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흉기로 공격한 김기종씨가 6일 오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중앙지법으로 이송되고 있다. 김씨는 전날 검거 과정에서 오른쪽 발목이 부러져 휠체어를 탄 채 이송됐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김기종씨의 성향과 행적 어땠나
검찰과 경찰이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를 흉기로 공격한 김기종 ‘우리마당 독도지킴이’ 대표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수사에 착수하면서, 김씨의 정치 성향과 행적, 활동 방식이 어땠는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경찰은 6일 김씨의 사무실 압수수색에서 이적성이 의심되는 서적을 확보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김씨의 그간 발언과 저서, 논문, 주최했던 토론회를 보면 북한 체제를 찬양하거나 적극 추종하는 듯한 발언은 찾기 어렵다.
1980년대 대학가 주변에서 문화운동을 주도했던 김씨는 2000년대 들어 ‘독도지킴이’ 활동에 적극 나선다. 독도를 남북이 함께 관리하자는 주장을 펴던 김씨는, 2010년 이후 남북 문화 이질화를 막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줄기차게 펴왔다.
김씨는 경찰이 확보했다는 ‘이적표현물’과 관련해 “북한 관련 논문을 썼을 뿐”이라고 했다. 김씨는 1996년 숭실대 통일정책대학원에서 ‘남한 사회 통일문화운동의 과제’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썼다. 경찰이 압수한 도서가 논문 참고도서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수사기관은 또 김씨가 평화협정을 주제로 매달 주최한 ‘평화협정시민토론회’도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이 토론회 강연자로 참석했던 박상철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장도 “김씨는 북한을 바라보거나 하지 않고 독립군처럼 움직였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해 9월 이 토론회에서 ‘만석중은 기다린다, 평화협정을’이라는 주제로 직접 강연을 하기도 했다. 개성지방 인형극인 만석중놀이 복원 운동을 펴온 김씨는 “일제가 단절시킨 만석중놀이를 징검다리로 한 평화협정”을 이야기했다.
1980년대 대학가 문화운동 주도
사무실 습격 사건뒤 과격해져
“운동판 고립, 극단 민족주의 경도” 개성공단 나무심기 같이 간 참석자
“북한과 접촉할 위치 아니었다” 김씨를 아는 학계·문화계 인사들은 민족문화운동에서 출발한 김씨가 변화하는 운동방식을 따라가지 못했고, 독불장군식 성격으로 다른 이들과 불화하다 운동판에서 고립된 뒤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으로 기운 것 같다고 했다. 최근 김씨의 언행을 보면, 한-미 연합군사훈련과 평화협정 문제에 북한과 비슷한 주장을 해왔다. 하지만 북한 체제나 권력 세습 문제에 대해 동조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1985년 우리마당에서 반년간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강연을 했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김씨는 20대부터 풍물, 탈춤 등 민족문화 예술운동을 했다. 그런데 1988년 우리마당 습격 사건을 당한 뒤로 많이 과격해진 것 같다. 이후 운동권 집회에 와서 ‘힘들다. 돈을 달라’는 얘길 해 사람들과 갈등을 빚었다”고 했다. 유 교수는 “반일은 확실한데 갑자기 반미로 가게 된 이유는 모르겠다. 개인적인 돌출행동으로 보면 정확할 것 같다”고 했다. 우리마당에서 문화운동을 접한 직장인 이아무개(45)씨는 “김씨는 과거 북한에 경도된 후배들에게 충고를 하기도 했다. 분단체제를 극복하려는 문화운동가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씨가 2000년대 초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우리마당을 거쳐간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외면당한 것 같다. 이후 급속도로 민족주의에 경도됐고, 이번 피습 사건까지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를 잘 아는 한 인사도 “과거에는 폭력성, 반미 성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최근에는 관련 운동을 거의 혼자 한 듯하다”고 전했다. 한 사회운동계 인사는 “김씨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 집회에 오면 튀는 행동을 해 사람들과 갈등이 많았다”고 했다. 김씨는 1999년 개인 자격으로 금강산 관광차 처음으로 방북했고, 2006년 1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6회에 걸쳐 개성공단을 방문해 식목행사에 참여했다. 나무심기 행사에 김씨와 함께 다녀온 민족화합운동연합(민화련)의 김동수씨는 “당시 김씨는 북한 사람들을 접촉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했다. 오승훈 최우리 박태우 기자 vino@hani.co.kr
사무실 습격 사건뒤 과격해져
“운동판 고립, 극단 민족주의 경도” 개성공단 나무심기 같이 간 참석자
“북한과 접촉할 위치 아니었다” 김씨를 아는 학계·문화계 인사들은 민족문화운동에서 출발한 김씨가 변화하는 운동방식을 따라가지 못했고, 독불장군식 성격으로 다른 이들과 불화하다 운동판에서 고립된 뒤 극단적 민족주의 성향으로 기운 것 같다고 했다. 최근 김씨의 언행을 보면, 한-미 연합군사훈련과 평화협정 문제에 북한과 비슷한 주장을 해왔다. 하지만 북한 체제나 권력 세습 문제에 대해 동조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1985년 우리마당에서 반년간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강연을 했던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김씨는 20대부터 풍물, 탈춤 등 민족문화 예술운동을 했다. 그런데 1988년 우리마당 습격 사건을 당한 뒤로 많이 과격해진 것 같다. 이후 운동권 집회에 와서 ‘힘들다. 돈을 달라’는 얘길 해 사람들과 갈등을 빚었다”고 했다. 유 교수는 “반일은 확실한데 갑자기 반미로 가게 된 이유는 모르겠다. 개인적인 돌출행동으로 보면 정확할 것 같다”고 했다. 우리마당에서 문화운동을 접한 직장인 이아무개(45)씨는 “김씨는 과거 북한에 경도된 후배들에게 충고를 하기도 했다. 분단체제를 극복하려는 문화운동가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씨가 2000년대 초부터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서 우리마당을 거쳐간 이들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외면당한 것 같다. 이후 급속도로 민족주의에 경도됐고, 이번 피습 사건까지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를 잘 아는 한 인사도 “과거에는 폭력성, 반미 성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최근에는 관련 운동을 거의 혼자 한 듯하다”고 전했다. 한 사회운동계 인사는 “김씨가 정신적으로 건강하지 못하다. 집회에 오면 튀는 행동을 해 사람들과 갈등이 많았다”고 했다. 김씨는 1999년 개인 자격으로 금강산 관광차 처음으로 방북했고, 2006년 11월부터 2007년 4월까지 6회에 걸쳐 개성공단을 방문해 식목행사에 참여했다. 나무심기 행사에 김씨와 함께 다녀온 민족화합운동연합(민화련)의 김동수씨는 “당시 김씨는 북한 사람들을 접촉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했다. 오승훈 최우리 박태우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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