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24일 청와대에서 열린 8차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많은 국민이 희생을 하고 나서 통과를 시키겠다는 것이냐, 이것은 정말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기가 막힌 현상들”이라며 23일 저녁부터 시작된 야권의 테러방지법안 반대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비판했다. 박 대통령은 국회를 비판하며 수차례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고 한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발언과 달리 국외에서 반대 법안 표결 등을 저지하기 위한 필리버스터는 ‘있을 수 없는 현상’이 아니다.
미국의 차기 대선에 나선 민주당 버니 샌더스 후보와 공화당 테드 크루즈 후보는 모두 ‘필리버스터 경험자’다. 샌더스 상원의원(버몬트)은 2010년 12월10일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이 합의한 부자 감세 연장안에 반대해 8시간35분 간 연설했다. 69살의 적지 않은 나이로 긴 시간 동안 인상적인 연설을 한 그는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크루즈 상원의원(텍사스)도 ‘오바마케어’(건강보험 개정 관련 법안)에 반대해 2013년 9월24일부터 다음날까지 21시간19분 동안 필리버스터를 했다.
가장 최근의 필리버스터는 지난해 5월20일 랜드 폴 상원의원(켄터키·공화당)이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권한을 강화하는 ‘애국자법(Patriot Act)’ 개정안에 반대하며 진행한 10시간31분짜리 연설이다. 폴 의원은 2013년 3월6일에도 존 브레넌 백악관 대테러·국토안보 보좌관의 중앙정보국(CIA) 국장 임명에 반대하며 12시간52분 연설을 한 바 있다.
미국 의회 사상 가장 긴 필리버스터는 1957년 8월28일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사우스캐롤라이나)이 민권법(Civil Rights Act)에 반대해 24시간18분간 펼친 연설이다. 그는 필리버스터 당일 사우나로 몸속의 수분을 미리 빼내 화장실을 덜 찾도록 대비했고, 연설 도중 미국 각주의 선거법과 조지 워싱턴의 퇴임사를 읽으며 시간을 끌었다.
우리나라의 국회법에는 “모든 발언은 의제 외에 미치거나 허가받은 발언의 성질에 반하여서는 아니된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필리버스터 도중 서먼드처럼 의제와 무관한 법조문을 읽거나, 드라마 <어셈블리>의 한 장면처럼 노래를 부르며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된다.
누리꾼들은 미국 등 국외 사례를 들어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박 대통령의 주장을 반박했다. 포털 네이버 사용자 app*****는 “대통령님, ‘필리버스터’가 왜 영어인지는 생각해보셨습니까? 아니, 그 전에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 유력 대선후보 주자들 경력도 모르고 계십니까?”라고 꼬집었다. 트위터 사용자 @mad*****은 “대통령께서 야권의 필리버스터에 ‘어떤 나라에도 없는 기막힌 현상’이라고 하셨다는군요. 어떤 나라에도 없는 현상은 아닙니다. 미국에서 수시로 발생합니다. ‘어떤 나라에는’ 없는 현상이 맞습니다. 예를 들면 북한이라든가…”라고 지적했다.
의제와 무관한 잡담 따위로 시간을 끌기도 하는 국외 일부 사례와 견줘 우리나라 의원들의 연설을 칭찬하는 누리꾼도 있었다. 네이버 사용자 lee*****은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지. 주제에 벗어난 이야기를 하면 안 되기에 장시간 논리적으로 발언해야 하니까 저렇게 대단할 수 없지”라며 박 대통령의 발언을 재해석했다.
필리버스터의 법적 근거인 ‘국회선진화법’이 18대 국회 회기 마지막날인 2012년 5월2일 새누리당의 주도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던 점을 환기하는 이도 있었다. 국회선진화법 입안 당시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회장이었다. 원혜영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박근혜 대통령이 ‘야당의 필리버스터는 그 어떤 나라에서도 있을수 없는 기막힌 현상’이라 하셨군요. 필리버스터는 법에 허용된 것입니다. 법을 무시하고 아무런 대책이나 기업인들의 기본적 동의도 없이 개성공단을 폐쇄한 ‘기막힌 대통령’이 하실 말씀은 아닙니다”라고 지적했다.
조승현 기자 sh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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