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토요판] 커버스토리 / 경제제재 이후 단둥을 가다
북한 제재 이후 단둥 르포 -제2회
대북사업가들에게 닥친 숨은 위기
북한 제재 이후 단둥 르포 -제2회
대북사업가들에게 닥친 숨은 위기
하나의 강 위에 두 개의 다리가 흐른다. 중국 랴오닝성 단둥에서 북한 신의주로 이어지는 중조우의교(왼쪽)로 하루 두 차례, 사람과 물자가 이동한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을 받아 끊어진 압록강단교(오른쪽)는 역사적 관광지다. 신의주에 닿을 수 없는 다리 위로 노란색 점퍼를 입은 남자와 어린아이가 뛰어다녔다. 단둥의 한국인 대북사업가들은 중조우의교를 건너지 않고서 북한을 넘나든다. 북한 공장에 주문을 넣고 중국을 거쳐 한국으로 상품을 보낸다. 1988년 노태우 전 대통령이 기존의 적대적 대북정책에서 방향을 튼 북방정책을 발표하면서 대북사업가 1세대가 태어났다. 개성공단 개설 전부터 시작된 단둥에서의 남북경협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를 거치며 활발해졌다. 한반도 밖에서 남북 사람이 술에 취하고, 어깨동무를 하며,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2010년 천안함 침몰 이후 5·24 조치가 나왔다. 개성공단을 제외한 남북경협이 금지된 것이다. 2016년 3월8일 한국 정부는 북한산 상품 반입 금지 등을 포함한 독자제재안을 발표했다. 통일부의 장려를 받아 작은 통일을 꿈꾸던 그들은 5·24 조치로 단둥을 떠났고, 남은 이들마저 최근 정부의 독자적 대북 제재 소식을 듣고 다시금 절망했다. 이들이 만들어낸 상품은 적발 대상이다. ‘숨은 존재’여야 하는 대북사업가들을 사진에 담을 수 없어 이들의 얼굴을 일러스트로 형상화했다.
▶ 한국 정부가 제3국을 우회한 북한 상품 적발 등을 포함한 독자 제재안을 발표한 3월8일, 단둥에서의 여정이 시작되었습니다. 북한 국영기업의 해외 주재원, 옷공장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 노동자들, 조선족 대북사업가와 보낸 시간을 1회에 전했습니다. 한국인 대북사업가들은 지금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을까요? 한국, 북한, 중국의 시차는 각각 30분입니다. 단둥의 시간 속에서 세 나라의 시차가 허물어지고, 국경을 넘나드는 이들의 삶이 압록강을 흐릅니다.
한국인 대북사업가 C씨는 늘 같은 오리털 점퍼를 입고 다닌다. 아직은 봄기운이 완연하지 않은 중국 랴오닝성 단둥의 압록강변, 매일 밤 사업가들과 남북 정세를 논하던 술자리에도 그는 항상 동료 대북사업가가 만든 점퍼를 입고 나타났다. 3월8~16일 머문 단둥에서 그가 사업가들과 술을 마시는 음식점마다 찾아다녔지만 그의 겉옷은 언제나 같았다.
그가 음식점에 도착해 옷걸이에 걸어두는 한국 브랜드의 오리털 점퍼는 ‘메이드 인 차이나’다. 평양의 옷공장 노동자들이 미싱대 위에 천을 굴려 만든 점퍼엔 ‘메이드 인 차이나’ 라벨이 붙어 있다. 그 점퍼는, 통일부가 최근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관세청, 경찰청 등과 함께 합동회의를 열어 단속하기로 한 대상이다. 통일부는 지난 29일 10개 기관이 참석한 합동회의에서 북한산 물품 위장반입 차단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개성공단을 제외하고 모든 남북 경제협력을 금지한 2010년 ‘5·24 조치’ 이후 지난해 10월까지 적발된 북한산 물품의 우회 반입 사례는 71건.
C씨(60대·기사 속 인물은 취재원 보호를 위해 나이와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를 처음 만난 지난 9일 오후. 그는 자택에서 담배를 태웠다. 한국 정부가 제3국을 우회한 북한 상품 단속 등을 뼈대로 하는 ‘독자적 대북 제재안’을 발표한 다음날이었다. 5·24 조치 이후 6년간 내리막길을 걸었던 한국인 대북사업가들은 이제 일을 완전히 접어야 할지 고민이다.
“(한국인) ○○○ 사장이 ‘평양 오더’를 제일 많이 했잖아. 실질적으로 자기가 평양 공장에 일감 주는 거고 형식상으론 중국 회사 통해서 하는 건데. 그걸 알고 정부가 한인들 쑤시더라고. 나한테 전화 오고. ○○○ 사장이 정면 돌파하자, 이실직고하고 가자고 한 게 작년이라고. 그때 (영사관 등의) 분위기는 간접교역 하라고 했어. 이번에 정부가 독자 제재안 발표하면서 작년에 털어놓은 게 칼날이 되는 거야. 오픈된 거야.”
상품은 국경을 자유로이 넘어
개성공단 외에 현실로 존재하는 남북 교역은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통계에서 증발된 남북 교역은 대북사업가 C씨가 입은 오리털 점퍼처럼, 평양산 제품마다 숨어든다. C씨가 입은 한국 의류 브랜드는 중국에 하청을, 중국 회사는 평양에 재하청을 준다. 평양 옷공장에서 ‘메이드 인 차이나’ 라벨을 달고 중국으로 나온 제품을 한국 소비자들이 산다. C씨의 오리털 점퍼는 남북 교역이 아닌, 한-중 교역 수치에 잡힐 것이다.
한국어를 공유하는 조선족, 북한 화교, 북한 사람, 한국인들의 삶과 국경 읽기를 고민하는 인류학자 강주원 박사(경남대 객원연구위원)는 8박9일 가운데 나흘을 동행했다. 그는 단둥에서 중조 무역에 동참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자 주체인 한국 사람에 주목했다. “중조 국경무역에는 통계에 잡히지 않은 회색지대 즉 비공식 영역이 있다. 중조 무역의 수치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북한 사람과 북한 화교, 조선족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단둥에서 중조 무역에 동참하는 또 하나의 주인공이자 주체는 한국 사람이다. 단둥의 국경무역에서 삼국이 참여할 수 있는 조건과 현실을 이해하려면 단둥에서 북한으로 수출되거나 반입되는 물건의 원산지와 유통 흐름을 짚어봐야 한다. 단둥 사람은 원산지와 관련해 국경을 허무는 방식을 알고 있다. 물건의 원산지 혹은 생산지가 표기된 라벨을 주목하기보다는 중조 무역의 주체와 유통 흐름 그리고 한국 제품이 북한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 강주원, 글항아리, 2013년)
북한 신의주와 중국 단둥 사이로 압록강이 흐르고, 중조우의교(압록강철교)가 두 곳을 연결한다. 하루 두 차례, 정해진 시간마다 화물과 사람이 중조우의교로 이동한다. 북한으로 넘어가기 전 세관에서 수속 절차를 밟아야 한다. 세관 옆으로 북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가게들이 즐비하다. 세관 옆 슈퍼마켓엔 한국 소주와 개성 소주가 나란히, 그리고 한국 화장품 브랜드 ‘페이스샵’ 클렌징 제품도 진열대에 오른다. 단둥의 가게엔 국경도, 가로막힌 남북 교역도 없다.
대북무역 사무실을 운영하는 조선족 K씨(50대)는 지난해까지 키 크는 한국 약을 평양 중산층에 팔았다. 한 통에 15만원짜리 약은, 자녀의 작은 키를 걱정하는 평양의 부모들에게 팔렸다. 한국 제품이 북한 세관을 통과할지 그에게 물었다. 조선족 K씨의 차는 세관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북한 주재원은 여기 단둥 생활을 끝내고 들어가면서 한국 엘지 세탁기를 사가던걸.”
“엘지 세탁기 들고 북한 갈 수 있어요?”
“원칙적으로 안 되지만, 안 되는 게 또 어딨어? 세관 통과할 힘이 다 되니까 갖고 들어가는 거지. 북쪽에 ‘맥심커피’도 다 있어. 평양 출장 갈 때 깜빡하고 커피를 기차에 놓고 내렸는데, 술을 마시니까 커피가 너무 당기는 거야. ‘커피 없어?’ 했더니 공장 직원이 당장 갖고 오던데? 저 세관 들어가는 물동량 좀 봐. 저걸 어떻게 다 뒤져? 화물, 가방 다 뒤져서 한국산 찾을 거야? 그리고 걸리면,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하면 되지. 주스 짜는 ‘휴롬’이 저기서도 좀 인기였는데 생각해 봐, 휴롬 생산 공장이 중국에도 있잖아. 원산지 개념이 대체 뭐야?”
중국 부품으로 한국산 제품이 만들어지고 글로벌 자본으로 한국 대기업이 굴러가는 현실, 상품에 국적을 매길 수 없는 지금, ‘북한산 제품’의 범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단둥에서 만난 대북사업가,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보따리 상인, 조선족 상인들은 이 질문에 저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응답했다.
지난 14일 오전. 수예 제품을 파는 가게의 조선족 사장은 한숨을 쉬고 있었다. 사람 손으로 원단에 꽃수를 놓는 수예를 오늘 단둥역에서 건네받았는데, 북한 사람이 안전 문제 때문에 이 장소에서 저 장소로 첩보 작전하듯 바꿨다는 것이다. 북한 당국의 허락을 받지 않은 밀무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평양 사람이 야생화를 수놓은 수예를 보여줬다. 이 수예 조각들을 다른 천에다 덧붙이면 지갑, 커튼, 식탁보 등 다양한 제품이 된다. “한국 한복집에서 쓰는 ‘손수’는 대부분 북한 것이라 생각하면 돼요. 한국산으로 절대 단가 못 맞추지.”
그날 골동품과 수예를 파는 또 다른 가게에선 한국인 보따리상이 조선족 사장과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기자 신분을 밝히지 않는 언더커버 취재였기에 단둥을 연구하러 왔다고 소개하자 보따리상은 잠시 놀다 가라고 했다. “여기서 산 수예나 도자기, 골동품은 한국에 팔 때 중국산이라고는 안 해요. 단둥에서 왔다고 해. 그럼 사는 쪽도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북한 사람들이 골동품상에 물건 팔러 스스로 찾아오는걸? 북한 사람들 연구하려면 여기 골동품 가게에서 한달 아르바이트를 해 봐. 북한 사람들 많이 만날 수 있을걸. 뭐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게 될 거라고. (조선족 사장을 향해) 이 아가씨 공짜로 일 시킬 생각 없어?”
문득 조선족 대북사업가 K씨를 통해 며칠 전 구매한 들깨의 원산지가 어딘지 궁금했다. K씨는 기다렸다는 듯 궁금증을 풀어줬다. “요즘 북한산 들깨가 많이 들어와서 중국 다른 지역에서 가공돼 수출된다고. 그럼 중국산이 되지. 한국이 북한산 가려낸다는데 북한 깨는 어떻게 해? 성분 검사 같은 걸 하면 나올 수도 있겠지만 그걸 어떻게 다 하냐고? 아, 당신이 산 깨는 (중국) 길림 거야. 길림 깨가 최고지.” 조선족 K씨는 말을 이었다. “한국 휴대전화 부품인 ‘밧데리 트랜스’의 30%는 중국, 70%는 북한산이야. 대한민국 제품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 성분은 모두 대한민국 거야?” K씨가 반문했다.
한국 같은 산업구조는 아니더라도 북한도 교역을 한다. “한국 사회가 가진 남북경협의 이미지는 북한에 대한 한국의 일방적 퍼주기식 관계라는 선입견이 강하다. 남북경협의 통계 금액 모두 비상업적 거래라는 편견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북경협에서 상업적 교역 대 비상업적 교역의 비중은 6 대 4 정도에서 2006년 이후 8 대 2 비중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 강주원) 북한산 제품을 제재한다는 판단의 옳고 그름을 떠나, 국경을 넘어 세계를 떠다니는 자본과 상품을, 상품 속 수많은 원자재와 노동력의 근원을 추적하고 차단할 수 있을까. 2012년 기준 북한 전체 대외 무역액 가운데 88%(68억달러)가 중국과의 거래다. 지난 30일 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가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중국 내수시장에 대한 한국의 총수출액은 1900억달러로 일본, 미국, 독일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북한은 중국과, 중국은 한국과 무역으로 깊이 엮였다. 중국을 연결고리 삼아 세 나라가 엮인 것이다. 정치가 무역을, 국가가 상품을 어느 층위까지 제한할 수 있을까.
휴대전화 해킹될 가능성
열어두고 사는 사업가들
가명으로 북한사무실에 전화
북한 주재원과 휴대전화 하니
한 시간 뒤에 국정원 연락와 1988년 노태우 전 대통령
남북대화 모색하는 7·7선언
대북사업가란 직업 등장
1990년 남북교류협력법 제정
대기업 상사들도 북한 투자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북한과 제일 많이 하는 무역이 무연탄인데 거래 단위가 크죠. 1만톤이면 130만달러예요. 요즘은 가격이 떨어졌지만. 대북 제재로 북한에 송금이 안 되니까 현금을 100달러로 007가방 가득 채우면 100만달러가 들어갑니다. 그렇게 거래하는데, 말이 쉽지 모험이에요. 북한은 무연탄 거래할 때 꼭 선금을 요구해요. 과거 무연탄 시장이 좋을 때 3, 4개월은 먼저 줘야 합니다. 줬는데 5·24 조치처럼 갑자기 (경제 교류가) 중단되는 경우가 생기죠. 지금 중국이 북한의 광물 수출 단속을 쉽게 못 하는 게, 갑자기 중단시키면 돈 물린 기업들은 어떡합니까? 한 회사에 100만달러, 많게는 1000만달러씩 물려 있어요. 그런 중국 회사가 40, 50개 된단 말입니다.”(A씨·70대) 단둥의 곳곳에선 밤마다 대북사업가들의 술자리가 이어진다. 한국, 중국, 북한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업가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3월3일(한국시각) 5번째 대북 제재 결의안 2270호를 채택한 뒤 중국이 어느 층위에서 북한 제재를 가할지 관심을 모았다. 지난 15일 밤 대북사업가 세 사람이 모여 술을 마셨다. 이 가운데 A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북방정책과 더불어 가장 먼저 대북사업에 뛰어든 인물이다. 대북사업가들은 한국의 대북정책 변화와 함께 성장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8년 기존의 적대정책을 전환해 펼친 북방정책이 대북사업가의 등장을 일깨운 계기였다.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라, 북한과 교역 및 경제협력 사업을 하려는 사람은 수출입은행을 통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남북협력기금이 1991년 조성됐다. 이즈음 대기업 상사들도 앞다퉈 대북사업에 뛰어들었다. 1989년 대기업 ㅇ상사에 ‘남북팀’이 만들어졌다. 이 팀의 초대 과장을 맡았던 A씨는 2004년 퇴직 뒤에도 중국인들과 대북사업을 이어가는 1세대 사업가다. 지난 15일 만난 A씨는 “대기업들이 말을 안 할 뿐, ㅇ상사도 ㅅ물산도 북한에 돈이 물려 있다”고 했다. 북한에 투자를 했다가 각종 대북 제재로 회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할 즈음 남북한 첫 공동투자로 중국 현지법인이 만들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기에도 남북경협은 장려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 초기만 해도 내륙기업(개성공단을 제외한 대북 기업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에 대한 지원 확대를 고려했다. 2008년 11월 이규창 통일연구원 부연구위원이 통일부 용역 결과 보고서로 낸 ‘남북교류협력 관련 제도 개선방안’을 보면, 남북협력기금 지원 및 투자, 조세 감면의 혜택만 받을 수 있을 뿐 개성공단처럼 폭넓은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내륙기업을 대상으로 지원 확대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2010년 5·24 조치 이후, 한국 사업가들이 담당하던 무역은 중국 국적의 조선족, 북한 화교 손으로 넘어갔다. 한국인 대북사업가 C씨는 “5·24 조치는 사실상 내국인 제재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했다. 북한산 제품은 ‘메이드 인 차이나’ 라벨을 달고 유럽·미국·중동 등으로 수출된다.
지난 3월3일, 유엔은 “북한이 무기 거래로 얻은 소득이 대량살상무기(WMD) 개발에 전용되는 것을 우려한다”며 무기 거래 금지, 북한행·발 화물 검색 의무화, 금융제재, 대외 교역 제재 등을 담은 안전보장이사회 2270호를 결의했다. 교역 제재 내용은, 북한의 석탄·철·철광 수출·공급을 금지하지만 민생 목적으로 대량살상무기와 관련 없는 경우는 수출을 허용했다. 무기와 관련 없는 북한산 상품은 제재 대상이 아니다. 한국 정부는 지난달 8일 독자 제재안을 발표하면서, 북한산 상품 반입 금지, 북한 식당 이용 자제 계도 등을 포함시켰다. 한국인 대북사업가들은 2010년 5·24 조치에 이어 한국 정부가 독자 제재안까지 발표하자, 더는 일거리를 찾기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5·24 조치 이후 단둥의 한국인은 이미 3000여명에서 1000명 이하로 떨어졌다.
노무현~이명박 정부 때 사업을 벌인 2세대 대북사업가 C씨. 평양에서 만든 오리털 외투를 입고 다니는 C씨의 삶을 들어봤다. 그가 걸어온 시간 속에 남북 경협의 과거부터 현재까지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대북사업가 C씨의 시간들
“고등학교 친구의 형님이 중국에 들어와 북한 사람들 접촉하면서 이 사업을 처음 하게 됐어. 대북사업 1세대였지. 나는 2세대쯤 되고. 1세대들은 금괴 밀수 이런 걸 했었지. 1990년대 초중반까지 하던 대북사업이란 것은 소설 같은 이야기였어.
1997년도인가, 회사를 그만두고 단둥에 왔다가 우연히 그 형님을 만나고 술을 마셨어. 그리고 한국에 들어왔는데. 혹시 박경윤씨라고 들어봤어? 대북사업이 한창 잘될 때, ‘대북사업의 선구자들’이란 방송 다큐멘터리에도 나온 분인데. 미국 시민권자야. 1980년대에 북한과 처음 접촉한 사람이지. 그 양반이 북한에 고려상업은행(최초의 민간은행)도 설립하고 북한 오리농장에도 투자했어. 정주영 회장이 소떼 방북할 때 북한 쪽 물꼬 튼 역할을 한 사람도 박경윤씨야.
그 형님이 박경윤씨와 한국에 들어와서는 날 부른 거야. 박경윤씨가 날 보더니 ‘몸은 튼튼하지?’ 물었어. 단둥으로 일하러 오라는 거지. 그래서 단둥에 들어와 대북 관련 일을 하다가, 내가 하던 또 다른 사업에 문제가 생겨서 한국으로 돌아왔어. 그 뒤에 하던 일을 다 정리하고 다시 단둥으로 간 때가 2000년 7월. 그 형님이 중국에서 김치 사업, 수산업 등을 했는데 사무실에 평양 사람들이 늘 왔다 갔다 했지. 당시 북한산은 무관세로, 식품·수산품은 남포항~인천항 직항으로 나갔어. 통일부 기금도 받았지. 나도 일하면서 평양 사람을 꽤 사귀었어. 그 가운데 최아무개라고, 옷 공장을 하던 평양 사람이 있어.
형님이 사업을 사실상 그만두면서 나도 회사를 하나 차렸어. 그즈음 대기업 의류회사를 퇴직한 ㄱ을 알게 됐는데 그 친구가 대기업 의류회사에서 받은 오더를 내가 다시 평양 공장에 맡겼지. 2008년, 2009년이 절정이었는데 연간 80만장까지 생산했어. 그 의류 브랜드의 홈쇼핑 매출 중 70%를 우리가 생산했으니까. 북한에 주는 가공비를 생각해봐. 1장에 50센트만 해도 40만달러, 1달러면 80만달러야. 나도 돈 벌고, ㄱ은 꽤 벌어서 빌딩도 샀어.
5·24 조치 때문에 ㄱ은 베트남으로 떠났어. 베트남 공장에 투자했지. 딱 두 시즌 만에, 육칠십억 깨먹고 한국으로 왔어. 베트남이란 동네가 까다로운 데야. 북한 노동자들의 퍼스낼리티와도 달라. 중국과도 다르고. 그 친구가 그 일로 정신병원까지 갔어.
북한과 교역할 땐 무관세인데, 지금은 평양산 옷이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으로 나가니까 관세를 내야 해. 경쟁력 떨어지니까 주문이 당연히 줄지. 내가 지금껏 단둥에 남은 건, 이 제재가 언젠가 풀릴 거라 생각해서야. 지금 대북무역 주체는 중국인이 됐어. 한국인의 직원이었던 사람, 하청했던 사람이 ‘따로반’(큰 사장)이 되었지. 199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인의 피땀이 서리지 않은 북한 공장이 어딨어? 한국적 상품 관리를 위해 싸웠어. 북한에선 당시 상품이란 개념이 없었어. 옷은 꿰맨다는 개념이지. 다림질도 잘하고 포장을 잘해야 하잖아. 한국인들 투자도 많이 들어갔어. 통일부 등을 통한 것은 공식 투자이고. 개미군단의 투자도 많았어. 그냥 설비를 북한에 주는 거야. 중국 회사 이름으로 10만달러어치 설비를 줘. 설비를 주고 북한에 지불해야 할 가공비에서 옷 1장당 10센트씩 깎아서 투자비를 회수하는 거지. 그건 통계 안 잡히는 투자야.
남북관계 좋았을 때는 북한 사람 대놓고 만났어. 노래방에서 어깨동무하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도 함께 불렀어. 그런 때도 있었지. 한국 주방용품 가게에 구매력 있는 평양 사람들이 와서 쿠쿠 밥솥 같은 것들도 엄청 샀어. 한국 제품이 일본보다 싸고 좋다는 거야. 나는 이런 식으로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통일은 정치가 하겠지만, 그 과정에 민간이 흘러야 하는 거야. 민간은 놔두기만 하면 경제논리에 따라 흘러간다고. 누가 강자야? 결국 돈 있는 놈이 강자지. 흡수통일? 그럼 북한은 내부 단결 더 할 수도 있어. 아무것도 없는 우리나라도 외국에서 의류 가공비 받아가며 봉제공장 돌리면서 일어섰어. 저쪽 사람들은 안 먹고 안 쓰고 그러냐? 다 핵개발에 들어는 거야? 사회주의 세금은 우리 세금과 달라. 일정 부분 내야 돼. 핵개발에도 쓰지만 복지에도 써. 시스템은 후졌지만 북한이 무상으로 하는 것들이 있잖아.”
북한 금괴 밀수하는
1세대 대북 사업가들의
영화 같은 이야기들
2세대 사업가들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정책 따라 투자 장려받다 2010년 5·24조치로
경협 중단, 무기한 휴업상태
3월 한국 독자 제재 발표
중국 통한 북한공장과의
우회 무역도 더욱 어렵다 단둥에서 펼쳐지는 첩보전쟁 “지금은 평화를 이야기할 때가 아니란 겁니다. 평화를 위한 임무를 받고 왔나요? 폭풍이 휘몰아쳐야 합니다. 누가 평화를 이야기하면 북쪽이 쓸어버려요. 조선하고 평화를 말한다는 것은, 이야기 같지도 않아요. 이젠 안 돼. 남쪽에서 특사가 와도 이젠 안 돼.” 지난 14일 북한 기업 해외 주재원과의 술자리는 몇 차례 아슬아슬한 고비가 이어졌다. ‘대표’라고 불리는 그는 1998년부터 출장으로 중국을 드나들었고 현재는 단둥에서 중국인 직원들을 두고 있다. 기자라는 신분을 정식으로 밝히고 일식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러나 교감에 의한 대화라기보다는 긴장에 의지한 질문과 대답의 연속이었다. 남북 긴장 국면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내게 계속 물었다. 그는 한국의 대북제재를 세차게 비판했다. 북한 국영기업 해외 주재원의 역할은 다양하다. 정치적 목적으로 정보 수집을 겸하는 주재원도 있다. 장기 해외체류 중인 다른 주재원을 감시하는 역할도 있다. 그는 오늘 밤, 기자와의 만남을 혼자 결정하고 나온 것일까? 상부에 보고하고 나온 걸까? 나중에 상부에 보고하려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대화가 녹음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올수록 피해야 할 말들이 더 많았다. 다음날인 15일 대북사업가 3명이 모인 술자리에 합석했다. 이 가운데 P씨(60대)는, 전날 내가 만난 북한 주재원과 오늘 낮에 말다툼을 했다고 한다. “저쪽은 (전쟁) 한번 해보자는 거야. 내가 그랬어. ‘너희들이 핵무기로 다 된다? 미국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미국 우습게 보지 말라’고 그랬어. 북쪽은 청와대나 한국 시설만 폭격하고 미국 군은 안 한다 그거야. 그래서 내가, ‘미국은 겁나지?’ 그랬어. 너희들이 예전에 핵무기 만들 때 (우리 대북사업가들한테는) 우리 민족을 위해 핵을 발사하는 게 아니라 미국 때문에 하는 거라 해 놓고는. 그래, 내가 웃었어. 북쪽은 세계 정세를 너무 몰라. 대한민국에서 핵 가지려면 벌써 가졌고, 만들려면 일년 안에 만들어. 일본은 수개월 만에 만들어. 안 만드는 이유? 세계평화주의라는 게 있잖아. 우리가 만들고 일본이 만들고 대만이 만들고 다 들고일어나봐. 어떻게 되는 거야? 북이 한번 해봐야겠다고? 뭘 해봐? 너 죽고 나 죽자는 이야기 아냐. 근데 저쪽은 그렇게라도 하겠다는 거야. 지금 북쪽은 군중심리란 게 있어. 지금 다 같이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야. ‘와와와~’ 하는데 혼자 안 하면 바보야. 난 걱정스러운 게, (북쪽이 군중심리에) 떠밀려갈까봐 그게 제일 걱정이야.” 민심의 온도는 남쪽과 북쪽이 다르다. P씨는 노무현 정부 당시 평양 공장에 드나들 때 북한엔 언론 자유가 왜 없냐는 말을 했다가 보위부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 다른 대북사업가 C씨는 당시 이야길 꺼내며 농담을 던졌다. “그때 잘못됐으면 평양에서 못 나왔지.” 대북사업가들은 북한 정보의 원천이다. 첩보 전쟁이 벌어지는 단둥의 한국인 대북사업가들에게 영사관, 국정원 등은 북한 정보를 묻는다. 정보가 많은 인물은 때로 위험하다. 대북사업가들은 휴대전화로 긴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대북사업가들은 자신의 휴대전화가 도청될 가능성을 늘 깔고 산다. P씨는 평양에 들어간 북한 주재원과 휴대전화 통화를 한 지 1시간 뒤에 국정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적도 있다. 한번 만나자는 제안이었다. 북한과 경제적으로 깊이 연루된 사업가일수록 정보원 노릇을 하진 않는다. 대방(북한 무역 파트너를 일컫는 말)이 다칠 수 있는 사안은 발설하지 않는다.
현대판 불온분자 드나드는 급소
대북사업가들만이 국경과 경계를 넘나드는 것은 아니다. 압록강에는 경제 교류, 물류 이동과 함께 다양한 북한 이야기들이 흐른다. 지난 13일 대북사업가와의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H씨(30대)는 해커를 찾아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한참 해커를 만날 때는 러시아에서도 만나고 중국 하얼빈에서도 만났어요. 진짜 제대로 된 해킹팀을 만나긴 했어요. 북한에서 온 한 팀. 5, 6년 전에. 같이 베이징도 가고 했지. 그래서 걔들 동선을 알아요. 단둥에선 (해킹) 테스트만 하고 사실 여기선 해커들이 활동 안 해요. 주로 베이징 호텔에서 하는데. (랴오닝성) 선양(심양)에 가면 칠보산 호텔을 가지. 전용선 따기 위해서. 중국 아이피 숫자가 100으로 시작해요. 사설 아이피는 50으로 시작하죠. 이건 중국 정부 허가 안 받은 중국의 사설 아이피예요. 북한 애들은 중국 정부가 차단을 안 하는 사설 아이피를 찾아야 되기 때문에 호텔을 가는 거예요.
한국에서 어느 날 자고 일어났는데 돈 되는 해킹 아이템이 생각나는 거예요. (아이템이 뭐냐는 질문에) 그건 말할 수는 없어. 그건 물어보지 말고. 게임사이트, 도박사이트 해킹해서 돈을 벌 수도 있는 거고. 한국 정부에서도 알 건데 온라인으로 해커를 찾아 일종의 뻐꾸기를 날리는 신호가 있어요. 아는 사람만 아는, 그 신호를 잡을 줄 아는 해커가 있는 거죠. 뻐꾸기를 전세계에 날리면 연락이 와요. 나는 연락처를 안 남기는데 알아서 내 메일로 답이 와요.
한국 해커 말고 중국이나 북한 해커를 만나려는 건, 한국 해커는 아쉬운 게 없어서 컨트롤이 안 돼. 여기 조선, 중국 애들은 컴퓨터 머리는 뛰어나도 해킹으로 돈 만드는 재주가 없잖아요. 그래서 나는 돈 되는 아이템을 내고, 그걸 구현할 기술자 해커를 만나고 싶었던 거지. 지금은 컴퓨터로 일 안 해, 전혀요. 다 옛날이야기예요. 한국에서 이야기하면 거짓말이라고 할 수 있겠죠. 미쳤다고 할 거예요, 아마.”
“조선인 가운데는 불온분자도 숨어 있고 반대로 국내 공작을 위해서 만주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독립단들도 많았다. 단동이야말로 이들 통로 가운데 급소와도 같은 곳”. 소설 <강남몽>에서 황석영 작가가 일제시대 단둥을 그린 대목이다. 북한 해커를 찾아 단둥으로 건너왔다는 남자는 황석영의 소설을 비틀어 현대판 불온분자, 공작단일지도 모르겠다.
단둥에선 모든 것이 합법과 불법, 편법의 경계를 넘실거렸다. 경계는 허물어지고, 국경의 형태도 묘연해지는, 어쩌면 그래서 숨통처럼 뚫린 곳이 아닐까.
▶[북한 제재 이후 단둥 르포 -제1회] 얼어붙지 않은 무역도시, 곰인형을 품고 자는 사람들
단둥/글·사진 박유리 기자 nopimuli@hani.co.kr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mayseoul@naver.com, 그래픽 송권재 cafe@hani.co.kr
압록강의 밤이 빛으로 반짝인다. 해가 질 무렵 중조우의교는 단둥에서 신의주 방향으로 하나둘씩 불이 켜지고 어둠에 잠길 때쯤이면 찬란한 빛을 낸다. 다리의 빛깔은 밤이 깊어가면서 빨강, 파랑, 초록색으로 시시각각 변한다. 사람들은 강변을 걷고 운동을 한다.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어둡고 얼어붙은 이미지로 보도되는 압록강의 밤은 아름답다. 사진 박유리 기자
중조우의교를 건너기 전 출국 소속을 밟아야 하는 세관 가까이 상점들이 즐비하다. 세관 인근 슈퍼마켓에는 북한 개성소주와 한국의 참이슬이 나란히 진열대 위에 있다. 사진 박유리 기자
8박9일간 머문 호텔에서 내려다본 단둥의 풍경이다. 저 멀리 압록강과 신의주가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 박유리 기자
남북 교역액과 북-중 교역액의 변화 추이
열어두고 사는 사업가들
가명으로 북한사무실에 전화
북한 주재원과 휴대전화 하니
한 시간 뒤에 국정원 연락와 1988년 노태우 전 대통령
남북대화 모색하는 7·7선언
대북사업가란 직업 등장
1990년 남북교류협력법 제정
대기업 상사들도 북한 투자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 “북한과 제일 많이 하는 무역이 무연탄인데 거래 단위가 크죠. 1만톤이면 130만달러예요. 요즘은 가격이 떨어졌지만. 대북 제재로 북한에 송금이 안 되니까 현금을 100달러로 007가방 가득 채우면 100만달러가 들어갑니다. 그렇게 거래하는데, 말이 쉽지 모험이에요. 북한은 무연탄 거래할 때 꼭 선금을 요구해요. 과거 무연탄 시장이 좋을 때 3, 4개월은 먼저 줘야 합니다. 줬는데 5·24 조치처럼 갑자기 (경제 교류가) 중단되는 경우가 생기죠. 지금 중국이 북한의 광물 수출 단속을 쉽게 못 하는 게, 갑자기 중단시키면 돈 물린 기업들은 어떡합니까? 한 회사에 100만달러, 많게는 1000만달러씩 물려 있어요. 그런 중국 회사가 40, 50개 된단 말입니다.”(A씨·70대) 단둥의 곳곳에선 밤마다 대북사업가들의 술자리가 이어진다. 한국, 중국, 북한의 경계를 넘나드는 사업가들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3월3일(한국시각) 5번째 대북 제재 결의안 2270호를 채택한 뒤 중국이 어느 층위에서 북한 제재를 가할지 관심을 모았다. 지난 15일 밤 대북사업가 세 사람이 모여 술을 마셨다. 이 가운데 A씨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북방정책과 더불어 가장 먼저 대북사업에 뛰어든 인물이다. 대북사업가들은 한국의 대북정책 변화와 함께 성장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이 1988년 기존의 적대정책을 전환해 펼친 북방정책이 대북사업가의 등장을 일깨운 계기였다. 남북교류협력에 관한 법률에 따라, 북한과 교역 및 경제협력 사업을 하려는 사람은 수출입은행을 통해 대출을 받을 수 있는 남북협력기금이 1991년 조성됐다. 이즈음 대기업 상사들도 앞다퉈 대북사업에 뛰어들었다. 1989년 대기업 ㅇ상사에 ‘남북팀’이 만들어졌다. 이 팀의 초대 과장을 맡았던 A씨는 2004년 퇴직 뒤에도 중국인들과 대북사업을 이어가는 1세대 사업가다. 지난 15일 만난 A씨는 “대기업들이 말을 안 할 뿐, ㅇ상사도 ㅅ물산도 북한에 돈이 물려 있다”고 했다. 북한에 투자를 했다가 각종 대북 제재로 회수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통해 6·15 남북공동선언을 발표할 즈음 남북한 첫 공동투자로 중국 현지법인이 만들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시기에도 남북경협은 장려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 취임 초기만 해도 내륙기업(개성공단을 제외한 대북 기업을 지칭할 때 쓰는 용어)에 대한 지원 확대를 고려했다. 2008년 11월 이규창 통일연구원 부연구위원이 통일부 용역 결과 보고서로 낸 ‘남북교류협력 관련 제도 개선방안’을 보면, 남북협력기금 지원 및 투자, 조세 감면의 혜택만 받을 수 있을 뿐 개성공단처럼 폭넓은 지원을 받을 수 없는 내륙기업을 대상으로 지원 확대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중국 국적의 북한 화교가 운영하는 아리랑식당. 창문 너머로 한복 입은 여성들이 보여 북한식당으로 착각할 수 있다. 사진 박유리 기자
1세대 대북 사업가들의
영화 같은 이야기들
2세대 사업가들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정책 따라 투자 장려받다 2010년 5·24조치로
경협 중단, 무기한 휴업상태
3월 한국 독자 제재 발표
중국 통한 북한공장과의
우회 무역도 더욱 어렵다 단둥에서 펼쳐지는 첩보전쟁 “지금은 평화를 이야기할 때가 아니란 겁니다. 평화를 위한 임무를 받고 왔나요? 폭풍이 휘몰아쳐야 합니다. 누가 평화를 이야기하면 북쪽이 쓸어버려요. 조선하고 평화를 말한다는 것은, 이야기 같지도 않아요. 이젠 안 돼. 남쪽에서 특사가 와도 이젠 안 돼.” 지난 14일 북한 기업 해외 주재원과의 술자리는 몇 차례 아슬아슬한 고비가 이어졌다. ‘대표’라고 불리는 그는 1998년부터 출장으로 중국을 드나들었고 현재는 단둥에서 중국인 직원들을 두고 있다. 기자라는 신분을 정식으로 밝히고 일식집에서 그를 만났다. 그러나 교감에 의한 대화라기보다는 긴장에 의지한 질문과 대답의 연속이었다. 남북 긴장 국면에 대한 정치적 입장을 내게 계속 물었다. 그는 한국의 대북제재를 세차게 비판했다. 북한 국영기업 해외 주재원의 역할은 다양하다. 정치적 목적으로 정보 수집을 겸하는 주재원도 있다. 장기 해외체류 중인 다른 주재원을 감시하는 역할도 있다. 그는 오늘 밤, 기자와의 만남을 혼자 결정하고 나온 것일까? 상부에 보고하고 나온 걸까? 나중에 상부에 보고하려는 걸까? 알 수 없었다. 대화가 녹음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올수록 피해야 할 말들이 더 많았다. 다음날인 15일 대북사업가 3명이 모인 술자리에 합석했다. 이 가운데 P씨(60대)는, 전날 내가 만난 북한 주재원과 오늘 낮에 말다툼을 했다고 한다. “저쪽은 (전쟁) 한번 해보자는 거야. 내가 그랬어. ‘너희들이 핵무기로 다 된다? 미국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 미국 우습게 보지 말라’고 그랬어. 북쪽은 청와대나 한국 시설만 폭격하고 미국 군은 안 한다 그거야. 그래서 내가, ‘미국은 겁나지?’ 그랬어. 너희들이 예전에 핵무기 만들 때 (우리 대북사업가들한테는) 우리 민족을 위해 핵을 발사하는 게 아니라 미국 때문에 하는 거라 해 놓고는. 그래, 내가 웃었어. 북쪽은 세계 정세를 너무 몰라. 대한민국에서 핵 가지려면 벌써 가졌고, 만들려면 일년 안에 만들어. 일본은 수개월 만에 만들어. 안 만드는 이유? 세계평화주의라는 게 있잖아. 우리가 만들고 일본이 만들고 대만이 만들고 다 들고일어나봐. 어떻게 되는 거야? 북이 한번 해봐야겠다고? 뭘 해봐? 너 죽고 나 죽자는 이야기 아냐. 근데 저쪽은 그렇게라도 하겠다는 거야. 지금 북쪽은 군중심리란 게 있어. 지금 다 같이 한번 해보자는 분위기야. ‘와와와~’ 하는데 혼자 안 하면 바보야. 난 걱정스러운 게, (북쪽이 군중심리에) 떠밀려갈까봐 그게 제일 걱정이야.” 민심의 온도는 남쪽과 북쪽이 다르다. P씨는 노무현 정부 당시 평양 공장에 드나들 때 북한엔 언론 자유가 왜 없냐는 말을 했다가 보위부 조사를 받은 적도 있다. 다른 대북사업가 C씨는 당시 이야길 꺼내며 농담을 던졌다. “그때 잘못됐으면 평양에서 못 나왔지.” 대북사업가들은 북한 정보의 원천이다. 첩보 전쟁이 벌어지는 단둥의 한국인 대북사업가들에게 영사관, 국정원 등은 북한 정보를 묻는다. 정보가 많은 인물은 때로 위험하다. 대북사업가들은 휴대전화로 긴밀한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대북사업가들은 자신의 휴대전화가 도청될 가능성을 늘 깔고 산다. P씨는 평양에 들어간 북한 주재원과 휴대전화 통화를 한 지 1시간 뒤에 국정원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적도 있다. 한번 만나자는 제안이었다. 북한과 경제적으로 깊이 연루된 사업가일수록 정보원 노릇을 하진 않는다. 대방(북한 무역 파트너를 일컫는 말)이 다칠 수 있는 사안은 발설하지 않는다.
‘고려거리’라고 쓰인 문으로 들어서면 단둥의 조선족 거리가 이어진다. 사진 박유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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