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사건에 연루돼 총살된 제주도의 대표적 사회주의 정치인 이신호(1901~48)의 유일한 사진 한 장.
[토요판] 커버스토리 / ‘4·3 불량위패’ 공격받는 이신호
4·3 특별법에 대한 반격, 재심사 논란
그 주인공인 남로당 핵심 간부 이신호
4·3 특별법에 대한 반격, 재심사 논란
그 주인공인 남로당 핵심 간부 이신호
제주4·3사건에 연루돼 총살된 제주도의 대표적 사회주의 정치인 이신호(1901~48)의 유일한 사진 한 장이다. 가족들은 잊혀지길 원하는 그의 이름을 낯선 사람들이 불러 깨운다. 그는 제주도의 남로당 간부, 정부가 지정한 4·3 희생자다. 군인과 경찰로 추정되는 총탄에 스러진 48년 그의 삶을 어떤 이들은 ‘4·3사건 불량 위패’라며 정의한다. 보수단체는 희생자 1만4231명 가운데 일부가 가해자에서 희생자로 둔갑됐기 때문에 재심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올해 초 정종섭 행정자치부 장관, 원희룡 제주도지사가 희생자 재심사 여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논란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불량 위패’로 불리는 희생자 103명 가운데 한 사람을 들여다봤다. 시대와 역사라는 큰 자락에서 이신호를 뽑아내 발자취를 따라갔다. 제주도라는 공간적 배경과 한반도 정세, 세계사적 맥락을 짚었다.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을 하던 이신호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꿈꿨지만 좌절했다. 그는 미군정 시기인 1947년 3월1일 기념행사를 지휘한 혐의로 투옥된다. 남로당의 세대교체 과정에서 급진적 무장투쟁 계열에 의해 밀려났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인식·평가함과 동시에 과거로 걸어들어가 그 속에 놓인 사건을 인식·평가하는 것도 균형적인 역사감각일 것이다.
▶ 제주도 남서쪽 끝에는 모슬포 항구가 있다. 특산품인 방어와 인근 마라도 관광으로 유명한 지역이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다. 해방 직후 미군정 시기인 1947~48년 그곳엔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이 살았다. 4·3의 주요 인물들이다. 무장투쟁을 지휘한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본명 이승진), 사회주의자였지만 무장투쟁에 부정적인 남로당 간부 이신호, ‘빨갱이’들을 잡아 죽이기를 주저했던 모슬포지서장 문형순. 이신호를 중심으로 이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다짜고짜 총살된 그, 사회주의자였기에 피해자가 아니라니…
1948년 11월20일(음력 10월20일) 제주도 모슬포지서는 아침 일찍부터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제주도당 부위원장 이신호(1901~48)를 잡아갔다. 제주 4·3사건이 발생하고 집에서 책만 읽고 지내던 이신호의 집에는 경찰관들이 자주 찾아왔다. 미군이 찾아와 동태 파악도 하고 가택 수색도 해서 이신호가 집에서 보던 책들도 압수당한 뒤였다. 여느 날처럼 경찰을 따라 지서에 갔던 이신호는 오후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집 대문을 지나 도로 하나를 지나면 닿을 만큼 모슬포 지서는 가까웠다. 그날 피곤한 얼굴로 돌아온 이신호는 집 난간에 털썩 기대앉았다. “목이 마르다. 물을 다오.” 이신호는 큰딸을 불렀다. 곧이어 군인과 경찰로 추정되는 두 사람이 이신호를 따라 들어왔다. 둘은 이신호를 마당으로 끌어내 총을 쏘았다. 딸은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어가는 과정을 볼 수밖에 없었다. 마흔여덟 이신호의 생은 이렇게 정리되었다.
일제 때 항일운동을 하고, 마을 유지였던 이신호가 죽었다는 소식이 동네에 파다하게 퍼졌다. 동네 사람들은 마음 놓고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때부터 툭하면 총살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누가 죽고, 또 누가 총살당했다. 이신호가 사망한 뒤 나흘 만에 이씨의 사촌동생도 총살당했다. 가족들은 장례를 치를 수 없었다. 숨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시신을 가매장하듯 묻었다. 열두살 어린 아내 송씨는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구멍가게를 시작했고 자식들은 두려움 속에 몇년을 지냈다. 1961년 겨울, 아내 송씨는 이신호가 죽은 나이인 48살에 숨졌다. 이신호의 장례는 아내 송씨가 숨지고 나서 제대로 치러졌다. 이름 석자, 난 날, 죽은 날. 비석은 짧게 쓰였다. 딸 셋, 아들 한명. 남겨진 자식들은 하나둘 고향을 떠나갔다.(제주 4·3연구소 기관지 <4·3 장정> 6호 참조, 1993년 6월 발행)
이신호가 묻힌 자리는 서귀포시 대정읍 하모리 대정여자고등학교 동쪽이다. 제주도 남서쪽 끝에 있는 모슬포 항구에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소나무숲. 노른곶이라 불리는 송림에 그가 묻혔다. <한겨레>는 이신호의 자녀 4명 가운데 3명을 접촉했다. “(기자와의 만남 또는 아버지에 대한 기사를) 원하지 않는다.” “(아버지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다.” 이른 봄, 대정여고 주위에는 수선화가 피어나 쓸쓸한 소나무숲을 달랜다.
‘불량 위패’로 불리는 103명
가까운 사람들에게 잊혀진 그의 이름은 낯선 사람들에 의해 불린다. 4·3 희생자 불량 위패라는 이름이다. 국무총리실 산하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이하 제주4·3위원회)는 2002~14년 희생자 1만4231명을 지정하고, 제주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 내 봉안실에 1만4091명의 위패를 모셨다. 불량 위패는 제주 4·3사건의 희생자가 아닌 자가 희생자로 둔갑됐다는 뜻이다.
대한민국 정체성 회복 국민협의회 등 16개 단체로 구성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국민모임’은 지난 2월11일 서울 언론회관 20층 국제회의실에서 제주 4·3평화공원 불량 위패 척결 세미나를 열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했습니다. 4·3사건 현장에서 직접 보고 체험했던 우리들마저 눈을 감으면 역사의 진실이 왜곡되어 또 다른 문제와 갈등을 낳을 것이며 고스란히 우리 후손들에게 폐해가 돌아갈 것이 분명하기에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세미나 자료집 발췌) 이들은 이날 세미나에서 불량 위패 103기 명단을 공개했다.
지난해 정부는 4월3일을 국가추념일로 지정했다. 그러나 불량 위패와 희생자 재심사 논란은 정부의 제주 4·3 진상조사 보고서가 채택된 2003년 이후 끊이지 않고 있다. 주무부처인 행정자치부의 정종섭 장관이 지난 1월15일 “희생자로 지정된 일부 인사가 무장대 수괴급이라는 논란이 해소되지 않고서는 대통령 위패 참배가 어렵다. 이런 주장이 사실이면 희생자 지정 취소가 타당하다”고 밝히면서 논란은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제주 4·3심사소위원회는 지난 4일 재심사 여부에 대해 논의했으나 결론 없이 끝났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특별법)에는 유족 신청에 의한 재심사 규정이 있을 뿐, 제3자에 의한 재심사 규정이 없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국민모임이 공개한 불량 위패 103명은 대다수가 남로당 간부로 인민유격대원, 경찰·검찰 프락치, 입산 무장대원, 입산 경찰, 3·1 파업 경찰관, 9연대 탈영병, 인민군에 지원한 교사 등이 포함됐다. 이 기준은 헌법재판소가 판시한 희생자 제외 대상자와 유사한 맥락이다. 헌재는 2001년 9월27일 이철승 자유민주민족회의 대표와 예비역 장성 모임인 성우회 정승화 회장 등 346명이 낸 4·3특별법 위헌 심판에서 각하 결정을 내렸다. 다만 희생자 제외 대상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제주4·3사건과 관련한 사망자 가운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이에 부수되는 시장경제질서 및 사유재산제도를 반대한 자 정도를 살펴 희생자 결정 대상에서 제외해 나가는 방법을 채택하는 것이 우리 헌법의 이념과 4·3특별법의 입법목적에 부합할 것이다. (중략) 제주 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등은 희생자에서 제외돼야 한다.” 헌재는 1948년 7월17일 제정돼 현재까지 이어지는 헌법의 관점에서 희생자 제외 대상자 기준을 정했다.
10여년간 이어진 불량 위패 논란 가운데 빠지지 않는 이름이 이신호다. 제주 4·3평화공원 불량 위패 척결 세미나 자료집 68쪽에 그의 이름이 보인다. ‘남로당 제주도당 부위원장 이신호. 1931년 농민테제사건에 연루됨. 1932년 세화리 해녀사건의 배후조종 혐의로 2년 구형 언도. 대정면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하다가 위원장으로 천거됨. 1947년 3·1 대회 후 검거되어 6개월형 언도.’
4월3일 국가추념일 지정했지만
10년간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불량위패와 희생자 재심사 논란
그 가운데 빠지지 않는 이름이
남로당 부위원장 출신 이신호 미군정 치하 어수선한 시대상황
남로당 주도한 1947년 3·1절 대회
이신호는 대정국민학교서 연설
그날 제주서 예측하지 못한 사고
경찰의 발포와 대대적인 총파업…
5000명 부른 이신호의 군중연설
지난 23일 봄의 햇빛이 내리쬔 서귀포시 대정읍(1956년 대정면에서 승격됐다) 상모리의 대정초등학교 운동장은 윤기나게 반질거렸다. 초록 인조잔디 축구장이 깔렸고, 축구장 바깥으로 와인색 육상 트랙이 감싸 안았다. 인구 1만7000여명이 사는 대정읍의 초등학교라고 하기엔 규모도 크고 새것처럼 흠이 없었다. 학교의 역사는 100년을 넘는다.
68년 전, 1947년 3월1일. 초록 잔디구장이나 와인색 육상 트랙은 없었을 이 학교의 운동장 흙을 이신호도 밟고 있었다. 당시 인구 2만여명이었던 대정 주민 가운데 5000여명이 집결했다. 인근 가파도에서 주민 100여명이 어선을 타고 참여할 정도로 운동장은 북적였다. 학교 가까이에 살던 이신호도 대정국민학교 운동장으로 걸어갔다.
당시는 미군정(1945년 9월8일~48년 8월15일) 시대로 정치·경제가 불안했다. 미군정 치하였던 1946년 농촌의 쌀을 강제 징수하는 미곡수집령이 발표되고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전국으로 번졌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제주도에서 흉작이 계속되고, 해외에 이주한 제주도민들이 귀국하면서 실업률이 증가했다. 미군정의 ‘대일 교역 및 일본상품 유통 금지’에 따라 제주도의 경제가 급격히 위축됐으며, 미군정의 곡물수집정책에 대하여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미곡수집 저지운동을 주도하는 등 경제적 불안과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점차 심화되었다.(2001년 헌재 결정문)
3·1절 28주년을 맞아 남로당이 조직한 기념대회는 읍·면 단위로 열렸다. 제주읍은 애월면과 조천면을 합쳐 제주북국민학교에서, 대정면은 대정국민학교에서 열렸다. 이신호와 대정중학교 이도일 교장이 연설을, 이운방씨가 사회를 맡았다. 대정국민학교에선 함성이 울려퍼졌다.
“민주주의적 애국투사를 즉시 석방하라! 인민항쟁 관계자를 즉시 석방하라! 최고지도자 박헌영 선생 체포령을 즉시 철회하라!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 만세! 정권은 즉시 인민위원회로 넘기라! 일제적 통치기구를 분쇄하라!
친일파 민족반역자 친파쇼분자의 근멸! 삼상회의 결정의 즉시 실천! 인민경제를 파괴하는 모리배의 철저한 소탕!
언론·출판·집회·결사·파업·시위·신앙의 절대자유! 식량 문제 해결은 인민의 손으로!”(남로당 제주도위원회의 3·1운동 기념 투쟁의 방침에 나온 표어)
표어를 이해하려면 시대 상황을 알아야 한다. 한국의 독립을 위해 민주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의정서가 1945년 12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채택됐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1월 결렬되면서 나라의 앞날이 불안한 때였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미군정은 좌파를 탄압했다. 1946년 9월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 등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고 <인민일보>, <현대일보>, <중앙신문> 등 3개 좌파 신문들이 정간됐다. 이런 시대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3·1절 행사가 치러진 것이다.
1947년 3·1절을 전후로 이를 막기 위한 제주의 경찰력이 증가하면서 제주읍 일대에는 긴장감이 조성됐다. 제주도사(濟州島司) 겸 미군 제59군정중대 지휘관 스타우트 소령은 3·1절 행사를 앞두고 시위를 금지하되 기념행사를 벌이려면 서비행장(현 제주국제공항)에서 거행하라고 통첩을 내렸다. 이 와중에 충남·충북 경찰청 소속 100명의 응원 경찰대가 제주도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날 오후 2시께 기념행사가 끝난 뒤 군정 당국의 반대에도 허가받지 않은 거리시위가 벌어졌다. 오후 2시45분께 관덕정 앞 광장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차여 소란이 일어났다. 군중이 야유하며 돌멩이를 던졌다. 당황한 기마경관이 동료가 있는 경찰서 쪽으로 말을 몰았고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기마경관을 쫓아 군중이 몰려오자 경찰서 습격으로 오인하고 발포한 것이다.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었다. 경찰은 시종일관 경찰서 습격사건으로 규정하며 민심을 수습하지 않았다.
3월5일 남로당 제주도위원회 간부 수십명은 제주읍 삼도리 김행백 집에 모여 ‘3·1사건’ 대책을 논의했다. 이신호, 이운방 등이 속한 남로당 대정면당이 3·10 총파업을 건의했고 도당은 받아들였다. “사건의 중대성에 비추어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손톱에서 발톱에 이르기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백수공권이어서 그들 총검부대와 직접 정면충돌은 도저히 생각조차 못 해볼 일이다. 그러므로 평화적 항의의사 표시로 전도 총파업을 전원일치 가결하고 조직부 이승진(김달삼)을 연락원으로 도당 본부에 파견하는 것을 건의하도록 하였다.”(이운방, <4·3사건의 진상>)
3월10일 제주도에선 한국에서 유례없는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다. 관공서, 통신기관, 운송업체, 학교, 미군정청 통역단, 공무원 등이 참여했다. 경찰의 3·1절 발포에 항의하는 파업은 남로당 제주위원회가 배후에서 지원했다. 이날 박경훈 제주도사(지금의 도지사로 당시에는 미국인, 한국인 공동으로 맡았다)와 김두현 총무국장 등 100명의 직원이 대회를 열었다. 스타우트 소령 겸 제주도사에게 발포 경관에 대한 처벌과 고문 폐지 등 6개 사항을 요구했다. 이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제주도청 직원 140여명이 파업을 결의한다고 밝혔다. <제주경찰사>를 보면, “경찰 및 사법기관을 제외한 전 기관 단체가 총파업을 실시해 그 숫자는 166개 기관 단체, 4만1211명”이라고 설명한다. 제주 경찰이 집계하지 않은 일부 경찰, 기관·단체에 속하지 않은 민간인의 파업까지 고려하면 더 많은 숫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업은 3월20일 전후로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다.
4·3특별법은 2조 제1호에서 “제주 4·3사건은 1947. 3. 1.을 기점으로 하여 1948. 4. 3.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 9. 21.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파업 주도 혐의로 검거된 이신호
출옥후 활동 안하고 집에서 지내
무장투쟁 찬성하지 않았지만
지서 다녀온 뒤 집에서 총살
지금도 자녀들은 인터뷰 거절 남로당원이면 희생자 못되나
모슬포엔 이신호의 묘비와
남로당원 명부 거짓으로 꾸며
주민들 목숨 살린 모슬포지서장
문형순의 공덕비가 공존한다 이신호와 함께 끌려간 고춘언의 증언 이신호와 남로당 대정면책 이운방(1910~2013) 등은 집회 및 불법 파업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1947년 3월17일 미군정에 검거됐다. 이신호는 그해 4월30일 미군정 제주지방심리원(법원)에서 벌금 5000원에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목포에서 옥살이를 했다. 판결문을 보면, 이신호는 “남로당 대정면위원회 위원장 겸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좌익극렬분자”로 소개된다. 그의 직함이 남로당 제주도당 부위원장인지, 남로당 대정면 위원장인지, 또는 대정면 부위원장인지 기록물마다 다르다. 출옥 후 이신호는 공개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주로 집에서 지냈다. 일제 때부터 해온 주류 도매업이 생계수단이었다. 그가 출옥한 이듬해인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의 오름마다 봉화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남로당은 제주도 11개 경찰지서를 습격했다. 경찰관 4명, 우익 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 사망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신호는 이도일이 하는 한남소주 공장의 주류 도매권을 갖고 있었어. 가끔 순사들이 찾아오면 술도 같이 하는 편이었고. 우리 집과 가까워서 가끔 찾아갔는데 가 보면 수염도 자르지 않고 책 읽으면서 지내고 있데. 같이 이야기해보면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어. 그 사건은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했지. 그러다 초사흗날(1948년 4월3일) 폭탄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병원에 가서 입원해 있었어.”(이운방, <4·3사건의 진상>) 대정면은 4·3사건의 요주의 지역이었다. 투쟁을 지휘한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1925~50?)이 대정중학교 사회 교사였기 때문이다. 이신호를 비롯한 주민들은 모슬포지서에 수차례 불려갔다. 이신호가 숨지기 얼마 전 함께 지서에 끌려간 고춘언(90)씨를 지난 5일 대정읍 자택에서 만났다. 청력이 약한 고씨에게 글로 질문하고 입말로 대답을 들었다. “서북청년단(월남한 이북 청년들이 1946년 만든 우익단체)이 갑자기 막 잡아가고. 집에 있으니까 나오라고 했어. 그래서 갔는데 내 앞에 삼십명이 막 맞았어. 앞에 놈은 몽둥이로 맞았어. ‘너 산에 갔다 왔지?’ 물으면서. 내 차례가 되어서 (서북청년단원이) 팍 차니까 내가 ‘아!’ 했거든. 높은 특공대장이 ‘취조 중지!’ 하고 집합을 했어. 특공대장이 경감이라. ‘이신호가 누구요. 이리 오라’ 하길래 이신호가 포승줄에 묶여서 ‘못 가겠수다’ 했지. ‘당신 이신호가 맞죠? 이름 많이 들었소. 입법의원에 선출이 됐다던데. (1946년 8월24일 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에 관한 미군정 법령 제118호가 발표돼 전국에서 90명이 선출됐다. 이신호는 선출 직후 사퇴했다.) ‘당신 같은 사람, 대한민국 위해 노력합시다’ 하더라고. 회유하면서 담배도 주었어. 다음날 집에 보내줬어.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총살이 되었어.” 남한만의 단독선거 윤곽이 드러난 1948년 2월 전후로 미군정과 좌파는 치열하게 대립했다. 그해 1월 조직 명단이 노출돼 치명타를 입은 남로당 제주도당은 1·22 검거 사건 등을 겪으며 세대교체와 함께 노선 변화의 기로에 서게 됐다. 위기설을 앞세운 강경파가 4·3사건이 일어나기 전 당 조직을 장악했다. 일제 때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했던 장년층에서 젊고 급진적인 신진세력으로 교체됐다. 신진세력의 리더는 23살 청년 김달삼. 본명은 이승진으로 그는 장인 강문석이 쓰던 가명 김달삼을 이어받았다. 1947년 3·1절 당시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이던 김달삼은 이후 제주도당 조직부 차장, 조직부장으로 급부상했다. 무장투쟁에 대해 당 지도부 내에서조차 시기상조론과 강행론이 팽팽했다. 무장투쟁은 제주 조천읍 신촌리에서 결정됐다. 이른바 ‘신촌회의’다. 신촌회의에 참석하고 무장투쟁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피신해 도쿄에 살던 이삼룡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믐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19명이 민가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등 7명인데 우린 가진 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김달삼은 20대 나이지만 조직부장이니까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안세훈,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이미 징역살이를 하거나 피신한 상태였다. (중략) 아무튼 우리 지식과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중략) 김달삼은 내가 군사총책을 맡겠다며 날짜를 통보했다. 사건 발발 10일 전쯤에 날짜가 결정됐다.”(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당시 대정면에는 일제 때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이신호의 동료들이 사라진 뒤였다. 남로당 대정면책 이운방은 4·3사건 이후 3개월쯤 고향에 있다가 송악산 부근 갈못해변에서 발동선을 타고 부산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운방의 이웃집에 살며 이신호 등에게 사회주의 영향을 준 오대진(1898~1979)은 4·3 당시 충남 강경으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49년 일본으로 떠났다. “아버지에 대한 고문이 심했어요. 어머님이 아버님에게 식사 가지고 가라고 하면 제 몫이었어요. 가서 보면 고문이 말이 아니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일본으로 나가자고 할 때 아버님은 지은 죄도 없는데 어딜 가느냐고 집에 있었어요.”(1993년 6월 제주4·3연구소 기관지 <4·3 장정> 6호에 실린 이신호의 차녀 발언) 사회주의는 제주 주류였다 1948년 남로당 활동은 미군정에서 ‘사실상’ 비합법화되고 지하운동으로 유지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 남로당 또한 표면적으로는 합법정당이라는 사실이다.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한 미국은 어떤 정치집단도 제약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는 모양새를 유지했다. 1948년 1월23일 서울에 들어온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남북한 선거 협의 대상으로 남한 6명, 북한 4명을 지명하고 이 가운데 남로당 지도자 허헌, 박헌영을 포함시켰다. 제주도에서 남로당원 명단이 드러나 1948년 1월 대거 검거된 ‘1·22 검거 사건’ 발생 1주일 만인 1월30일. 김영배 제주경찰감찰청장과 <제주신보> 기자 일문일답을 들여다본다. 기자: 피검거자의 수는? 경찰의 방침 여하는? 김영배 청장: 이자들은 일부 불온분자의 선동에 현혹되어 부화뇌동한 것으로 개전의 정이 현저한 자에 대해 경찰이 아량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 경찰은 남로당에 가입한 자를 탄압하는 게 아니고 그들의 비합법적 행동에 철퇴를 내리는 것이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 조직된 좌파 정당은 조선공산당(1945년 9월), 조선인민당(1945년 11월), 남조선신민당(1946년 2월) 등 3개 정당이다. 조선공산당은 박헌영, 인민당은 여운형, 신민당은 백남운이 주도했다. 1946년 11월 좌파 3당의 합당으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됐다. <독립신문> 등은 11월23일 열린 남로당 결당식에 대의원 558명 외에 미군정 최고책임자 존 하지 중장의 대리 법펠로 소좌, 미군방첩대(CIC) 관계자, 미국 신문기자와 국내 취재진이 모였다고 보도했다. 제주는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 운동의 뿌리가 강하게 이어졌다. 4·3특별법 및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는 4·3사건의 시작을 1947년 3월1일로 보고 있는데, 이즈음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보고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47년 3월25~26일. 두 건의 방첩대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의 우익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독립당 제주도지부는 조직도 빈약하고 자금도 충분치 못하다. 각 당은 섬 전체에 단지 1000명의 회원이 있을 뿐이다. 두 당은 좌익 인사들의 심한 반대로 정치적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주도 좌익에 대한 여러 보고서에 따르면 좌익 인사들은 제주도 인구의 60~80%에 이르고 있다.” 당시 제주도민은 28만여명이다. 선거 결과 또한 제주도는 다른 지역과 달랐다. 1946년 8월24일 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에 관한 미군정 법령 제118호가 발표됐다. 입법의원 90명 가운데 절반은 민선의원이었고 나머지는 미군정 최고책임자 존 하지 중장이 임명했다. 1946년 10월31일 민선 입법의원 선거가 열렸다. “입법의원 선거에 우익이 승리.” <유피(UP)통신>을 인용한 <한성일보>의 관련 기사다. 한국민주당 15명, 대한독립촉성회 14명, 무소속 12명, 한국독립당 2명, 인민위원회 2명. 인민위원회를 제외한 우익의 승리였다. 그런데 이 두명의 인민위원회가 모두 제주 지역이다. 당시 남제주군의 면 대표 14명이 이신호를 선출했으나 그는 사퇴해버렸다. 인민위원회는 당시 공식 정당은 아니고, 주민들이 구성한 단체다. 제주도에서 남로당은 1946년 12월 결성돼 입법의원 선거 당시 출마하지 못했다. 제주도의 사회주의 성향은 일제 때부터 이어졌다. 1932년 제주 해녀들이 일본인 도사(도지사)의 차량을 포위하고, 500여명이 세화주재소를 포위하자 일본은 배후세력을 캐기 시작했다. 배후세력으로 제주도 야체이카(공산당 조직의 기본단위인 세포의 러시아어)가 지목됐다. 당시 야체이카 조직 40여명이 구속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신호는 당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첨예한 이념 갈등, 새겨지지 않은 비석 2008년 건립된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기념관에는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이 바닥에 누워 있다. 백비(白碑)다. 이름 짓지 못한 역사적 비석 앞에서 안내문을 읽어본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러온 제주 4·3은 아직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2003년 정부가 채택한 진상조사보고서도 이념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은 단어인 ‘사건’으로 적혔다. 4·3사건 피해 규모는 2만5000~3만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 인구의 약 10%다. 4·3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의 가해자별 통계를 보면, 경찰·군인·우익단체 등의 토벌대(84·3%), 남로당 무장대(12.3%), 알 수 없음(3.4%) 차례다. 제주는 세계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4·3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독일과 일본에 공동 대항한 미·소 양국 간의 협력이 종료되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 대립이 시작되는 배경 속에 발생했다. 국내적으로는 한시적 미군정하의 생소한 좌우 이데올로기 및 통일국가에 대한 의견 대립이 소용돌이쳤고, 가장 약한 고리인 제주에서 건국을 앞두고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혈연공동체 안에서 보복이 일어나고 악순환이 거듭되며 피해가 확대됐다. 역사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인데, 가해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같은 섬 안에서 4·3을 바라보는 시각, 역사관이 다르다. 양신하 대정읍지편찬위원장은 “부모님이 토벌대에 의해 돌아가신 유족은 군인·경찰 위패가 있어서 4·3평화공원에 가기 힘들고, 무장대에 의해 돌아가신 유족은 남로당원 위패 때문에 평화공원에 가기 꺼려진다”고 설명했다. 4·3특별법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제정됐고 노무현 정부 때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는 등 활기를 띠었다. 역사와의 화해가 강조됐다. 진압작전에 참전한 군인과 경찰을 희생자로 볼 수 있는지 논란이 되자, 4·3위원회는 2006년 4월21일 법제처에 질의했다. 법제처는 “특별법에서 제주 4·3사건을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희생자를 주민에 한정하여 규율하고 있지 않다. 희생자를 가능한 한 넓게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며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군인 및 경찰도 해방 전후 혼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로 포함하는 것이 동법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회신했다. 4·3위원회는 토벌에 참여한 대한청년단 등 국가유공자 519명, 경찰 91명, 군인 28명을 희생자로 추가로 인정했다. 반면 헌법재판소는 2001년 4·3특별법 위헌확인 심판 청구를 각하하며 “①무장유격대에 가담한 자 중에서 수괴급 공산무장병력 지휘관 또는 중간간부로서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자 ②모험적 도발을 직간접적으로 지도 또는 사주함으로써 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③기타 무장유격대와 협력한 진압 군경 및 동인들의 가족 ④제헌선거 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⑤경찰 등의 가옥과 경찰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자”를 희생자 제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2002년 3월 4·3위원회는 헌재의 기준을 좁혀 “①제주 4·3 발발에 직접적인 책임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②군경의 진압에 주도적 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을 제외하되, 행위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빨갱이’ 목숨 살려준 지서장은 어쩔 텐가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교집합 부분을 분절하여 구분할 수 있을까. 제외 기준이 남로당원 또는 경찰 등의 직위가 될 수 있을까.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으되 무장투쟁에 반대했던 남로당원, 경찰·군인이었으나 학살에 동의하지 않거나 상부 지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살육에 참여해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은 자들은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모슬포에는 이신호의 쓸쓸한 묘비도, 남로당원 명부에 오른 대정면 주민들의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이들의 목숨을 살린 모슬포지서장 문형순의 공덕비도 공존한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인식·평가함과 동시에 과거로 걸어 들어가 그 속에 놓인 사건을 인식·평가하는 것도 균형적인 역사감각일 것이다. 시대 상황과 함께 개인들의 삶을 조망하는 것 또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하나의 길이다. 개인들의 역사가 모여 시대와 역사를 이룬다. 논란이 일고 있는 103명의 불량 위패 명단에 대한 판단 또한 종합적이고 균형적 고찰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 103개 위패에는 103명의 저마다 다른 삶이 있다. 인간을 판단하는 데 잣대 몇 가지 쓰인 종이 한 장으로 심판하는 것은 너무 가볍다. 글 서귀포 대정읍/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사진 제주도청·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제주4·3평화재단 제공,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4·3이 진행 중이던 1948년 7~8월께 토벌대가 주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을 미군이 찍었다. 가운데 갈옷을 입은 주민은 중산간마을 거주자로 추정된다.
2008년 건립된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기념관에는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 백비(白碑)가 바닥에 누워 있다.
10년간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불량위패와 희생자 재심사 논란
그 가운데 빠지지 않는 이름이
남로당 부위원장 출신 이신호 미군정 치하 어수선한 시대상황
남로당 주도한 1947년 3·1절 대회
이신호는 대정국민학교서 연설
그날 제주서 예측하지 못한 사고
경찰의 발포와 대대적인 총파업…
미군 제59군정중대는 1945년 11월 제주도에 상륙해 제주농업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1948년 5월1일 성조기 게양대 사이로 막사가 보인다.
제주 남로당 내 무장투쟁론자였던 김달삼(1925~50?) 인민유격대 총사령관(왼쪽)과 남로당원 명부에 오른 대정면 주민들의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이들의 목숨을 살린 문형순(1897~1966) 모슬포지서장.
출옥후 활동 안하고 집에서 지내
무장투쟁 찬성하지 않았지만
지서 다녀온 뒤 집에서 총살
지금도 자녀들은 인터뷰 거절 남로당원이면 희생자 못되나
모슬포엔 이신호의 묘비와
남로당원 명부 거짓으로 꾸며
주민들 목숨 살린 모슬포지서장
문형순의 공덕비가 공존한다 이신호와 함께 끌려간 고춘언의 증언 이신호와 남로당 대정면책 이운방(1910~2013) 등은 집회 및 불법 파업을 주도한 혐의 등으로 1947년 3월17일 미군정에 검거됐다. 이신호는 그해 4월30일 미군정 제주지방심리원(법원)에서 벌금 5000원에 6개월 형을 선고받고 목포에서 옥살이를 했다. 판결문을 보면, 이신호는 “남로당 대정면위원회 위원장 겸 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이며 좌익극렬분자”로 소개된다. 그의 직함이 남로당 제주도당 부위원장인지, 남로당 대정면 위원장인지, 또는 대정면 부위원장인지 기록물마다 다르다. 출옥 후 이신호는 공개적인 활동을 중단하고 주로 집에서 지냈다. 일제 때부터 해온 주류 도매업이 생계수단이었다. 그가 출옥한 이듬해인 1948년 4월3일 새벽 2시 한라산 기슭의 오름마다 봉화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남로당은 제주도 11개 경찰지서를 습격했다. 경찰관 4명, 우익 인사 등 민간인 8명, 무장대 2명 사망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이신호는 이도일이 하는 한남소주 공장의 주류 도매권을 갖고 있었어. 가끔 순사들이 찾아오면 술도 같이 하는 편이었고. 우리 집과 가까워서 가끔 찾아갔는데 가 보면 수염도 자르지 않고 책 읽으면서 지내고 있데. 같이 이야기해보면 무장투쟁에 대해서는 찬성하지 않았어. 그 사건은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했지. 그러다 초사흗날(1948년 4월3일) 폭탄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병원에 가서 입원해 있었어.”(이운방, <4·3사건의 진상>) 대정면은 4·3사건의 요주의 지역이었다. 투쟁을 지휘한 유격대 총사령관 김달삼(1925~50?)이 대정중학교 사회 교사였기 때문이다. 이신호를 비롯한 주민들은 모슬포지서에 수차례 불려갔다. 이신호가 숨지기 얼마 전 함께 지서에 끌려간 고춘언(90)씨를 지난 5일 대정읍 자택에서 만났다. 청력이 약한 고씨에게 글로 질문하고 입말로 대답을 들었다. “서북청년단(월남한 이북 청년들이 1946년 만든 우익단체)이 갑자기 막 잡아가고. 집에 있으니까 나오라고 했어. 그래서 갔는데 내 앞에 삼십명이 막 맞았어. 앞에 놈은 몽둥이로 맞았어. ‘너 산에 갔다 왔지?’ 물으면서. 내 차례가 되어서 (서북청년단원이) 팍 차니까 내가 ‘아!’ 했거든. 높은 특공대장이 ‘취조 중지!’ 하고 집합을 했어. 특공대장이 경감이라. ‘이신호가 누구요. 이리 오라’ 하길래 이신호가 포승줄에 묶여서 ‘못 가겠수다’ 했지. ‘당신 이신호가 맞죠? 이름 많이 들었소. 입법의원에 선출이 됐다던데. (1946년 8월24일 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에 관한 미군정 법령 제118호가 발표돼 전국에서 90명이 선출됐다. 이신호는 선출 직후 사퇴했다.) ‘당신 같은 사람, 대한민국 위해 노력합시다’ 하더라고. 회유하면서 담배도 주었어. 다음날 집에 보내줬어. 그리고 얼마 안 가서 총살이 되었어.” 남한만의 단독선거 윤곽이 드러난 1948년 2월 전후로 미군정과 좌파는 치열하게 대립했다. 그해 1월 조직 명단이 노출돼 치명타를 입은 남로당 제주도당은 1·22 검거 사건 등을 겪으며 세대교체와 함께 노선 변화의 기로에 서게 됐다. 위기설을 앞세운 강경파가 4·3사건이 일어나기 전 당 조직을 장악했다. 일제 때 사회주의 항일운동을 했던 장년층에서 젊고 급진적인 신진세력으로 교체됐다. 신진세력의 리더는 23살 청년 김달삼. 본명은 이승진으로 그는 장인 강문석이 쓰던 가명 김달삼을 이어받았다. 1947년 3·1절 당시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이던 김달삼은 이후 제주도당 조직부 차장, 조직부장으로 급부상했다. 무장투쟁에 대해 당 지도부 내에서조차 시기상조론과 강행론이 팽팽했다. 무장투쟁은 제주 조천읍 신촌리에서 결정됐다. 이른바 ‘신촌회의’다. 신촌회의에 참석하고 무장투쟁에 참여했다가 일본으로 피신해 도쿄에 살던 이삼룡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무장봉기가 결정된 것은 1948년 2월 그믐에서 3월 초 즈음의 일이다. 신촌에서 회의가 열렸는데 19명이 민가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김달삼이 봉기 문제를 제기했다. 신중파로는 조몽구와 성산포 사람 등 7명인데 우린 가진 것도 없는데 더 지켜보자고 했다. 강경파는 나와 이종우, 김달삼 등 12명이다. 김달삼은 20대 나이지만 조직부장이니까 실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안세훈, 오대진, 강규찬, 김택수 등 장년파는 이미 징역살이를 하거나 피신한 상태였다. (중략) 아무튼 우리 지식과 수준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중략) 김달삼은 내가 군사총책을 맡겠다며 날짜를 통보했다. 사건 발발 10일 전쯤에 날짜가 결정됐다.”(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 당시 대정면에는 일제 때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이신호의 동료들이 사라진 뒤였다. 남로당 대정면책 이운방은 4·3사건 이후 3개월쯤 고향에 있다가 송악산 부근 갈못해변에서 발동선을 타고 부산으로, 그리고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운방의 이웃집에 살며 이신호 등에게 사회주의 영향을 준 오대진(1898~1979)은 4·3 당시 충남 강경으로 도피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1949년 일본으로 떠났다. “아버지에 대한 고문이 심했어요. 어머님이 아버님에게 식사 가지고 가라고 하면 제 몫이었어요. 가서 보면 고문이 말이 아니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일본으로 나가자고 할 때 아버님은 지은 죄도 없는데 어딜 가느냐고 집에 있었어요.”(1993년 6월 제주4·3연구소 기관지 <4·3 장정> 6호에 실린 이신호의 차녀 발언) 사회주의는 제주 주류였다 1948년 남로당 활동은 미군정에서 ‘사실상’ 비합법화되고 지하운동으로 유지됐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시 남로당 또한 표면적으로는 합법정당이라는 사실이다.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한 미국은 어떤 정치집단도 제약받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는 모양새를 유지했다. 1948년 1월23일 서울에 들어온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남북한 선거 협의 대상으로 남한 6명, 북한 4명을 지명하고 이 가운데 남로당 지도자 허헌, 박헌영을 포함시켰다. 제주도에서 남로당원 명단이 드러나 1948년 1월 대거 검거된 ‘1·22 검거 사건’ 발생 1주일 만인 1월30일. 김영배 제주경찰감찰청장과 <제주신보> 기자 일문일답을 들여다본다. 기자: 피검거자의 수는? 경찰의 방침 여하는? 김영배 청장: 이자들은 일부 불온분자의 선동에 현혹되어 부화뇌동한 것으로 개전의 정이 현저한 자에 대해 경찰이 아량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 경찰은 남로당에 가입한 자를 탄압하는 게 아니고 그들의 비합법적 행동에 철퇴를 내리는 것이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 조직된 좌파 정당은 조선공산당(1945년 9월), 조선인민당(1945년 11월), 남조선신민당(1946년 2월) 등 3개 정당이다. 조선공산당은 박헌영, 인민당은 여운형, 신민당은 백남운이 주도했다. 1946년 11월 좌파 3당의 합당으로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됐다. <독립신문> 등은 11월23일 열린 남로당 결당식에 대의원 558명 외에 미군정 최고책임자 존 하지 중장의 대리 법펠로 소좌, 미군방첩대(CIC) 관계자, 미국 신문기자와 국내 취재진이 모였다고 보도했다. 제주는 일제 때부터 사회주의 운동의 뿌리가 강하게 이어졌다. 4·3특별법 및 정부의 진상조사보고서는 4·3사건의 시작을 1947년 3월1일로 보고 있는데, 이즈음 주한미육군사령부 일일정보보고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1947년 3월25~26일. 두 건의 방첩대 보고서에 따르면 제주도의 우익 대한독립촉성국민회와 한국독립당 제주도지부는 조직도 빈약하고 자금도 충분치 못하다. 각 당은 섬 전체에 단지 1000명의 회원이 있을 뿐이다. 두 당은 좌익 인사들의 심한 반대로 정치적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주도 좌익에 대한 여러 보고서에 따르면 좌익 인사들은 제주도 인구의 60~80%에 이르고 있다.” 당시 제주도민은 28만여명이다. 선거 결과 또한 제주도는 다른 지역과 달랐다. 1946년 8월24일 조선과도입법의원 창설에 관한 미군정 법령 제118호가 발표됐다. 입법의원 90명 가운데 절반은 민선의원이었고 나머지는 미군정 최고책임자 존 하지 중장이 임명했다. 1946년 10월31일 민선 입법의원 선거가 열렸다. “입법의원 선거에 우익이 승리.” <유피(UP)통신>을 인용한 <한성일보>의 관련 기사다. 한국민주당 15명, 대한독립촉성회 14명, 무소속 12명, 한국독립당 2명, 인민위원회 2명. 인민위원회를 제외한 우익의 승리였다. 그런데 이 두명의 인민위원회가 모두 제주 지역이다. 당시 남제주군의 면 대표 14명이 이신호를 선출했으나 그는 사퇴해버렸다. 인민위원회는 당시 공식 정당은 아니고, 주민들이 구성한 단체다. 제주도에서 남로당은 1946년 12월 결성돼 입법의원 선거 당시 출마하지 못했다. 제주도의 사회주의 성향은 일제 때부터 이어졌다. 1932년 제주 해녀들이 일본인 도사(도지사)의 차량을 포위하고, 500여명이 세화주재소를 포위하자 일본은 배후세력을 캐기 시작했다. 배후세력으로 제주도 야체이카(공산당 조직의 기본단위인 세포의 러시아어)가 지목됐다. 당시 야체이카 조직 40여명이 구속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재판을 받았다. 이신호는 당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첨예한 이념 갈등, 새겨지지 않은 비석 2008년 건립된 제주시 봉개동 4·3평화기념관에는 글을 새기지 못한 비석이 바닥에 누워 있다. 백비(白碑)다. 이름 짓지 못한 역사적 비석 앞에서 안내문을 읽어본다. ‘봉기, 항쟁, 폭동, 사태, 사건 등으로 다양하게 불러온 제주 4·3은 아직 올바른 역사적 이름을 얻지 못하고 있다. 분단의 시대를 넘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통일의 그날 진정한 4·3의 이름을 새길 수 있으리라.’ 2003년 정부가 채택한 진상조사보고서도 이념적 성향을 드러내지 않은 단어인 ‘사건’으로 적혔다. 4·3사건 피해 규모는 2만5000~3만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제주 인구의 약 10%다. 4·3위원회가 확정한 희생자의 가해자별 통계를 보면, 경찰·군인·우익단체 등의 토벌대(84·3%), 남로당 무장대(12.3%), 알 수 없음(3.4%) 차례다. 제주는 세계사적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었다. 4·3사건은 제2차 세계대전 종료 후 독일과 일본에 공동 대항한 미·소 양국 간의 협력이 종료되면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체제 대립이 시작되는 배경 속에 발생했다. 국내적으로는 한시적 미군정하의 생소한 좌우 이데올로기 및 통일국가에 대한 의견 대립이 소용돌이쳤고, 가장 약한 고리인 제주에서 건국을 앞두고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섬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혈연공동체 안에서 보복이 일어나고 악순환이 거듭되며 피해가 확대됐다. 역사는 지나간 시간에 대한 기억인데, 가해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같은 섬 안에서 4·3을 바라보는 시각, 역사관이 다르다. 양신하 대정읍지편찬위원장은 “부모님이 토벌대에 의해 돌아가신 유족은 군인·경찰 위패가 있어서 4·3평화공원에 가기 힘들고, 무장대에 의해 돌아가신 유족은 남로당원 위패 때문에 평화공원에 가기 꺼려진다”고 설명했다. 4·3특별법은 김대중 정부 때인 2000년 제정됐고 노무현 정부 때 진상조사보고서가 확정되는 등 활기를 띠었다. 역사와의 화해가 강조됐다. 진압작전에 참전한 군인과 경찰을 희생자로 볼 수 있는지 논란이 되자, 4·3위원회는 2006년 4월21일 법제처에 질의했다. 법제처는 “특별법에서 제주 4·3사건을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희생자를 주민에 한정하여 규율하고 있지 않다. 희생자를 가능한 한 넓게 인정하는 것이 타당하며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희생된 군인 및 경찰도 해방 전후 혼란한 이데올로기의 대립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자로 포함하는 것이 동법의 취지에 부합한다”고 회신했다. 4·3위원회는 토벌에 참여한 대한청년단 등 국가유공자 519명, 경찰 91명, 군인 28명을 희생자로 추가로 인정했다. 반면 헌법재판소는 2001년 4·3특별법 위헌확인 심판 청구를 각하하며 “①무장유격대에 가담한 자 중에서 수괴급 공산무장병력 지휘관 또는 중간간부로서 군경의 진압에 주도적·적극적으로 대항한 자 ②모험적 도발을 직간접적으로 지도 또는 사주함으로써 4·3사건 발발의 책임이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③기타 무장유격대와 협력한 진압 군경 및 동인들의 가족 ④제헌선거 관여자 등을 살해한 자 ⑤경찰 등의 가옥과 경찰관서 등 공공시설에 대한 방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자”를 희생자 제외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밝혔다. 2002년 3월 4·3위원회는 헌재의 기준을 좁혀 “①제주 4·3 발발에 직접적인 책임 있는 남로당 제주도당의 핵심 간부 ②군경의 진압에 주도적 적극적으로 대항한 무장대 수괴급을 제외하되, 행위를 객관적으로 입증할 구체적이고 명백한 증거자료가 있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빨갱이’ 목숨 살려준 지서장은 어쩔 텐가 그런데 가해자와 피해자,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인 교집합 부분을 분절하여 구분할 수 있을까. 제외 기준이 남로당원 또는 경찰 등의 직위가 될 수 있을까. 사회주의 사상을 가졌으되 무장투쟁에 반대했던 남로당원, 경찰·군인이었으나 학살에 동의하지 않거나 상부 지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살육에 참여해 정신적 트라우마를 입은 자들은 가해자일까, 피해자일까. 모슬포에는 이신호의 쓸쓸한 묘비도, 남로당원 명부에 오른 대정면 주민들의 조서를 거짓으로 꾸며 이들의 목숨을 살린 모슬포지서장 문형순의 공덕비도 공존한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면, 현재의 관점에서 과거를 인식·평가함과 동시에 과거로 걸어 들어가 그 속에 놓인 사건을 인식·평가하는 것도 균형적인 역사감각일 것이다. 시대 상황과 함께 개인들의 삶을 조망하는 것 또한 실체적 진실에 접근하는 하나의 길이다. 개인들의 역사가 모여 시대와 역사를 이룬다. 논란이 일고 있는 103명의 불량 위패 명단에 대한 판단 또한 종합적이고 균형적 고찰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 103개 위패에는 103명의 저마다 다른 삶이 있다. 인간을 판단하는 데 잣대 몇 가지 쓰인 종이 한 장으로 심판하는 것은 너무 가볍다. 글 서귀포 대정읍/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사진 제주도청·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제주4·3평화재단 제공, 그래픽 송권재 기자 caf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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