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죄->유죄->유죄 확정->재심 청구->재심 개시->재심 개시에 대한 즉시항고(검찰)->재심 개시 결정->무죄’
1991년 분신자살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준 혐의로 3년간 감옥살이를 한 강기훈(50)씨가 ‘무죄’라는 한 글자를 판결문으로 확정받고자 23년 동안 다퉈온 법정 기록이다. 그런데 이 기록에 ‘상고’란 단어를 더하게 됐다. 검찰이 지난 13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강씨의 사건을 대법원에 상고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른다. 강씨는 간암 투병중이다.
서울고검은 19일 공소심의위원회를 열어 강씨의 사건을 대법원에 상고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조희진 서울고검 차장은 “과거 대법원에서도 유죄 증거로 채택됐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필적감정 결과의 신빙성을 재심 재판부가 배척하면서 무죄를 선고해 다시 한번 (대법원의) 판단을 받아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로써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의 최종 판단은 다시 한번 대법원에서 내려지게 됐다.
조 차장은 “사건 자체가 1991년 사망한 김기설씨의 유족들이 김씨의 필적이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수사가 시작됐고, 적법한 절차를 거쳐 수사와 재판이 진행돼 대법원에서 유죄가 나온 사건”이라고 했다.
앞서 서울고법 형사10부(권기훈 부장판사)는 지난 13일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돼 1992년 7월 징역 3년이 확정됐던 강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강씨 쪽 송상교 변호사는 검찰의 상고 결정에 대해 “재심결정 단계에서 과거 증거로 채택된 국과수 필적감정이 증명력에 문제가 있다고 얘기가 됐다. 재심과정에서 추가 심리가 필요한 부분은 다 했다. 이번에 새로 증거채택 된 국과수의 감정도 검찰이 신청해서 제출한 것이다. 진실은 명명백백히 밝혀졌고 법적으로는 상고할 여지가 없다. 23년간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책임이 검찰에 있는데 참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검찰이 최근 재벌 총수나 정치인들에 대해선 쉽사리 상고를 포기한 반면, 강씨처럼 과거 시국사건에 연루돼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다가 재심에서 무죄가 난 피고인들에 대해선 잇따라 대법원에 상고를 하고 있다. 검찰이 상고 권한을 자의적으로 남용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재심사건 피해자들의 경우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확정 판결이 나올 경우, 결과적으로 형사 무죄 판결의 확정이 지연되면서 당사자들이 겪는 심적 고통은 늘고 손해배상 청구도 늦어지면서 피해 회복이 더딜 수밖에 없다.
검찰은 수천억원대 배임 혐의 등으로 기소돼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은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에 대해 지난 17일 재상고를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2012년 1월에는 국세청 세무조사를 무마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수십억원을 받은 혐의(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알선수재) 등으로 구속기소돼 1·2심에서 실형이 선고된 이명박 전 대통령의 측근 천신일(71) 세중나모 회장에 대해서도 상고를 포기했다. 또 최근 민주당 이석현 의원과 새누리당 이성헌 의원에 대해서도 상고를 포기했다.
그러나 각각 49년, 40년 만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1차 인민혁명당 사건’과 ‘울릉도간첩단 사건’에 대해 검찰은 지난 1월 모두 대법원에 상고했다.
김정필 기자 fermat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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