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코하마항에 정박중인 피스보트를 배경으로 이정용(오른쪽), 정인환 기자.
세계 각국의 승선자 1000명 관심 천차만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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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신] “케냐에선 해넘이에는 관심없어 대신…” 밤에 대양을 건너다 보면 문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을 경험할 수 있다. 구름에 가려 별도 달도 보이지 않는 날이면 세상은 온통 암흑 천지로 변해 버린다. 수평선의 끝 자락이 밤 하늘과 만나는 지점에선 아무런 경계도 구분도 찾아 볼 수 없다. 하늘과 바다는 그렇게 어둠으로 하나가 돼 버린다. 이럴 때면 갑판에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이 대양에 존재하는 유일한 빛이 되고, 외롭게 바다를 헤쳐 나가는 토파즈호가 만들어 내는 하얀 물보라가 그 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인다. 출항한 지 10여일 만에 첫 기항지인 싱가포르에 도착한 피스보트는 보급품을 가득 채운 뒤 천천히 태평양과 작별을 고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항구를 빠져 나온 토파즈호는 말레이 반도와 수마트라섬을 위 아래로 두고 인도양으로 진입하기 위해 말라카 해협 쪽으로 방향을 잡아 나갔다.
19일 저녁 51회 피스보트 월드크루즈 갑판위에서 적도 통과 기념으로 일본인 승객들이 정통 의상인 스모노를 입고 나와 일본민속춤을 추며 흥겨워 하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말라카 해협이 해상 교통의 요충지임은 쉽게 실감할 수 있었다. 토파즈호 주변으로 끊임없이 대형 유조선과 크고 작은 화물선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양을 향해 내달려갔다. 자그마한 섬들이 잠깐씩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기를 되풀이 했고, 간혹 멀리 말레이반도 남단의 모습이 수평선 끝 자락에서 흐릿하게 눈에 들어 왔다. 잠깐이나마 육지에 발을 내딛은 뒤 원기를 회복한 승선객들은 다시 시작된 선상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 갔다. 항해가 본격화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소모임이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승선객만 1천명 가량이나 되다 보니 저마다 자신의 관심에 따라 끊임없이 이런저런 모임을 꾸리고 있다. 이런 모임을 ‘자주기획’이라고 부르는데, 피스보트 사무국 쪽에선 모임을 만들기 원하는 이들을 상대로 장소도 빌려주고, 모임에 필요한 각종 기자재를 지원해 주기도 한다. 소모임의 종류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새벽 이른 시간에 갑판에 모여 태극권이나 요가를 즐기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아침식사를 마친 직후부터 오전 내내 사교댄스에 열을 올리는 중년들도 있다. 햇볕이 쨍쨍 내리 쬐는 한낮에 젊은이들이 갑판에서 축구를 즐기는 사이, 노인들은 한적한 실내에서 장기나 바둑을 두거나 마작에 심취하기도 한다. 함께 악기를 연주하거나, 종이접기며 바람개비 만들기로 하루를 보내는 이들도 있다. ‘일본 헌법 9조의 모임’처럼 첨예한 정치적 현안을 주제로 하는 모임도 만들어졌다. ‘한글 알파벳을 몰라도 즐길 수 있는 재미있는 한국어 교실’ 같은 실용적인 강좌도 여럿 생겨났다. 가끔은 오랜 항해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이들이 ‘27살만 모여라’ ‘40대 이상은 오늘 한잔 합시다!’ 따위의 ‘번개성’ 모임을 제안해 한바탕 흥을 돋우기도 한다. 매일 아침 발행되는 <항해신문>은 이런 소모임 일정으로 빼곡하게 채워지기 마련이다. 각종 소모임과 강연, 취미생활과 여가활동으로 바쁜 하루를 보낸 승선객들은 해질녘이면 어김없이 뱃머리 갑판으로 몰려든다. 토파즈호가 아프리카를 향해 남서진을 계속하고 있는 탓에 이 무렵 뱃머리에 서면 태양이 수평선 너머로 자취를 감추는 ‘그림 같은’ 장면을 지켜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여든 이들은 흡사 종교의식이라도 치르는 듯 붉게 물든 얼굴로 저 멀리서 조금씩 고도를 낮춰가는 태양을 침묵 속에 응시하곤 한다.
15일 저녁 51회 피스보트 월드크루즈 공연장에서 케냐의 민속공연단인 피터밴드들이 공연중 승객들과 함께 민속춤을 추며 흥을 돋우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그런데 엄수돼야 할 해질 녘 의식에 딴지를 거는 ‘악동’이 나타났다. 피스보트가 항해 기간 동안 선상에서 운영하는 ‘지구대학’ 프로그램 강사로 싱가포르에서 합류한 사미 무레이티 카부리(이하 무레이티·30)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케냐의 왕가리 마타이가 설립한 그린벨트운동(GBM)에서 활동하고 있는 환경운동가다. 무레이티가 피스보트에 합류한 첫날 오후 우연찮게 그와 함께 갑판에 오르게 됐다. 때마침 해가 질 무렵이어서 사람들이 뱃머리 갑판으로 몰려 들기 시작했다. 모두들 하루를 정리하는 ‘의식’을 치를 준비를 마치고, 조용히 수평선 너머를 응시하고 있는 터에 무레이티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그거 알아? 케냐에선 해지는 것 따위에 아무도 신경 안써요!”
케냐의 환경운동가 무레이티.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15일저녁 51회 피스보트 월드크루즈가 말라카 해협을 지나며 큰물살을 만들자 날치들이 놀라서 도망가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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