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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피스보트4신] 배 위에서 만난 활동가 케냐의 무레이티

등록 2005-09-27 13:25수정 2005-09-27 16:02

요코하마항에 정박중인 피스보트를 배경으로 이정용(오른쪽), 정인환 기자.
요코하마항에 정박중인 피스보트를 배경으로 이정용(오른쪽), 정인환 기자.
‘케냐 현대사’ 서구 식민지배의 역사의 산 모델

<한겨레> 이정용(사진부)·정인환(정치부) 기자는 세계 각국의 시민운동가 등 1052명과 함께 ‘피스보트’(토파즈호)를 타고 105일간 세계일주를 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이번 51차 피스보트 주제)를 모색한다.

지난 3일 시작된 일본 평화단체 피스보트의 51번째 항해는 요코하마에서 출항해 앞으로 105일 동안 아시아-아프리카-유럽-라틴아메리카-남태평양 항로를 따라 세계를 일주한다.

피스보트쪽은 이번 항해에서 케냐의 그린벨트 운동과 아프리카 식량안보 문제, 쿠바의 유기농 혁명 등에 초점을 맞춘 ‘지구대학’ 프로그램을 운영할 예정이다. 또 오는 10월5일 도착 예정인 이집트 포트 사이드에서 모로코 카사블랑카 사이의 뱃길 열흘 동안엔 ‘여성에 대한 폭력’을 주제로 선상 국제심포지엄도 연다. <한겨레>는 승선자들과 함께 5대양 6대주를 돌며 세계 각지에서 평화운동을 펼치는 현지 시민운동가들의 활동상을 현지보고 형식으로 지면에 담아낼 예정이다. [편집자]

사미 무레이티 카부리(이하 무레이티·30)는 케냐 중부 고원지대인 니에리 출신이다. 나이로비 남서부 나쿠르 지역의 국립 에제르턴대학에서 지리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지난 2001년 3월께 ‘그린벨트운동(GBM)’과 인연을 맺었다. 줄잡아 50%를 넘어선다는 케냐의 살인적인 청년 실업률을 감안할 때, 대학 졸업과 함께 일자리를 잡았다는 그는 꽤 운이 좋은 편에 속할 것이다.

그린벨트운동을 주제로 한 지구대학이 시작된 직후부터 무레이티는 특유의 말솜씨로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배 안에 있는 미용실에서 ‘안마를 싸게 해 준다’는 광고 전단을 돌리던 날 무레이티는 이렇게 얘기했다.

“난 안마에 전혀 관심이 없으니, 내 선실에 광고 전단을 넣은 것은 낭비다. 광고 전단을 만드는 데 이면지를 활용하지 않았던데 그 또한 낭비다. 하지만 이게 전부가 아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선 지구촌 어디에선가 나무를 베어내야 한다. 그 나무를 가공해 종이를 만들기 위해선 공장 노동자들의 시간과 노력, 기계를 돌리기 위한 각종 에너지가 필요하다. 피스보트 직원은 그 종이를 사러 가는 수고를 했을 것이고, 또 광고 문안을 작성해 전단을 출력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만들어진 광고전단을 내 선실로 누군가 배달하는 수고도 했을 것이다. 쓸데 없는 광고 전단 1장에는 이렇게 많은 낭비가 쌓여 있다.” 이 친구, 한번 말을 시작하면 막히는 법이 없다.

무레이티는 케냐 최대 부족인 키쿠유족 출신이라고 했다. 케냐에는 키쿠유, 캄바, 루오, 메루 등 8개 주요 부족을 포함해 모두 42개 부족이 있다. 1963년 12월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이듬해 독립 공화국을 선포한 케냐의 근대사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배를 받은 아프리카 국가의 전형이다.

고대로부터 중부 고산지대에 살던 키쿠유족은 케냐산을 신성시해 왔다. 해발 5199m에 이르는 케냐산은 키리냐가라고 불린다. 키쿠유어로 ‘신의 산’이란 뜻이다. 키쿠유족은 어디를 가든 신성한 키리냐가를 향해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하면서 키리냐가와 주민들 사이의 유대의식은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선교사 개척뒤 철로 공사, 그 도로로 식민지배국 군대

무레이티는 “제국주의 본격적인 침략에 앞서 선교사들이 먼저 들어왔다”며 “그들은 케냐의 각 부족들이 섬기고 있던 전통종교를 ‘사악한 것’ ‘우둔한 것’으로 몰아세웠고,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후진적’이란 인식을 갖도록 부추겼다”고 말했다. 선교사들의 뒤를 이어 철도공사가 시작됐다. 1900년대 초반 케냐 동부 항구도시인 몸바사에서 내륙을 관통해 이웃나라 우간다까지 연결되는 철로가 닦였다. 그리고 그 길을 따라 대영제국의 군대가 들어왔다. 본격적인 식민지배의 시작이었다.

1903년께부터 유럽에서 몰려온 백인 정착민들은 식민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등에 업은 그들은 키쿠유족과 마사이족이 살던 고산지대에 대규모 농장을 건설해 나갔다. 1920~40년대 백인들이 국토의 대부분을 장악해 나가는 사이 자기 땅에서 쫓겨난 케냐인들은 백인들이 운영하는 커피·목화농장 인부가 되거나, 나이로비 등 대도시에서 날품팔이를 하는 신세로 전락해 갔다.

제국주의에 맞선 케냐인들의 투쟁은 1920년대 일찌감치 시작됐지만, 키쿠유족이 주축이 된 이른바 ‘마우마우’ 운동이 본격화한 1952~56년 절정을 맞는다. 무레이티는 “키쿠유어로 ‘가다’라는 뜻의 ‘우마우마’를 백인들이 알아 듣지 못하도록 거꾸로 써 ‘마우마우’라고 부른 것”이라며 “마우마우 전사들은 고산지대 깊숙한 동굴에 은신처를 마련한 뒤 독립투쟁을 벌였고, 집에 남은 여성들은 이들에게 음식물을 날라다 주곤 했다”고 말했다.

마우마우 운동이 불붙기 시작하면서 계엄령을 선포한 영국은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투옥시키는 한편, 식민지 의회에 케냐인들의 의석을 늘리는 양면책을 구사했다. 그러는 사이 백인들은 하나 둘씩 케냐를 떠나기 시작했다. 결국 식민지배는 오래 가지 못했고, 1964년 무제 모모 케냐타를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케냐 독립공화국이 선포됐다.

제국주의는 물러갔지만 식민 잔재는 신생 독립 공화국의 헌법에 고스란히 남겨졌다. 식민지 총독이 대통령으로 이름만 바꿨을 뿐 식민 지배를 위해 만들어진 엄격한 위계질서에 입각한 정치·행정체계는 그대로 남아 민주주의 발전을 옥죄었다. 무레이티는 “80년대 말 민주화 운동이 점차 거세지자 정부는 ‘9명 이상이 모이는 행사는 반드시 지역 책임자의 허락을 받도록 한다’는 내용의 법률을 만들어 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했다”고 말했다.

87년 한국 대선 꼭 닮은 97년 케냐 대선

1978년 케냐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종신대통령’ 행세를 하던 다니엘 모이가 연임 제한 규정에 따라 마지막으로 출마한 1997년 케냐의 대선은 한국의 1987년을 연상시킨다. 모두들 모이의 낙선을 예상했지만, 야권의 분열과 불법·관권선거가 판을 치면서 결과는 모이의 재선으로 이어졌다. 무레이티는 “두번째로 많은 득표를 한 므와이 키바키와 3위를 차지한 케네스 마티바의 득표만 합쳐도 모이의 득표수를 넘어서는 것은 물론 과반이 넘는 지지를 확보했었다”고 말했다.

허무한 패배로 주춤하던 야당세력은 2002년 대선에서 ‘무지개연합’이란 연대체를 결성해 공동전선에 나섰다. 이에 맞서 모이는 초대 대통령 조모 케냐타의 아들인 우후르 케냐타를 대항마로 내세웠다. 결국 1992년과 1997년 두차례 모이에게 패배했던 키바키는 여당 후보를 압도적 표차로 따돌리고 제3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함께 치러진 의회 선거에서도 무지개연합은 과반의석 이상을 확보했다.

오는 11월10일 케냐에선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투표가 실시될 예정이다.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식민지 총독처럼 무소불위였던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대신 총리직을 신설하고, 지방자치를 강화하는 내용이 개정 헌법안의 최종 뼈대가 됐다. 식민 잔재와 독재의 망령은 여전히 건재하지만, 작은 희망의 씨앗이 뿌려진 것으로 봐도 좋겠다.

21일 오후 피스보트는 남위 2도50초, 동경 58도35초를 17.16노트의 속도로 지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2863해리를 달려왔고, 다음 기항지인 세이셸까지는 이제 251해리가 남았다. 갑판에서 느낄 수 있는 바깥 온도는 28℃, 수온은 30℃다. 파도는 0.6~0.9m로 비교적 잔잔할 것으로 예보됐지만, 점심 무렵부터 간간이 빗발이 날리면서 조금씩 높아지는 느낌이다. 바람은 남동풍이 28노트로 여전히 비교적 거세다. 배가 지나고 있는 인도양의 수심은 4080m, 코발트빛이 절정에 이른 바다가 흐린 날씨에도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다.

피스보트/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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