, 공범 두 명도 연이어 체포됐다. 사건의 주범들은 증산교도였으나, 교단은 “우리 교단 사람이 아니다”라고 꼬리를 잘랐다. 그들은 ‘언젠가는 교단이 다시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2010년 4월13일치 <에스비에스> 화면 갈무리
[토요판] 표창원의 죄와벌
<29> 홍성렬 교수 피살사건
‘증산교 대가’ 홍 교수 부부가
의문의 살인을 당했다
유일한 증거는 머리카락·쪽지문
그러나 당시 과학기술로는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다

9년 걸려 찾아낸 범인은 세명
‘근거없이 교단 비판한다’며
행정실장의 지시같은 부탁에
얼굴도 모르는 노부부 죽인 범인
범인은 독실한 증산교인이었다

2001년 10월25일, 충남 예산군 예산읍 시골 마을에 위치한 전 공주대학교 수학과 교수 홍성렬(당시 66살)씨 부부의 주택은 늦은 가을밤의 고요한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갑자기 3명의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서더니 홍 교수의 머리를 향해 무엇인가를 휘둘렀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홍 교수가 쓰러졌다. 이상한 소리에 방에서 나온 홍 교수의 부인(당시 62살)에게도 괴한의 잔인한 공격이 가해졌다. 괴한들은 바닥에 쓰러진 노부부에게 마구 폭행을 가했다. ‘확인 살인’이었다. 금품을 훔치러 들어왔다가 들킨 절도범이나, 피해자들을 폭행하고 위협해 귀중품을 탈취하려는 강도의 소행은 아니었다. 탈취된 금품도 없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노부부를 ‘반드시 살해하겠다’는 확실한 목적 아래 행해진 범행이었다.

노부부의 사망을 확인한 괴한들은 피해자들의 주검을 마당 한편에 있는 예배당으로 옮겨 은닉하고 나서 오랜 시간에 걸쳐 꼼꼼하게 핏자국과 발자국, 지문 등을 지웠다. 철저한 ‘증거인멸’ 작업이었다. 현장 정리를 끝낸 괴한들은 유유히 사라졌다. 오랜 시간이 걸린 이 범행은 이날 범행 시간대에, 다른 사람이 피해자의 집을 방문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이루어지기 어려운 범행이었다. 과연 범인은 누굴까, 왜 이런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을까? 두 사람의 주검은 만 24시간이 넘게 지난 다음날 밤 10시40분, 두 사람이 걱정되어 찾아온 사위(당시 45살, 공주산업대 교수)에 의해 발견되었다.

2010년 4월13일치 <에스비에스> 화면 갈무리
2010년 4월13일치 <에스비에스> 화면 갈무리

위협과 협박에 계속 시달렸던 홍 교수

피해자 홍성렬(홍범초) 교수는 전공인 수학보다 동학이나 증산교 등 ‘민족종교’ 분야의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였다. 특히 <증산교 개설>, <범증산교사> 등의 책을 저술했고 <천지공사>라는 증산교 교리를 전파하는 월간지를 10여년 동안 발행해 왔으며 증산종단연합회장 및 증산사상연구회장을 역임하는 등 ‘증산교’ 분야의 대가였다. 어떤 증산사상 관련 교단과 교리 문제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겪어 왔던 홍 교수는 자신의 집에 독자적인 예배당을 차려놓고 지지자들과 따로 예배를 드리며 교단에 대한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중이었다.

증산교는 구한말 절망에 빠진 농민과 백정, 여성 등 기층 민중들을 위한 세상을 만든다며 ‘후천개벽’을 약속한 증산 강일순(1871~1909)을 상제로 받들어 모시는 종교다. 일제강점기 탄압으로 해체되었다가 광복 이후 증산교, 증산도, 선도교, 보천교, 미륵불교, 제화교, 태을교 및 대순진리회 등 수십개의 독립교단이 난맥상을 이루며 창설되어 극심한 갈등과 혼란을 겪던 중이었다. 홍 교수는 현재의 증산교 계열 교단들이 교조인 강증산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 기복신앙적인 ‘혹세무민’으로 교세 확장과 수익만 챙기고 있다고 비판하며 자신의 집을 작은 교당으로 꾸민 채 방문객을 맞이하며 설교를 하고 예배를 봉헌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홍 교수에 대한 위협과 협박이 끊이질 않았고 사건 다음날 사위가 협박전화 발신지를 표시하는 장치를 구입해 설치하려고 찾아갔다가 시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은 현장 보존부터 철저를 기했다. 피해자가 지역 유명인사이면서 종교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자칫 대형 의혹사건으로 번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곧 도착한 과학수사반은 현장에 대한 면밀한 감식을 실시했다. 꼼꼼하게 증거를 인멸한 뒤라서 많은 증거를 발견할 수는 없었지만 50여 점의 머리카락을 수거했고 방바닥과 음료수 병 및 방명록 책갈피에서 쪽지문(손가락 일부만 접촉해 부분적으로 남겨진 지문)을 채취해 낼 수 있었다. 특히, 방명록에서 사건 발생 당일 방문자들의 기록이 남겨진 부분만 찢겨 나갔고 그 부분에서 어렵게 쪽지문을 채취해 냈기 때문에 경찰은 신원 확인에 큰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당시 경찰의 지문검색 장비는 쪽지문만으로는 주민등록 데이터베이스(DB) 안에 있는 지문 원본과의 일치율을 판독해낼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현장에서 수거한 머리카락 중에서 유전자(DNA)를 추출해 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디엔에이의 주인이 반드시 범인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머리카락은 지문과 달리 용의자가 특정되지 않는 한 그의 신원을 확인할 수는 없다는 한계가 도사리고 있었다. 일단 피해자 홍 교수 부부와 가족 등 가까운 지인 중에는 현장에서 발견된 모발의 디엔에이와 일치하는 사람이 없었다. 피해자들의 지인 외에도 이웃, 인근 거주 불량배나 전과자 등 우범자들과 최근 홍 교수의 집과 예배당을 찾은 사람들, 배달이나 검침, 외판 등을 위해 방문한 사람들을 모두 조사했지만 모발의 디엔에이와 일치하거나 혐의점이 있는 사람은 발견되지 않았다.

2010년 4월13일치 <에스비에스> 화면 갈무리
2010년 4월13일치 <에스비에스> 화면 갈무리

강도높은 수사 받던 행정실장의 자살

수사는 답보 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열흘이 넘도록 사건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종교 관련 학자들과 학회, 충남지역 교수 및 학자들이 경찰에 항의서한을 제출하고 사건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방문을 하기도 하는 등 여론의 압박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기만 했다. 학계와 여론의 의혹은 한 증산교 관련 교단을 향해 있었다. 경찰 역시 ‘의혹과 심증’을 따라 교단에 대한 수사를 강도 높게 진행했지만 물증이나 진술, 뚜렷한 혐의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더욱이 2002년 교주의 심복으로 평소 홍 교수를 ‘교단의 적’으로 지칭하며 공격적 발언을 해온 탓에 강도 높은 수사를 받고 있던 교단 행정실장이 자살하는 바람에 수사가 진척되지 못했다.

9년 뒤인 2010년. 사건은 미궁에 빠져 있었지만 인류의 과학기술은 발전을 멈추지 않았다. 과학수사 장비와 기술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경찰청이 많은 예산과 인력을 들여 추진한 ‘지문 자동검색기 고도화 사업’으로 개선된 장비와 기술은 9년 전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던 쪽지문의 ‘보이지 않는 융선’ 부분을 추정, 복원해 내었다. 복원된 지문과 일치율이 가장 높은 데이터베이스 속 지문의 소유자는 이아무개(당시 38살)씨. 쪽지문에서 추정 복원해 찾아낸 대상이기 때문에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지문의 소유자일 가능성은 높았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모발에서 추출된 디엔에이와의 일치 여부, 사건 당일 알리바이, 동기 등 추가로 확인해야 할 것이 많았다.

경찰은 이씨의 소재 파악에 나섰고 2010년 3월16일, 경기도 안성의 한 피시방에 있는 그를 발견했다. 장시간 그의 동태를 감시하던 예산경찰서 강력팀 김응선 형사는 이씨가 복도에서 담배를 피운 뒤 자리를 뜨자 신속하게 꽁초를 수거해 비닐 증거봉투에 담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는 꽁초에 묻은 타액의 디엔에이가 9년 전 홍 교수 부부 피살 현장에서 수거된 모발 중 하나의 디엔에이와 일치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씨는 곧 검거되었고 공범인 장아무개(당시 50살), 심아무개(당시 48살)씨 역시 체포되었다. 세 사람은 살인 및 시체유기 혐의로 구속되었다.

문제는 ‘범행 동기’와 ‘배후’였다. 세 사람 모두 피해자 홍 교수 부부와는 아무 관계나 면식이 없어 원한이나 금품, 치정 등 살해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세 사람 모두 증산교 관련 교단 소속 교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장씨와 이씨는 동네 선후배로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지만 심씨는 같은 교인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두 사람과 관계가 없었다. 경찰은 프로파일러(범죄심리 분석관)까지 투입하며 교단 혹은 교단 관계자와의 관련성을 밝히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수사의 끝은 자살한 행정실장에게서 멈추고야 말았다. 수사 결과 밝혀진 사실은, 행정실장이 지위도 별다른 역할도 없던 평신도인 장씨와 심씨를 각각 따로 불러 홍 교수가 근거 없이 교단을 비방하고 감언이설로 교인들을 빼가 교단이 곤란한 상황이니 홍 교수를 처단해주면 좋겠다는 ‘지시 같은 부탁’을 했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별도의 지시를 받은 사실을 모른 채 각기 홍 교수 집 부근을 배회하며 기회를 엿보다 같은 지시를 받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은 이제까지 누구를 해쳐 본 적이 없기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논쟁하던 끝에 폭력 전과가 있고 공격적인 성격인 동네 후배 이씨를 끌어들이게 되었다. 세 사람은 치밀하게 공격 계획을 세웠고 석 달에 걸쳐 홍 교수를 추종하는 교인을 가장해 홍 교수의 집에 대한 사전답사를 실시해 요일별 및 시간대별 방문자 현황과 홍 교수 부부의 생활패턴 및 집안 구조를 파악했다. 그동안 너무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시 이행을 하지 않는다는 교단 행정실장의 추궁과 재촉이 몇차례 있었다.

디데이로 잡은 2001년 10월25일 저녁, 방문객이 모두 돌아가고 다른 사람이 찾아오지 않을 것을 확신한 세 사람은 홍 교수 부부를 습격해 잔혹하게 살해하고 증거를 없앤 뒤 교단 행정실장을 찾아가 보고를 했다. 행정실장은 감사인사를 하고는, 도주해 몸을 숨기고 별도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교단 쪽으로는 발길도 돌리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들은 지시에 따라 잠적했고, 교단에서는 오랫동안 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교인명부에서 세 사람의 이름을 삭제했다. 경찰의 수사가 교단 내부를 향해 강도 높게 진행되던 2002년 행정실장은 자살했고 그와 세 사람 간의 연결고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2010년 4월13일치 <에스비에스> 화면 갈무리
2010년 4월13일치 <에스비에스> 화면 갈무리

“교단과 관계없다” 강하게 선 그은 범인들

영국 작가 살만 루슈디는 <악마의 시>라는 책에서 이슬람교와 선지자 무함마드(마호메트)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란의 시아파 지도자 호메이니 등 강경파 원리주의 이슬람교파로부터 ‘공개 살인 명령(fatwa, 파트와)’을 받았고 그를 살해하는 사람에게는 300만달러의 공개 보상금이 걸렸다. 루슈디는 영국 정부의 보호하에 아직 무사하지만, 그의 책 <악마의 시>를 번역한 일본 학자 이가라시 히토시 교수는 의문의 피살을 당했다. 종교 교단의 미움을 받아 살해 명령의 대상이 된 홍성렬 교수의 사례는 비록 그 명령이 비공개, 비밀 지시이긴 했지만 ‘한국의 살만 루슈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홍성렬 교수에 대한 ‘종교 테러 살인’ 사건의 주범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에 다른 사람과 싸움 한 번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농촌에서 자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공장에 취업했고 공장 동료 여성과 결혼해 살다가 연로한 부모님의 치매 등 병치레로 고생하던 끝에 아내마저 병에 걸려 수술을 하는 바람에 회사도 그만두고 생활고에 시달렸다. 삶이 너무 힘들고 팍팍했다. 그때 친구의 소개로 <개벽>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면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 친구와 함께 증산교 관련 교단을 찾게 된 것이다. 교단에서는 자신을 지나칠 정도로 환대해 주었고 존중해 주었다. 학력과 돈, 배경이 없다고 무시하던 ‘바깥세상’과는 전혀 달랐다. 더구나, 동네 후배 등 다른 사람을 데려오니 호칭도 달라지고 보상을 하고 더 나은 대접을 해주는 ‘다단계’ 방식에도 푹 빠져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선교를 했다. 생활고와 부모 병수발도 제쳐두고 종교에만 몰두하는 남편을 말리다 지친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고 결국 부부는 협의이혼을 하게 된다. 남자는 이혼 후에 더 깊이 종교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참에 행정실장의 살인 지시를 받자, 부모나 가정 그리고 자기 자신보다 더 소중한 교단과 교주를 위해 주저없이 살인 지시를 이행한 것이다.

이미 행정실장의 자살로 책임을 벗은 교단은 세 사람의 살인범을 교단에서 축출한 뒤 ‘우리 교단 사람이 아니며 교단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꼬리를 잘라버렸다.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살인범들은 순순히 범행 일체를 자백하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면서 피해자와 유가족에 대한 사죄와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살인 지시를 내린 행정실장이 홍 교수에 대한 감정과 교주에 대한 충성이 지나쳐 ‘개인적으로’ 내린 지시이지 결코 교단이나 교주와는 관련이 없다고 강하게 선을 그었다. 또한 살인사건 이후 이미 9년간 교단을 떠나 있고 교단에서도 파문을 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교단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며 교단을 끝까지 보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마지막으로 ‘언젠가는 교단이 다시 받아들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교단 때문에 자신과는 아무 상관 없는, 무고한 두 사람의 생명을 무참하게 짓밟고 그 때문에 살인범이 되어 9년간 도피 생활을 해야 했고, 인생이 망가진 상태에서도, 교단에 대한 신앙과 충성심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종교적 광신의 무서움이 느껴졌다. 종교는 우리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 귀한 약이 될 수도 있지만, 오용 혹은 남용되면 중독과 부작용을 낳는 마약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해준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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