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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절망 속 희망을 찾는 ‘장발장’의 벨소리

등록 2015-03-25 15:31

지난 3월19일 저녁 서울 중구 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장발장은행 대출심사위원들이 대출 신청 서류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진수 기자
지난 3월19일 저녁 서울 중구 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장발장은행 대출심사위원들이 대출 신청 서류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진수 기자
[한겨레21]노역장 유치에 몰리는 사람에게
벌금 낼 돈 빌려주는 ‘장발장은행’ 설립 한 달
5시간 동안 118명 장발장들의 애타는 목소리
전화를 받았다. 종일 혼자 내내.

“장발장은행입니다.”

“거기 장발장은행이죠? 벌금을 좀 빌려주신다고 해서 전화를 했는데….”

“네, 어머니 말씀하세요.”

“아들이 한 학기만 다니면 졸업인데요… ○○대 전기공학관데… 내가 벌금을 50만원 받아서….”

“장발장은행 대출 신청하고 싶으신 거죠?”

“(울음) 새벽부터 밤까지 일해서 버는데… 아들이 어저께 휴학 신청하려고 했는데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인터넷 홈페이지가 있어요, 어머니. 장발장은행이라고 검색하시면 나오고요. 거기 들어가셔서….”

“(울음) 너무 어려워서….”

”컴퓨터 하실 줄 아세요?”

“난 그런 거 못하는데…. (울음) 너무 어려워서, 사정이, 어떻게 좀….”

“그럼 아드님 들어오면 대신 해달라고 하시면 될 거예요.”

“아, 아, 아들이 내가 벌금 받은 거 알면 좀…. 어떻게 대신 좀 안 될까요?”

“(…) 어머니 그러면 가까운 동사무소에 가셔서 젊은 직원한테 사정 설명하고 부탁하면 잘 도와줄 것 같은데요.”

“얼마 전에도 벌금이 나와서… 어려웠는데….”

“대출 신청서 잘 쓰시고, 필요한 서류들 갖춰서 보내주시면 잘될 거예요, 어머니.”

전화를 끊었다.

2~3분마다 울리는 전화벨

3월18일 서울 중구 인권연대 사무실은 콜센터나 진배없었다. 하루 평균 수백 통의 ‘장발장’이 이곳을 호출한다. 이날 5시간 동안 기자가 직접 받은 전화는 118통. 2~3분마다 전화벨은 안타까운 목소리로 희망을 호명하고 있었다.

지난 3월19일 저녁 서울 중구 인권연대 사무실에서 장발장은행 대출심사위원들이 대출 신청 서류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있다. 김진수 기자

“공장 운영하다 부도가 났어요. 직원 임금을 못 줘서 벌금을 받았는데, 돈이 지금 하나도 없어요. 지금 내 이름으로 부동산이 있는데, 그래도 대출이 될까 싶어 전화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신청을 했는데요. 결과가 어떻게 됐나요? 대출받을 수 있나요?”

“기초생활수급 증명서가 있는데, 보내도 되나요? 장애인인데 장애인증명서도….”

“벌금을 못 내서 지명수배 중인데요. 판결문을 떼러 가면 법원에서 바로 구속된다고 하던데요.”

“집에 강제집행 명령서인가 이런 게 계속 날아오는데 어떻게 하면 되나요?”

“수원지검에서 전화가 와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지, 참. 재산증명서니 뭐니 가져오라고 하대요. 신용불량자인데 거기서 대출받을 수 있습니까?”

“저도 몸이 아프고 애아빠도 그렇고. 돈 50만원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데. 매달 5만원씩 내서 갚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안 되나요? 좀 도와주세요.”

“친구가 벌금을 안 내서 구속돼 있는데요.”

서울에서 제주까지, 노인부터 청년까지, 벌금을 내지 못해 쫓기듯 발을 구르는 사람들의 전화가 머리카락만큼 숱했다. 인권연대에서 장발장은행 업무를 시작한 건 2월26일. 오는 25일이면 설립 한달이다. 02-2273-9004, 열자리 숫자를 누르면 희망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하루 수백 명이다. 신문 기사나 텔레비전 뉴스에 은행이 소개된 다음날에는 ‘희망을 호명하는’ 이들이 갑절로 늘어나 사무실의 다른 업무는 손도 못 댈 정도가 된다. 이날까지 연신 전화를 받아온 인권연대 김보미 간사는 두툼한 목도리를 두르고도 맷돌 돌리는 목소리가 돼버렸다. 곁에서 오창익 사무국장이 기자에게 일러준다. “전화 통화는 1분에서 1분30초 안에 끝내야 돼요. 안 그러면 계속 통화 중이 걸려서 기다리는 사람이 더 많아져요.” 그러나 수화기 너머 ‘벌금 미납자 겸 지명수배자’들은 더 많이 묻고 더 많이 들어 더 많은 확신을 갖고 싶어 했다.

“신청하면 연락이 오나요? 대출되면….”

“음주 벌금도 됩니까? 신청 자격이 뭐뭐가 있어요?”

“이름이 서○○인데, 대출 승인 안 된 거예요? 거기선 이제 안 되는 거예요?”

“인터넷 어디로 들어가면 되죠? 집에 컴퓨터가 없는데 선생님이 대신 좀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어떤 심사 기준이 있나 궁금해서 전화했어요. (한숨)”

“대출 신청 서류 어디로 보내면 되나요?”

“○○구 사회복지사인데요. 신청서 작성이나 이런 걸 묻는 전화가 와서요. 어떻게 알아보면 될까요?”

“약식명령서가 없는데 어쩌죠?”

생겨서는 안 됐던 은행

오후 5시가 넘어서야 전화받는 일을 잠시 멈출 수 있었다. “휴….” 절로 한숨이 나왔다. 옆에 앉은 인권연대 간사들이 기자에게 한마디씩 거든다. “오늘은 전화가 엄청 적은 거예요.” 장발장은행의 일과는 전화기를 드는 것에서 시작해 전화기를 내려놓는 일로 마감된다. 간사들이 한마디 더 보태준다. “기자님, 아침보다 엄청 피곤해 보이시네요.”

장발장은행은 벌금을 내지 못해 노역장에 유치되는 사람이 1년에 4만3199명(2009년 기준)이나 된다는 문제의식에서 싹텄다. 형법 제69조는 벌금·과료와 노역장 유치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판결이 확정되면 30일 안에 납입해야 하고, 그러지 않으면 하루에서 3년까지 노역장에 유치된다. 1953년 형법 제정 때 명시된 이 규정은 이후 62년 동안 토씨 하나 바뀌지 않았다. 제70조에는 벌금·과료를 선고하면서 미납 때 유치 기간을 정하도록 했다. 이 규정은 지난해 5월 개정됐다. 선고하는 벌금이 1억원에서 5억원 미만이면 300일 이상, 5억원 이상 50억원 미만이면 500일 이상, 50억원 이상이면 1천 일 이상 유치 기간을 정하도록 했다. 하루치 일당을 5억원으로 계산한 ‘황제 노역’ 사건이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결과다.

장발장은행은 사실 생겨서는 안 되는 은행이었다. 2011년 정부는 형법 개정안을 국회에 발의했다. 일수벌금제 도입과 벌금형에 대한 집행유예 신설안이 담겼다. 그러나 18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하면서 자동 폐기됐다. 일수벌금제는 지금의 일률적인 총액벌금제와 달리 벌금에 대해 노역장 유치 기간을 계산할 때 각자의 재산·소득 따위를 따지도록 하는 것이다. 대기업 회장에게는 100억원의 벌금이 대수롭지 않을 수 있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몇십만원 벌금도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학생 김불이(27)씨는 지난해 4월 알 수 없는 이유로 발가락 하나가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가족과 외따로 산 지 5년, 보험 따위는 애초에 있지도 않았다. 고시원 단칸방에서 부대끼던 그는 엄청난 이자가 무서웠지만 저축은행을 찾아 돈을 빌렸다. 한 달 동안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호전되지 않았다. 두 달이 지나자 발가락 한 마디가 ‘자연스럽게’ 떨어져나갔다. 그래서 전다. 걸음걸이가 이상해졌다. 그러니 아르바이트 구할 때도 번번이 퇴짜였다. 고시원 방세가 두 달 밀렸다. 어느 날 술 취해 잠든 사람의 돈 2만원을 몰래 훔쳤다가 잡히고 말았다. 벌금 90만원을 맞았다. “처음에 제가 좀 발뺌을 했어요. 그러다 계속 추궁을 받아서 결국 사실대로 말했는데, 그게 좀 괘씸하게 생각됐나봐요.” 방세도 없는데 벌금 낼 돈이 있을 리 만무.

옥죄어 오는 벌금 90만원

한달 두달 지나니 어느 날 휴대전화로 문자메시지가 왔다. ‘지명수배 중, 즉시 납부 바랍니다.’ 이틀 간격으로 문자메시지가 김씨를 떠밀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강도가 세졌다. ‘재산압류, 강제집행 예정.’ 해를 넘겼다. 한 학기 남은 대학은 휴학할 수밖에 없었다. “일을 어렵게 구해서 밖에 나갔는데, 출퇴근하면서 세상이 불안해 보이더라고요. 경찰들이 지나가면 불심검문을 당할까 불안하고요.” 벌금 납부를 연기하거나 나눠 낼 수 있는 제도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도 허사였다. “기초생활수급자거나 부양가족이 있거나 또는 부득이한 사정이 있다고 검사가 인정한 사람이 대상인데요. 정작 저한테는 어려움을 증명할 서류가 없는 거예요. 검찰 사람들이 저 사는 걸 와서 보면 금방 알 텐데 오로지 서류만 가지고 판단하니까 저 같은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은 제외돼버려요.”

김씨는 어떻게든 벌금 문제를 해결하려고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뒤지다 장발장은행 소식을 알게 됐다. 신청한 지 열흘쯤 지난 3월12일 90만원을 대출받게 된 김씨는 곧바로 벌금을 완납했다. 지금은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한 달에 80만원을 번다. 김씨는 이제 “희망을 바라보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장발장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을 다음달부터 30만원씩 모아 석 달 동안 갚을 참이다. “장발장은행 구조가 후원금을 받아서 대출해주는 거잖아요. 대출받은 사람이 이른 시일 안에 상환을 해줘야 다른 사람이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서둘러야죠.”

문 연 지 한 달이 채 안 된 장발장은행은 대출하기 위해 대출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 3월19일까지 들어온 시민 400여 명의 후원금은 8천만원을 갓 넘는다. 지금까지 세 차례 심사를 거쳐 대출한 돈은 6200여만원이다. 3월20일 4차 대출 심사가 이뤄져 대출금이 후원금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최근 오창익 국장은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운영하는 명례방협동조합 문을 두드렸다. 창업 등에 무담보 대출을 해주는 곳이어서 찾아간 것이다. “한 5천만원쯤 대출받아야 할 것 같은데 다음달 조합 이사회에서 결정된다네요. 괜찮아요, 후원금이 계속 들어오겠죠.” 오 국장의 얼굴이 마냥 밝지는 않았다. 일시적이지만 ‘돌려막기’를 해야 할 처지니까.

빅토르 위고는 장발장이 등장하는 소설 <레미제라블>을 1862년 출간했다. 그는 1851년 혁명을 뒤엎는 루이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프랑스에서 쫓겨났다. 위고가 다시 고국으로 귀환하는 데는 19년이 걸렸다. 소설 속 장발장 또한 빵 한 조각 절도에 대한 대가로 19년을 감옥에 갇혔다. 위고는 1849년 국회의원이 된 뒤 입헌의회의 한 연설에서 이렇게 소리쳤다. “나병(한센병)이 육체적 질병이듯 빈곤은 사회적 질병입니다. 궁핍한 변두리에서는 사람들이 겨울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 땅속으로 숨어듭니다. 이보다 더 가혹한 상황을 원하십니까?”

‘사회적 오지’로 내모는 것이 온당한가

장발장은행은 벌금을 내지 않았다는 이유로 몸이 갇히거나 수배를 당해야 하는 한 해 4만 명의 사람들, 이들의 가난을 형벌로 대하고 ‘사회적 오지’로 걷어차는 사회가 과연 온당한지를 묻고 있다. 전화기 너머로 토로하는 ‘장발장’의 목소리가 취재수첩에 적혀 있다. “제가 30년 전에 전과 24범이었어요. 그동안 나쁜 짓을 안 해서 취직하고 살 수 있었어요. 내 나이 육십인데, 몸이 안 좋지만 회사 급여 통장에서 매달 상환할게요. 검찰청 가면 바로 구속됩니다. 열심히 일할 테니까 편의를 좀 봐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어째 좀 안 돼요?”

후원문의 02-749-9004, 장발장은행 계좌 388-910009-23604(하나은행), 대출문의 02-2273-9004.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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