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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대표 비리사학’ 상지대에서 나는 김문기를 이렇게 겪었다

등록 2015-10-16 21:20수정 2015-10-17 09:41

2014년 8월18일 상지영서대학교에서 상지대 총장 임명장과 함께 축하의 꽃다발을 받는 김문기씨. 사진 연합뉴스
2014년 8월18일 상지영서대학교에서 상지대 총장 임명장과 함께 축하의 꽃다발을 받는 김문기씨. 사진 연합뉴스
[토요판] 커버스토리 / ‘김문기와의 싸움’ 41년
1993년 3월29일 부정입학 혐의 등으로 원주 상지대 김문기 이사장이 구속된다. 2014년 8월14일 상지대 이사회는 만장일치로 총장에 김문기를 선임한다. 2015년 7월9일 교육부의 요구를 받은 이사회가 김문기 총장을 해임한다…. 뉴스에는 그날의 사건이 기록된다. 드넓은 바다에 제각각 자리잡은 섬처럼, 각각의 사건을 담은 그날의 문장들이 매일 소비된다. 그러나 개별적 사건, 그날의 문장들 사이에 촘촘히 배어든 시간을 헤아리기는 어렵다. 뉴스의 중심은 희대의 인물이다. 희대의 인물이 불굴의 의지로 족적을 남기는 동안 그 곁에서 인생이 전복된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시간은 짐작하기 어렵다. 한국 비리 사학의 대표 상지대가 김문기(83)와 인연을 맺은 시간은 1974년부터 현재까지다. 부정입학, 금품 수수와 부당 채용, 협박과 회유, 폭력, 부당해고, 용공조작 사건, 월급 포기 각서 강요 등이 끊이지 않았다. 41년간 한 대학교를 거쳐간 학생, 교직원, 교수들은 얼마나 많을까. 교육부의 방임 또는 무능력으로 사학 분규가 이어지는 동안 이들은 저마다 어떤 시간들을 견뎌야 했을까. 상지대에 얽힌 김문기의 41년을 따라가며 그 속에 스며든 보통 사람들의 힘겹거나, 당당했던 일기를 들여다본다. 기억들을 회고해본다. 뉴스는 보통 사람들의 것이기도 해야 한다.

“20년 전에도 북 치며 시위했는데…여전히 이러고 있구나”

▶ 상지대 학생들이 9월15일부터 이사진 퇴진을 요구하며 수업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상지대 동문들은 과거에도 온전히 수업이 이뤄진 학기가 없었다고 회고합니다. 부정입학 등으로 21년간 학교를 떠난 김문기씨가 거짓말처럼 지난해 총장으로 취임한 뒤 학교는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이 학교에선 1년간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요? 1년간 무수한 해고, 파면, 무기정학이 학교에서 일어났지만 공포가 학내 구성원들을 침묵하게 하진 않았습니다.

지난 5일 강원도 원주의 상지대 교정에서 열린 총궐기대회에서 30여명의 교수들이 이사진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9월15일부터 이어진 수업 거부로 학생들은 강의실이 아닌 교정에서 교수들을 마주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지난 5일 강원도 원주의 상지대 교정에서 열린 총궐기대회에서 30여명의 교수들이 이사진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9월15일부터 이어진 수업 거부로 학생들은 강의실이 아닌 교정에서 교수들을 마주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20여년 전에 네가 북을 참 잘 쳤는데…. 여전히 이러고 있구나.”

머리 희끗한 영문과 장재화 교수가 식판에 담긴 밥을 먹으며 맞은편에 앉은 제자를 바라보았다. 1988년 영문과에 들어온 제자 이주엽씨는 총학생회 활동을 하며 곧잘 북을 쳤다. 잇따른 부정입학, 돈과 맞바꾼 교수 채용, 부당 해고와 징계 등으로 인해 학내 민주화를 요구하던 학생들을 사상범으로 조작한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라는 요구. 이주엽씨는 1996년 졸업 때까지 제대로 수업이 진행된 학기를 경험한 적이 없다. 학생들은 연일 김문기 이사장 퇴진을 요구했다. 1993년 3월, 김문기 이사장이 부정입학 혐의 등으로 구속되면서 퇴진했다. 당시 민주자유당 3선 의원이던 김문기의 구속은 세간의 화제였다. 이씨는 상지대 졸업 뒤 교직원으로 채용됐다. 2014년 8월, 김문기가 거짓말처럼 21년 만에 귀환했다. 이번엔 이사장이 아니라 총장이었다. 학교는 내분에 휩싸였다. 김문기의 귀환으로 학교엔 칼바람이 불었다. 김문기를 반대하는 교수·직원·학생들은 파면·해임·무기정학 처리됐다. 이주엽씨도 해임됐다. 잘리지 않으려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숨을 죽여야 하는 시대로 회귀했다.

지난 5일 교직원 식당에서 식판을 두고 마주앉은 교수와 제자의 머리에 흰머리가 올라와 있다. 장 교수도 20여년 전 그때처럼 강의실에 들어가지 않는다. 불 꺼진 복도마다 ‘수업 거부’라는 문구가 빼곡히 붙었다. 상지대는 9월15일부터 수업이 열리지 않는다. 복도에는 학생들이 강의실에서 빼버린 책상과 의자로 가득 찼다. 수업 거부를 알리는 하얀 종이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복도는 어둡고 음산해 보이기까지 했다. 20여년 전의 이주엽이 전공서적을 버리고 북을 들었듯, 이날 학생들도 낮 12시가 되자 강의실이 아닌 ‘해방뜰’로 불리는 교정에 모여들었다. 해직된 이주엽이 수업을 거부하는 후배들 앞에 섰다. “우리 용기를 잃지 맙시다.”

논란에 휩싸인 김문기는 취임 1년을 채우지 못하고 7월9일 해임됐다. 교육부는 지난 3월 상지대 종합감사 결과를 통보하고 교육용 기본재산에 대한 부당한 관리, 계약직원의 부당한 특별채용 등을 이유로 이사회에 김 전 총장 해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대학 정문 앞에 자리한 총동창회 건물에 그가 이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김문기가 나타나는 저녁이나 밤이 되면 학교의 주요 보직 교수나 교직원들이 하나둘 총동창회 건물로 발길을 옮겼다. 지난 5일 밤, 총동창회 건물에 불이 켜졌다. 여자 1명, 남자 2명이 건물에 들어가지도 않은 채 바깥에 놓인 의자에 앉아 김문기와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 양복 입은 남자가 명함을 달라고 해서 내밀어도 자신에 대한 소개는 비밀에 부쳤다. 교직원인지, 교수인지, 이름을 물어도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이름도, 명함도 없다. 총동창회 사무실에서 일한다”고만 했다. “우리도 만나려 기다리고 있어요. 오늘 만나지 못할 거요.” 양복 입은 남자가 말했다.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더 안 좋은 일을 당하기 전에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오.”

‘더 안 좋은 일’의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때는 김문기를 잘 알지 못했다.

상지대 이사장 취임 전 파고다가구공예점을 운영한 김문기(맨 오른쪽)씨와 민관식 전 국회부의장(맨 왼쪽)이 1968년 가구점 확장 기념 및 창립 기념일 행사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김씨가 1974년 상지대 이사장에 취임할 당시 민관식씨는 교육부 장관이었다. 김문기 자서전 <상지정신>
상지대 이사장 취임 전 파고다가구공예점을 운영한 김문기(맨 오른쪽)씨와 민관식 전 국회부의장(맨 왼쪽)이 1968년 가구점 확장 기념 및 창립 기념일 행사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김씨가 1974년 상지대 이사장에 취임할 당시 민관식씨는 교육부 장관이었다. 김문기 자서전 <상지정신>

수업이 사라진 학교

“이사회를 거쳐 정당하게 상지대학교 총장으로 정식 선임되고서도 논란의 중심에서 비켜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회 청문회 출석을 요구받았고 총장 사퇴를 강요받았습니다.”(지난해 3월 발간된 김문기 자서전 <상지정신> 77쪽)

08학번 법률행정학과 윤명식씨가 고등학교 시절 상상하던 대학 생활은 이런 것이었다. 선배들에게 밥을 얻어먹고, 여자친구를 사귀는 평범한 일상이었다. 윤씨의 입학을 전후해 학교는 혼란에 휩싸여갔다. 2007년 대법원은 분규 사학에서 임시이사의 정이사 파견은 무효라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종전이사(교육부의 임시이사 파견 전 마지막 이사로 통상적으로는 사학 설립자)는 보통 학교법인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임무와 가장 근접한 위치에 있는 자라 할 수 있다”며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를 제대로 보장하기 위해서는 학교 법인 자체의 정체성과 자주성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1993년 김문기가 물러나고 10년간 교육부의 임시이사 체제로 운영되던 상지대는 2003년부터 임시이사들이 정이사를 선임해 정이사 체제가 구축됐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이 상지대에서는 다르게 작용했다. 김문기의 복귀가 본격화되면서 학교는 혼란에 빠졌다. 윤씨는 대법원이 말한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와 사학의 정체성, 자주성 강화는 체감하지 못했다.

김문기의 측근 4명이 2010년 전체 이사의 절반을 구성했다. 이사회는 파행의 연속이었다. 김문기 복귀를 바라는 이사들과 교육부가 파견한 이사들의 의견 차이로 미결재 서류가 늘어나 학교 행정은 천천히 마비됐다. 윤씨가 학교에 입학해 매일 맞닥뜨려야 했던 것은 나이트클럽 홍보 차량처럼 생긴 탑차였다. 알지도 못했던 이름, 김문기를 지지한다는 홍보 차량이 매일 학교를 돌아다녔다.

김문기가 2014년 8월14일 총장으로 돌아왔다. 김문기 총장 복귀 1년간 윤씨가 본 것은, 새로운 정권이 과거 정권을 급격히 청산하다 낳은 부작용이었다. 김문기는 친인척을 대거 기용했다. 정관 22조의 2항에 상근 임원직을 신설하여 장남 김성남을 상임이사에, 문중 인사인 강릉 김씨 원주종친회장 김길래를 이사에, 먼 친척 최선용과 김일남을 이사에 앉혔다. 김문기 복귀 운동에 앞장서라고 2008년 김명식 총학생회장을 회유한 남아무개씨는 총무부장, 또다른 측근 조아무개씨는 학생지원부 과장에 임명됐다. 그동안 김문기 복귀 반대운동을 벌인 방정균 한의대 교수 등 4명은 파면, 이주엽 등 교직원 3명이 해임됐다. 추가적으로 교수 7명에 대한 징계절차도 진행됐다. 소명 절차도 진행되지 않았고 징계 사유도 학내 구성원들이 보기에 납득하기 힘들 만한 것이었다.

학교 행정은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3년마다 치러지는 대학구조개혁 평가에선 올해 ‘D-’(디 마이너스)를 받았다. 예견된 일이었다. 지난 7월 파면된 방정균 교수는 “대학구조개혁 평가를 하기 전에 교육부가 평가 지표를 미리 학교에 알려준다. 평가 지표를 보면, 학생들의 취업 지원과 장학금 등 교육 서비스에 관련된 사항에 점수가 높기 때문에 염두에 두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도 교육지원 프로그램 예산은 2014년 5억6936만원에서 2015년 9376만원으로 축소하는 등 전혀 대비가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의대 학생들도 모두 수업 거부를 진행중이다. 결석률이 수업일수의 4분의 1을 넘기면 한의대 학생들은 유급이다. 한의대 12학번 김세중 학생은 “유급의 불이익을 감수하는 이유는, 이대로 가다간 학교도 한의대도 망할 것 같은 위기 때문이다. 2017년 한의대 인증평가를 받기 위해선 기초교수 1명, 임상교수 8명을 채워야 하는데 아직도 충원이 안 된다. 지난 2월에는 겸임교수를 일방적으로 처우가 열악한 외래교수로 바꾸어 몇 분이 그만두는 바람에 2주간 수업 손실이 생겼고, 이제는 안 좋은 직장이라고 인식되어 지원도 안 하는 형편이다. 한방병원 분원을 지어야 인증평가를 통과할 수 있는데 인테리어 공사비를 제때 주지 않아 오래도록 공사가 멈췄다”고 말했다.

학교 로고는 1974~93년 김문기 이사장 시절의 것으로 모두 교체됐다. 학교 곳곳에 ‘상지대 설립자’라며 김문기 사진이 걸렸다. 그러나 상지학원 정관을 보면 설립자는 김문기가 아니라 고 원홍묵씨다. 지난해 11월25일 정관상 설립자를 원홍묵에서 김문기로 바꾸려다 교육부의 행정 지도로 정관 개정 취소 및 환원이 됐다. 김문기가 구속되던 1993년 이전까지 학생들의 집회 공간이던 ‘해방뜰’에는 화단이 생겼다. 설립자인 원홍묵 흉상은 2012년 석연치 않은 이유로 철거됐다. 원홍묵의 아들인 원지영씨가 “선친은 상지대와 관련이 없으니 흉상을 돌려달라”는 내용증명을 상지대에 보낸 것이다. 원홍묵 설립자 흉상은 김문기가 학교를 떠나 있던 2008년 3월19일 교정에 설치됐다. 그러나 원지영씨의 내용증명은 불과 1년 전의 기자회견 내용을 뒤집은 것이었다. 교수와 학생들이 김문기의 복귀를 막기 위해 2007년 5월28일 서울 정동 세실레스토랑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원씨는 “선친이 품은 건학정신을 잘 이어가고 있는 상지학원이 현명한 정이사들에 의해 발전하길 바란다. 사학비리의 대명사인 김문기씨의 손에 들어가는 것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강조한 바 있다. 원씨의 입장 변경을 두고 이상한 추측들이 나돌았다.

88년 영문과로 입학한 이주엽이
북 치며 퇴진을 요구한 김문기
김문기는 93년 구속까지 됐지만
거짓말처럼 지난해 총장으로 귀환
‘해직 교직원 이주엽’은 다시 북 친다

교육부가 1년 만에 해임한 김문기
정문 앞 총동창회 건물로 가끔 나와
그러나 이사회는 김문기가 장악
학생들은 9월부터 수업거부 시작
언제 끝날지 모르는 투쟁이다

상지대 사태 일지
상지대 사태 일지

08학번 윤명식의 기억

분규 사학에서 학생들은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매일 갈등과 학내 정치에 노출된다. 김문기의 측근과 비측근 교수가 누군지, 누가 김문기 복귀를 위해 뛰는지. 학내 구성원들이 둘로 쪼개진 상황에 직면한다. 학생들의 선택은 두가지 정도로 나뉜다. 학내 갈등에 애써 무관심한 채 4년을 채우고 졸업하거나 갈등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김문기가 돌아온 지난해 윤명식은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윤씨는 김문기 퇴진 운동을 벌였고 총학생회 간부 4명은 학교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지난해 12월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법원은 지난 5월 윤씨가 학교를 상대로 제기한 무기정학 취소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작년 9월인지 10월인지 학교에 오니 김문기 반대 농성장 천막이 다 부서졌어요. 직원들이 부순 거죠. 부총장이 지나가길래 ‘왜 부수었냐’고 항의를 했어요. 그러자 저보고 ‘개새끼’라고 해서 화가 나 따졌습니다. 뺨을 맞은 적도 있습니다. 지난해 9월 말에 학생회 차원에서 ‘인성교육’ 거부를 결정했고 이를 알리려 총장실을 찾아갔습니다. 김문기 총장이 있다고 해서 본관 2층 회의실에 가는데 갑자기 회의실 방문이 열리더니 최아무개 인문사회과학대 학장이 제 뺨을 때렸어요. 저희 과 교수님이셨죠. 최 교수가 20만원을 인문사회과학대 교학부장에게 맡겼다고 찾아가라고 했습니다. 받질 않자 제 어머니에게 찾아가 또 20만원을 내밀더랍니다. 어머니는 받지 않으셨어요.”

김문기를 반대하는 총학생회는 늘 압력 또는 회유를 받아야 했다. 김문기 복귀 운동을 하라는 협박을 받은 총학생회 간부가 양심선언을 한 뒤 일신상의 안전을 이유로 숙박시설을 전전하기도 했다. 2008년 7월15일 김명식 총학생회장이 김문기 측근 ㄴ씨로부터 매수와 협박을 받았다며 녹취록을 공개했다. “나랑 장난하냐? 너희들이 어떻게 하든 상관없어. 근데 지금과 같이 이런 형태로 가면 설립자님(김문기) 복귀하시고 교수들 고소, 고발할 때 너네 같이 넣어버리는 거야. 그리고 총학생회 다시 뽑아도 돼. 내가 너희랑 같이 살자고 얼마나 너희들에게 얘기를 했어?” 녹취록에서 이 발언을 한 측근 ㄴ씨는 지난해 김문기가 상지대 총장으로 복귀하면서 총무부장으로 채용됐다.

1986년 10월 총장실 바닥에
“가자 북의 낙원으로”라는
종이 뭉텅이가 뿌려졌다며
학생들 연행한 사건은 결정판
10월마다 진상규명 집회 열려

세상에 상지대 비리를 알리고
분규사학이라는 의제 던지며
수십년간 학교 거쳐간 사람들
침묵하지 않고, 피켓을 들고
331일간 농성했던 이들 기억하자

88학번 방정균 교수의 기억

“혹자는 말합니다. 여생 말년을 조용히 살지 왜 풍파를 일으키는가. 이젠 힘들 만도 하지 않은가. 또 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런 열정이 솟아나오는가. 놀랍다.”(자서전 <상지정신> 82쪽)

한의대 1기생으로 88학번인 방정균 교수는 지난해 7월9일 파면됐다. 학교가 내세운 이유는 학생지원처장으로 근무할 당시 학생 지도비 70만원을 부당 사용한 것 등이다. 그러나 소명 절차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방 교수가 입학한 1988년. 당시 상지대는 대학으로서의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등록금이나 학비는 다른 학교만큼 냈어요. 등록금 납입 전에 보통 장학금을 주잖아요. 그런데 우리 학교만 학기 말에 줘요. 이자 수익을 좀더 내기 위해서. 실습이 이뤄져야 하는데 받은 실습이 없어요. 의대는 예과 2학년부터 해부학, 조직학 실습이 있어야 하는데 카데바(해부실습용 시신)도 현미경도 없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봐야 하는데 없어요. 교양서적도 없어요. 나중에 언론 보도를 통해 봤는데, 헌책을 무게 단위로 마구 사다가 꽂아놨다고 하더라고요. 학교 식당은 먹지 못할 정도였어요. 김문기의 친인척인 김아무개가 운영한 식당이었는데 지푸라기가 나오기도 했고. 총학생회가 자치 식당을 만든다고 텐트를 세워놓으면 교직원들을 시켜서 부수었습니다.”

학교는 김문기의 친인척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사촌동생인지 육촌인지 김아무개씨가 교무과장을 맡으며 모든 걸 좌우했습니다. 교무과장이 ‘전체 교수회의 열어’ 하면 열렸습니다. 경리도 실권자였고요. 김문기 사위가 교수를 때린 적도 있습니다. 김대식 교수협의회 대표가 학내 민주화 투쟁을 열심히 했는데 시내에서 김문기 사위가 주먹으로 때려 코뼈를 주저앉혔어요. 결국 고소는 하지 못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1986년 10월 전두환 정부 치하의 엄혹하던 시절 학내 비리를 규탄하던 120여명의 학생이 북한 추종자로 조작된, 이른바 용공 조작 사건이 벌어졌다. 의문의 사건에 학생들의 분노가 더해져 매년 10월마다 용공 조작 사건을 규명하라는 외침이 학교에 울려 퍼졌다. 사건의 발단은 1986년 7월26일 <경향신문> 사회면 기사였다. “지난해 말 실시된 문교부 감사 자료에 따르면 사립대인 강원도 ㅇ시 ㅅ대의 경우, 지난 3월 20개 학과 전임 및 시간강사를 채용하면서 행정학과 시간강사를 지원한 신모(30)씨 등 3명에게 1000만원을 요구했다. 이 가운데 2명은 1000만원을 내고 시간강사에 채용됐으나 신씨는 이를 거절해 채용에서 제외됐다. (줄임) ㅅ대는 지난해 문교부에서 시간강사 채용률이 전체 교수진의 45%가 넘어 감사에서 지적받자 일부 시간강사를 전임으로 대체하고 빈자리 시간강사를 채용하면서 이 같은 거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들은 1986년 9월부터 약 40일간 총장실을 점거하고 ‘교수 프리미엄 사건’의 진상을 밝히라고 촉구했다. 경제학과 박정원 교수가 그해 10월14일을 떠올렸다. “학생들이 점거 농성 중인 대학에서 교수들보고 집에 가지 말고 연구실에 대기하라고 했습니다. 다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해서 시내로 나갔습니다. 다시 대기하라기에 삼삼오오 모여 연구실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해서 나갔습니다. 학생들이 농성 중인 총장실 1층 바닥에 종이 뭉텅이가 뿌려진 걸 수거했다고. ‘가자! 북의 낙원으로’ ‘전두환은 김일성 수령님과 타협하여 즉각 통일하라’고 쓰인 종이였어요. 학생들이 2층에서 농성 중인데 1층에 발견된 것이니 학생들이 유인물의 범인이라고. 경찰이 와서 학생 120여명이 다 잡혀갔어요. 조사를 받는데 혐의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아 풀려났어요. 당시 <동아일보>에서 그 유인물이 교무처 복사기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거기까지 보도되고 끝난 겁니다.”

용공 조작 사건은 한 교직원의 뒤늦은 양심고백으로 의문이 풀렸다. 경영학과 89학번 홍석진씨는 끊임없이 용공 조작 사건을 파헤쳤고 자신의 아버지가 사건 기록을 갖고 있다는 한 동문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홍석진씨는 기록을 확보하기 위해 동문의 아버지를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문이 상지대에 퍼지면서 곧 진실이 드러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이런 상황에서 압박감을 받은 탓인지 교직원 김아무개씨가 1986년 북한 관련 유인물을 작성하고 뿌렸다는 양심선언을 한다.

교직원 김씨가 기자회견에서 양심선언을 한 다음날인 1999년 10월13일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채택돼 나타났다. 이재오 의원이 질의를 던진다.

이재오: (김문기의 사위) 황○○ 등 세 사람 중 증인을 불러 놓고 직접 증인에게 지시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김씨: 일부 부분적으로 다릅니다.

이재오: 박아무개 학장은 뭐라고 그랬어요?

김씨: 학생들 소요가 도저히 끝나지 않는데 소요를 제지시키기 위해 공권력을 불러들여야 되겠는데, 경찰에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그것은 학내 문제니까 학내에서 해결해야지 달리 방법이 없다고 답이 온다. 그래서 세 분이 논의를 끝냈는데 황○○ 실장 이야기가, 화염병 제작을 이미 해놨다는 거예요. 박 학장께서 뭐라 했느냐 하면 화염병 만드는 것 가지고는 도저히 경찰 병력이 들어올 수 없고, 지금 학생들이 빨간 깃발이라든지 이런 것을 많이 쓰는 것으로 봐서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 하면서 불온 유인물이라도 만들어서 살포해야 경찰이 들어오지 않겠느냐는 식의 이야기를 거기서 했습니다.

이재오: 이사장이 증인을 불렀지요?

김씨: 예, 불렀습니다.

이재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냐고 하면서 ‘수고했다’ 그러고 돈 100만원을 주었지요?

김씨: 네, 그렇습니다.

이재오: 100만원이 수표였습니까?

김씨: 현찰이었습니다.

이날 김문기도 국정감사장으로 불려나갔다. 김문기는 “100만원을 준 것은 용돈 삼아 준 것으로 기억하고 그 외의 조작 사건은 없다”는 취지로 말했다. 상지대 설립 이후 용공 조작 사건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331일간의 투쟁과 김문기의 구속

“나는 떳떳합니다.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기에 당당합니다. 마음에 거리끼는 행동을 하지 않았기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줄임) 오직 상지대학교의 발전을 위해 분골쇄신하고 있을 뿐입니다.”(자서전 <상지정신> 43쪽)

1993년 3월29일 김문기가 구속됐다. 대학 재단 탈법 운영을 수사하던 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출두 요구를 했으나 여당 3선 의원인 김문기가 응하지 않았다. 이날 밤 9시30분께 서울 서초구 반포동 팔래스호텔 옆 궁전다방에 친지를 만나러 나오던 김문기를 잠복 중인 검찰 수사관이 붙잡았다. 그의 나이 62살. 지역구 국회의원 김문기는 한국 비리 사학의 상징으로 전국에 알려졌다.

방 교수는 김문기가 구속된 날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학교 곳곳에서 만세 소리가 이어졌고 눈물을 흘리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축제 분위기였어요. 학교가 이제 제대로 되겠구나 했어요. 교수들이 더 기뻐했습니다. 원주 우산동 술집에 사람이 넘쳐났습니다.”

당시 상지대에선 경제학과 박정원 교수의 부당 해직에 대해 항의하고 이사장 퇴진을 요구하는 농성이 331일간 지속됐다. 교수들은 밤마다 농성장을 지켰다. 1992~93년 격렬했던 그들의 밤, 당직자들은 매일 일지를 기록했다. 당시 당직 일지를 들춰 보았다.

1992년 10월8일 총학생회 소속 학생 50여명이 교육부를 방문해 국감 요구를 하다가 전원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10월10일 <강원일보>에 김문기의 재산을 가늠할 만한 종합토지세 관련 기사가 났다. 김문기 이사장은 도내에 총 97만7000㎡ 토지를 소유해 2414만원의 종합토지세가 부과됐다. 10월29일 오후 1시30분 200명으로 시작한 학생 집회는 3시경이 되자 700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날 집회를 마친 후 시내로 진출한 학생들은 우산동 철다리 밑에서 경찰에 포위되었고 길바닥에 누워 결사적으로 저항했다.

11월19일 학생들이 대학본부를 완전 점거하고 재단 이사장 퇴진 운동을 본격화했다. 12월8일 박아무개씨가 신임 총장에 선임됐다. 신임 총장은 단과대학 시절 장기간 학장을 역임하며 1983~85년 134명의 학생을 부정입학시켰고 교수를 상지대와 (상지)전문대에 이중 발령해 1986년 교육부 정기 감사 때 해임됐던 인물이다. 12월9일 학생들은 단식을 시작했다. 김창환 총학생회장 등 학생회 임원들이 재단 이사장 퇴진을 조건으로 한 자퇴결의서를 쓰고 학과별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2월11일 <조선일보>에 입시부정 40년사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983~85년 134명의 부정입학이 일어났다. 3월22일 <중앙일보>에 이사장 부동산 투기가 보도됐다. 민자당 의원인 김문기가 총 재산 185억원으로 신고했는데 대지가 전국에 3만6000여㎡, 임야가 전국 11곳에 146만여㎡, 건물은 서초동 3개, 인사동 3개 등 서울 시내에만 9개, 주택은 서울 강릉 원주 등 9개였다.

교수들은 김문기의 구속 이후에도 농성을 풀지 않았다. 농성 331일째인 1993년 7월22일, 당직 일지의 마지막 페이지는 이렇게 끝난다. “마지막 농성장 당직 임무를 철저히 마치며. 마지막 당직 일지를 기록함에 감회를 느끼며, 331일째 당직 일지 기록을 마칩니다. 그동안 수많은 역사 현장을 마음속에 깊이 그려 넣으며, 어려운 시련의 순간들도 경험하게 됨을 감사할 뿐입니다. 1993년 7월22일.”

방정균 교수는 상지대 역사에서 공짜로 얻은 민주화는 없었다고 했다.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사정 개혁으로 김문기를 구속시켰지만 민주화의 봄이 갑자기 찾아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김문기가 구속된 이후에도 (교육부는) 기만적인 이사회를 구성하고 우리가 민주적으로 뽑은 총장을 몰아내려 했습니다. 학생들이 서울을 오가며 다시 투쟁했고 총장이 제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교육부는 총장을 해임한 이사회를 전원 교체하였습니다.”

김문기씨가 총장에 취임한 2014년 이후 교직원 3명, 교수 4명이 해임·파면되고 학생 4명이 무기정학됐다. 학교에서 쫓겨난 상지대 영문과 88학번 출신 교직원 이주엽(왼쪽부터), 한의학과 88학번 방정균 교수, 법률행정학과 08학번 윤명식씨가 지난 5일 ‘수업 거부’를 알리는 종이가 붙은 강의실 복도에 섰다. 세대가 다르지만 학교에 대한 이들의 기억에는 공통점이 많다. 이들은 사학 분규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학교를 다녔다. 강재훈 선임기자
김문기씨가 총장에 취임한 2014년 이후 교직원 3명, 교수 4명이 해임·파면되고 학생 4명이 무기정학됐다. 학교에서 쫓겨난 상지대 영문과 88학번 출신 교직원 이주엽(왼쪽부터), 한의학과 88학번 방정균 교수, 법률행정학과 08학번 윤명식씨가 지난 5일 ‘수업 거부’를 알리는 종이가 붙은 강의실 복도에 섰다. 세대가 다르지만 학교에 대한 이들의 기억에는 공통점이 많다. 이들은 사학 분규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은 학교를 다녔다. 강재훈 선임기자

21년에 걸친 그의 집념

“나는 빼앗겼던 상지대학교를 되찾기 위하여 기회가 될 때마다 진정을 넣었습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자서전 <상지정신> 161쪽)

김문기는 1년4개월을 복역하고 1994년 8월15일 출소했다. 부정입학 등의 혐의는 유죄가 선고됐으나 10억원대 공사금 횡령은 2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김문기는 정권의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다고 자서전에서 주장한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막 들어서고 사정 1호로 내가 지목되었습니다. 학생 등록금으로 부동산 투기, 공금 횡령, 업자들로부터 거액 수뢰 등의 죄목을 덮어씌운 것이었습니다. 학생 7명을 부정입학시킨 사실을 사전에 보고받았다고 인정하면 학교 관계자 수십명은 석방시켜주겠다는 (검찰의) 조건이었습니다. 당연히 그러한 사실이 없었습니다. 내 사람을 볼모로 압박해온 것이었습니다. 모든 혐의를 나 혼자 지기로 결심했습니다. 조사를 받던 교직원과 교수들은 모두 돌려보내달라고 하였습니다. 주변에서도 (검찰이) 제시해 온 타협을 수용하지 말고 끝까지 버텼으면 무죄 석방되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습니다.”(자서전 <상지정신> 39쪽)

그가 자서전에서 밝혔듯 김문기의 집념은 지칠 줄 몰랐다. 1993년 김문기와 상지대의 인연은 서류상으로 정리됐지만, 학교는 김문기의 부재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체육학과 등 일부 학생으로 구성된 ‘상지대학교의 정상화를 위한 모임’(상정모)이 1995년 2월 활동을 시작해 학교 재단에 대한 비방 광고를 신문에 게재하고 김문기 지지 활동을 벌였다. 김문기 지지 학생이 김문기를 반대하는 교수를 죽이겠다는 협박 사건도 발생했다. 1999년 9월20일 비가 몹시 쏟아지는 날, 김문기 복귀를 주장하는 체육학과 최아무개 등 학생 20~30여명이 연구실에서 나오는 경제학과 서정석 교수를 학교 밖 사거리까지 둘러업고 2㎞를 행진했다. 학생들은 서 교수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원주경찰서는 서 교수를 협박한 학생 두명을 구속했다.

지역 어르신들도 김문기 복귀에 동원됐다. “원주시 노인복지대학이 서울 관광을 시켜주겠다며 원주시 관내 노인 900여명을 소집했다. 이들 중 200여명을 상지대 정상화를 이룩하자는 교육부 앞 시위에 동원시켜 논란이 일고 있다. A아파트 노인정 김모(67)씨는 무료로 관광을 시켜준다고 해놓고 갑자기 방향을 틀어 데모 대열에 합류시켰다고 폭로했다.”(<내일신문> 원주판 1998년 11월30일)

교육부 장관도 김문기를 두둔했다. 김덕중 교육부 장관은 1999년 7월29일 취임 두달 만에 상지대 이상희 이사장과 김찬국 총장, 김문기를 교육부로 불렀다. 김 장관은 “사립대학에는 주인이 있어야 발전할 수 있고, 그 주인은 설립자이다. 상지대도 설립자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했다. 발언이 알려져 논란을 빚자 김 장관은 이를 부인했다. 정작 김문기는 김 장관이 이런 발언을 했다고 기자들에게 알렸다. 김 장관은 이 발언 등을 이유로 결국 취임 7개월 만에 물러났다.

임사이사 체제로 운영되던 상지대는 2003년 정이사 체제를 갖추며 안정화의 길을 걷는 듯했다. 교육부의 허가를 받은 상지대 임시이사들이 정이사를 선임했다. 분규 사학 최초였다. 2007년 상지대가 발간한 <상지학원의 어제와 오늘>을 보면, 상지대는 김문기 이사장이 구속되기 직전인 1992년보다 교원 확보, 장학금 수혜율 등에서 발전한 것으로 확인된다. 조교 인원은 92년 0명에서 137명, 교수 수는 144명에서 237명, 교원 확보율은 44.3%에서 72.4%로 성장했다. 장학금 수혜율도 7.2%에서 28.4%로 올랐다.

한국 비리 사학의 상징

상지대는 한국 비리 사학의 상징적 학교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이 현직 여당 의원인 김문기를 구속하면서 분규 사학이 학내 문제만이 아닌 사회적 문제로 의제화됐다. 2003년 교육부가 파견한 임시이사가 최초의 정이사를 선출했다. 김문기가 제기한 임시이사의 정이사 파견 무효 소송에서 대법원이 2007년 원고 승소 판결함으로써 다른 분규 사학의 설립자, 또는 종전이사들이 학교로 복귀할 수 있는 물꼬를 텄다. 이 판결은 사학재단이 설립자, 또는 종전이사의 사유재산이라는 인식을 남겼지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사학의 공공성에 대한 기대가 높다.

상지대는 김문기가 1993년 김영삼 정권의 사정 1호로 지목되면서 한순간에 알려졌다. 그러나 상지대의 비리를 알리고, 더 나아가 분규 사학이라는 의제를 한국 사회에 끊임없이 던진 것은 수십년간 이 학교를 거쳐간 이름 없는 사람들이었다. 침묵하지 않고 피켓을 들고, 서울로 상경해 지하철 곳곳에 재단 비리를 알리는 유인물을 돌리면서 관심을 촉구하며, 1992~93년 331일간의 철야농성을 했던 교수, 학생들이었다.

08학번 윤명식씨 등 학생 2명은 지난 6일 업무방해 혐의로 춘천지방법원 원주지원 법정에 섰다. 검찰은 100만원 벌금형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상지대가 분규사학임을 고려해 벌금 50만원을 선고했다. 윤씨는 애써 어두운 표정을 지우려 했다. 선고가 끝나고 그에게 상지대에 온 걸 후회한 적 없느냐고 물었다.

“대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겪었어요. 자리에 눈이 멀고 영혼을 파는 교수, 학생을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만났습니다. 그런데 상지대에 온 걸 후회한 적이 단 한번도 없어요. 세상사의 많은 면들을 알게 되었고 분노하면 사람들이 모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어요. 요즘 같은 세상에서 모이자, 모이자 하면 안 모이잖아요. 그런데 수많은 사람이 김문기 한 사람 때문에 엮이게 되고 모이고 동료가 되었습니다. 바라는 건 비리 없는 사회예요. 부모님이 피땀 흘려 번 등록금을 객관적으로, 중립적으로 쓸 이사들이 오는 게 소원입니다.”

원주/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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