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이야기 사실적으로 그려내
아빠·남편·직장동료 새롭게 이해
아들딸도 “아빠 힘들죠?” “힘내요”
부하는 “이제야 차장님 이해되네요”
직장선 등장인물 대입 ‘미생놀이’도
아빠·남편·직장동료 새롭게 이해
아들딸도 “아빠 힘들죠?” “힘내요”
부하는 “이제야 차장님 이해되네요”
직장선 등장인물 대입 ‘미생놀이’도
“당신이 왜 그렇게 매일 술 마시고 다니는지 이젠 이해가 돼.”
최근 숙취가 덜 풀린 채 출근 준비를 서두르던 박아무개 부장은 귀를 의심했다고 한다. 대기업 정책조정본부에서 일하는 그는, 자정을 넘겨 술에 취해 귀가하는 것이 ‘일’이었다. “왜? 무슨 일 있느냐”며 아내에게 조심스레 묻자, 아내는 “요즘 당신 같은 사람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 있다”고 했다. 박 부장은 “그 뒤로는 술 마시고 늦게 들어가면 항상 나오던 잔소리가 싹 사라졌다”며 웃었다.
다른 대기업 홍보 상무로 있는 이아무개씨 역시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한다. 그는 최근 대학생 아들에게서 느닷없이 전화를 받았다. 평소에는 집에서도 대화가 없던 아들이었다. ‘무슨 사고를 쳤나’ ‘돈이 필요한가’ 싶었는데, 아들은 대뜸 “아버지, 힘들죠? 힘든 거 다 알아요”라고 했다. 얼마 뒤에는 고등학생 딸까지 전화를 하더니 “아빠, 힘내”라고 말했다.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나중에 아들딸에게 물어보니 ‘드라마 <미생>을 보다가 아빠 생각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종합상사 직장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케이블방송 드라마 <미생>이 원작 만화에 이어 ‘인기 상한가’를 누리면서, 대한민국 정규직·계약직 샐러리맨들의 열정과 애환을 이해하게 됐다는 ‘미생 효과’가 일고 있다. ‘뻔한 사랑 얘기’ 대신 직장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덕에 드라마 속 주인공들에게서 남편과 아빠, 아들, 딸, 동료를 ‘발견’하게 됐다는 것이다.
미생 효과는 기업에서 더 크다. 한 대기업 차장으로 근무하는 황아무개(41)씨는 5일 “얼마 전 회사 후배가 ‘이제야 차장님이 이해가 된다’고 하더라. 막상 나부터 <미생>을 보고 회사 후배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직장인들 사이에서는 드라마 속 캐릭터인 오 차장, 김 대리, 장그래 등을 자신의 회사 동료들에게 대입해보는 ‘미생 놀이’가 유행이다. 건설회사 직원인 이준호(38) 과장은 “아무개는 오 차장, 아무개는 김 대리라며 우리끼리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고 했다. 정유회사에 다니는 김아무개(37) 과장은 “상사 비위도 잘 맞추고 은근히 후배들 앞에서 어깨에 힘주는 곱슬머리 김 대리는 가장 전형적인 ‘대리 캐릭터’다. 오지랖 넓은 한석률 같은 밉상 캐릭터도 꼭 있다. 유일하게 비현실적인 것은 (아이돌 가수 출신 임시완이 맡은) 장그래의 ‘얼굴’이다. 드라마를 본 뒤 삼삼오오 모여 드라마와 비슷한 회사 선후배를 찾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했다.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탄탄한 원작에 기반한 입체적 캐릭터에서 시청자들은 자신의 가족을 보고, 기업 내 권력 암투, 생존을 위한 분투 등의 사실적 이야기에서 직장인들은 자신의 기업을 보는 것 같다. 개인의 능력으로 구조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판타지와 결국은 불가능하다는 현실의 간극을 적절하게 녹여낸 점도 열풍의 한 배경”이라고 짚었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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