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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길을 찾아서] 재야 활동가·명망 있는 지도자 결집해 민주화운동 에너지 폭발

등록 2015-03-15 19:09수정 2023-09-06 17:33

[길을 찾아서]
민통련이 걸어온 30년 ① 이부영 초대 사무처장의 회고
연재 회고록 ‘길을 찾아서’의 18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다. 민통련은 1985년 3월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민중의 힘으로!’라는 깃발을 내걸고 엄혹한 군부독재에 맞서 일어섰다. 올해 30돌을 맞았다. 민통련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대표적인 단체로서 87년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끈 주역이었다. 하지만 대통령 직선제 쟁취에도 불구하고 대선 패배로 후유증은 컸다. 민통련이 걸어온 길을 기고와 좌담회로 3회에 걸쳐 되돌아본다. 30주년 기념행사는 27일 서울시청에서 열린다.

85년 반군사독재 정치투쟁 위해

민민협과 국민회의 통합해 출범

신군부에 맞서 ‘2·12 총선’ 승리

야당과 ‘직선제 개헌 투쟁’ 전개

5·3인천항쟁 배후혐의로 검거돼

영등포교도소서 수감생활 중에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사실 듣고

비밀서신 통해 세상에 진상 폭로

그는 70~80년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모두 12차례 구류·구속의 고초를 겪었다.
그는 70~80년대 민주화투쟁 과정에서 모두 12차례 구류·구속의 고초를 겪었다.

1980년대는 5월 광주학살의 참극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학살의 테러도, 고문도, 징역도 우리를 주눅 들게 하지는 못했다. 많은 젊은이들이 학교에서 쫓겨나 노동 현장으로, 농민의 삶 속으로, 도시빈민의 골목 속으로 찾아가 민초들과 함께 고생했다. 학교 교단과 언론사에서 쫓겨난 지식인들과 문화예술인들은 글과 말로 또는 그림, 노래와 춤으로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작업에 나섰다. 종교인들도 시대의 아픔에 함께하려고 고난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83년 9월 고난의 선봉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이 감당했고 그 논의의 연장선에서 1984년 6월에 출범한 연대단체가 민중민주운동협의회(민민협)였다. 활동가 중심으로 구성된 민민협에는 김승훈 신부, 김동완 목사와 필자가 공동대표로 참여했지만 유신독재와 광주학살에 항의하고 투쟁했던 명망 있는 인사들은 들어와 있지 않았다. 보완이 필요했다. 신군부가 본격적인 탄압을 해온다면 명망 있는 지도자들이 활동가들과 결합해 민주화운동을 벌여 나가야 이겨낼 수 있고, 운동도 폭발적으로 확산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85년을 기점으로 다시 전개될 것이 예상되는 반군사독재 정치투쟁에 대응하려면 재야 민주화운동의 전체 역량을 아우르는 운동체의 출범이 꼭 필요하다는 논의가 구체화됐다. 민민협과 이어서 출범한 민주통일국민회의라는 두 조직이 통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이 출범하게 되었다. 첫 진용은 문익환 의장, 계훈제·백기완 부의장, 이창복 상임위원장, 이부영 사무처장, 장기표 정책실장, 김종철 대변인, 박계동 홍보국장이었다. 김대중-김영삼씨 등 선명 노선의 야권 정치세력들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발족시켜 85년 ‘2·12 총선’을 계기로 전두환 군사독재에 쐐기를 박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처럼 재야 민주화운동 진영은 민통련으로, 제도야권의 양김 진영은 선명 야당 신한민주당(신민당·훗날 통일민주당)으로 진용을 정비했다.

마침내 ‘2·12 총선’은 재야와 선명 야당이 신군부에 맞서 거둔 제1차 승리로 끝났다. 곧이어 민통련과 통일민주당(신민당에 이어서 출현)은 함께 직선제 개헌 투쟁을 전개할 태세였다. 그러나 총선에서 재야+선명야당의 연합에 패배한 전두환 정권은 학생운동과 재야 민주세력에 무자비한 탄압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많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분신·투신으로 희생되는 사태를 정권은 폭력진압과 용공조작으로 대응했다. 특히 정권은 민통련의 발족 과정에 민청련과 개신교 진영이 합류하지 않은 틈을 비집고 85년 9월 민청련의 김근태·이을호를 남영동 대공수사단으로 끌고 가 야만적인 고문을 자행했다. 하지만 김근태 의장에 대한 고문은 세계적 경악과 비난을 야기했고 한국 민주화운동의 대의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86년 ‘5·3 인천민주항쟁’을 계기로 전두환 정권은 남녘에서 올라오는 직선제 개헌 열풍을 용공조작으로 막으려는 계략을 드러냈다. 직선제 개헌 투쟁에서 일탈한 5·3항쟁의 급진적 노동해방 노선을 이용해 민통련을 희생의 제물로 만들었다. 정권은 국민들의 신뢰 속에 전국적으로 투쟁전선을 넓혀가는 민통련을 차단하기 위해 반국가단체로 몰아 조직 간부들을 투옥하고 수배했다. 86년 10월 말 건국대에 모인 26개 대학의 학생들 1525명을 연행하고 이 가운데 1289명을 구속기소하는, 건국 이래 최대의 구속사태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런 광란의 탄압 속에서도 직선제 개헌 열풍은 87년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축소-조작 사건의 폭로를 계기로 다시 불붙었다. 군부독재의 탄압으로 말살된 줄 알았던 민통련이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로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내 그 열풍의 지휘본부가 됐다. 6월 민주항쟁의 장엄한 대서사극이 이렇게 민통련의 지난한 투쟁을 통해 전개되었다.

1985년 재야와 정치권을 아우르는 범민주연대기구로 출범한 민통련은 87년 6월항쟁을 주도해 시민혁명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사진은 87년 6월13일 서울 명동성당을 출발하고 있는 ‘호헌철폐 시위’ 행렬이다. 사진 박용수 작가 제공
1985년 재야와 정치권을 아우르는 범민주연대기구로 출범한 민통련은 87년 6월항쟁을 주도해 시민혁명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사진은 87년 6월13일 서울 명동성당을 출발하고 있는 ‘호헌철폐 시위’ 행렬이다. 사진 박용수 작가 제공

나는 5·3 인천항쟁을 배후조종했다는 혐의로 수배당했다가 86년 10월 검거되어 영등포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나를 숨겨주었다는 이유로 고령의 이돈명 변호사가 국가보안법의 범인은닉죄를 뒤집어쓴 채 구속된 탓으로 고통스러운 심경이 더했다. 87년 1월17일 자정쯤 필자가 갇혀 있던 영등포교도소 격리사동에 서울대생 박종철군을 고문해 죽인 남영동 대공수사단 소속 조한경·강진규 두 경찰관이 수감되었다. 기독교 신자인 조 경위는 밤새도록 찬송가를 불렀으며 젊은 강 경사는 밤늦도록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하고 70년대부터 친분을 쌓았던 안유 보안계장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안 계장은 깊은 한숨을 쉬면서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지난 며칠 사이에 두 경찰관을 남영동 대공수사단장 박처원 치안감과 간부 몇 사람이 여러차례 특별면회했는데, 두 경찰관이 모든 혐의를 지고 가라는 요구에 강하게 항의하더군요”라고 말했다. 두 경찰관의 항의와 상관들의 회유·협박의 내용은 대강 이랬다. ‘두 사람 말고 주요 고문 담당자 세 명이 더 있다는 것, 조·강 두 사람이 심문실 안에 함께 있었지만 주심문관이 아니었다는 것, 두 사람이 이대로 혐의를 인정하고 재판을 받으면 각각 1억원씩 입금된 통장으로 가족들과 본인들의 생계를 보장해주겠다는 것’ 등등. 이에 대해 두 사람이 자기들만 고문 살인자의 오명을 지고 처벌받을 수 없으며 자식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없다고 항의하자 박처원 단장과 간부들은 “빨갱이 하나 죽인 것 가지고 무얼 그렇게 고민하나”라고 회유하면서 조직의 결정을 배신하게 되면 징역을 다 살고 나오더라도 이 나라에서 살아가기 힘들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들의 면담은 그렇게 결렬됐다는 것이었다. 담당 신창언 부장검사와 안상수 검사도 교도소 안에서 있었던 검찰 신문에서 두 경찰관을 회유했다고 했다. 이어서 김성기 법무장관이 야간에 영등포교도소를 불시 방문해 철저한 보안을 당부했고 곧 두 경찰관은 의정부교도소로 이감됐다. 안 계장과 나는 서로 얘기를 나눈 적이 없는 것으로 입을 맞췄다. 나는 “이 살인마들과는 무슨 일이 있어도 결판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곧이어 나는 70년대부터 가까이 지낸 교도관 한재동을 불러 대강의 사태를 전하고 심각성을 인식시켰다. 감옥 밖으로 날리는 비둘기(비밀 서신)가 작성됐다. 여러 위험한 고비를 넘겨 재야의 일을 돕고 있던 내 친구 김정남에게 전달됐다. 서신 내용은 김정남이 정리해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함세웅 신부에게 전달됐고 명동성당 5·18광주항쟁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가 사제단 성명을 발표했다. 이렇게 박종철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사태로 전 국민의 분노가 폭발해 국본이 결성되면서 6월 민주항쟁-직선제 개헌 투쟁으로 발전했다. 전두환 정권이 무너질 듯했다.

6월 민주항쟁 승리 이끌어냈지만

87년 대선 패배 과정서 야권분열

88년 총선으로 지역분할 생겨나

한국사회의 질적 변혁 기회 놓쳐

1985년 5월10일 민통련은 서울 장충동 분도회관에 사무실을 열고 활동을 시작했다. 사진은 현판식에서 나란히 선 문익환 의장과 계훈제 고문. 사진 박용수 작가 제공
1985년 5월10일 민통련은 서울 장충동 분도회관에 사무실을 열고 활동을 시작했다. 사진은 현판식에서 나란히 선 문익환 의장과 계훈제 고문. 사진 박용수 작가 제공

노태우의 6·29 선언이 발표되던 날, 나는 경북 김천교도소로 옮겨갔다. 6월 민주항쟁 승리 덕분에 7월 중순께 대폭적인 정치범 석방조처가 있었다. 하지만 정권은 장기표, 김근태 그리고 나처럼 같이 재야의 조직들에 영향력이 있다고 보이는 사람들은 내보내지 않았다. 정권은 직선제 개헌에 관해서만 양김 세력과 협상을 하되,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제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던 5공의 권력구조를 5년 단임의 직선제 대통령으로 바꾼 것 말고는 독재헌법의 흔적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는 ‘87년 체제’에 전두환 집단과 양김 세력은 합의했다. 또한 그들은 지역구도를 획정하는 국회의원 소선거구제에도 합의했다. 그리고 양김 세력은 분열로 치달았다. 재야 민주화세력도 덩달아 분열했다. 그해 연말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의 승리로 끝났다. 그 분열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빚어지는 과정을 몇 개월 동안 지켜본 김천교도소의 청년 활동가들은 미친 듯이 분노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주먹으로 시멘트벽을 쳐서 손등의 살 껍질이 벗겨지기도 했다. 광주학살을 저지르고 온갖 악행을 범한 전두환 정권이 민주정부를 탄생시킬 대통령 선거를 관리하는 과도정부 노릇을 하도록 내버려두는 처사를 감옥 안에 갇혀 있던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87년 대선과 88년의 총선은 다음과 같은 중대한 역사적 결과를 가져왔다. 첫째, 그동안 위태롭지만 하나의 대오를 이뤄 투쟁해왔던 민주화운동 진영이 영-호남, 김영삼-김대중 세력으로 분열했다. 그리하여 급진세력을 제어할 힘을 잃었다. 둘째,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부와 기득권 세력의 주요 보루인 부산·경남에서 민주개혁세력이 대선과 총선을 통해 주도권을 획득할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셋째, 70·80년대 동안 제도야권에서 주도권을 장악해왔던 김영삼이 영남에서마저 기반이 흔들리자 여당인 민정당과의 합당을 모색하게 되었다. 넷째, 군부 기득권세력이 다시 쿠데타로 집권할 가능성은 사라졌지만 냉전의식의 토양이 될 정치지형이 유지되었다. 다섯째, 기득권 세력에 유리한 지역분열구도가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나는 88년 2월 노태우의 대통령 취임 특별사면으로 다시 풀려났다. 그때 국민들이 그랬듯이 나는 노태우에게 대통령 자리를 넘겨준 김대중-김영삼의 적전 분열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다. 이 적전 분열을 해방 후 반민특위(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를 해산시킨 이승만의 결정에 비유한 김상현의 견해는 탁월했다. 한국 사회의 질적 변혁 기회를 상실케 한 점에서는 같다고 본 것이다. 87년 대선에서 김대중-김영삼-재야의 연합민주세력이 집권했다면, 해방 후 그리고 4월혁명 이후 이루지 못하고 유예됐던 민주주의 개혁과 남북관계 개선이 상당한 정도로 진전되었을 것이다. 87년 야권의 대선 패배와 88년 총선 지역분할을 두고 학계·언론계·지식인 사회에서 엄정한 비판과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던 것 또한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대선 이후에도 전혀 반성 없이 정계의 강자로 군림하던 양김 세력에 위압당했거나 그들도 분열의 당사자들이어서 함께 침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 있다. 60년 4월혁명 이후 처음으로 시민들이 중심이 된 87년 6월 민주항쟁을 민통련이 주도했다는 사실이다. 항쟁의 마무리를 주역이 아닌 자들에게 내맡긴 역사적 책임도 민통련이 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것이 민통련 30돌에 동지들이 가슴에 새길 교훈이다. 항쟁을 벌이는 과정에 헌신한 청년학생과 민주시민들에게 다시 한번 머리 숙여 추모와 존경의 마음을 바친다.

이부영 전 국회의원·민통련 초대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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