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 세월호부터 서울 구의역 19살 청년의 죽음까지, 고통과 슬픔에 천착한 철학자 김상봉에게 생각의 좌표를 묻다
홀로주체성/서로주체성
서양 정신은 존재의 주인을 ‘나’로 삼는다. 그들에게 자유는 ‘자기로부터 자기를 위하여 있음’이다. 거기에 타자를 향한 사랑, 참된 만남은 없다. ‘나’의 존재론, 자기고립이다.
김상봉은 이를 ‘홀로주체성’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서양 정신을 극복하기 위해 김상봉은 ‘서로주체성’을 주창해왔다. 나와 너의 만남, 서로 주체가 되고 서로 객체가 되는 만남을 통해서만 온전한 주체가 된다는 것. 고통과 슬픔 속에 부름과 응답이 이뤄질 때 참된 만남, 참된 주체가 가능하다는 것. ‘나’가 아닌 ‘우리’의 존재론이다. “삶의 진리는 만남이요, 자유는 본질에서 사회적이다.”
“약자를 죽여 생존하는 사회” 슬픔과 고통을 넘어 “참된 신성이 깃드는 자리인 인간성”을 이해하는 ‘고통의 황금률’을 김상봉은 이미 20세기 말에 적었다. “고통은 때때로 인간을 깊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간을 메마르고 이기적이 되게 만들기도 한다. (…) 어리석고 비열한 사람은 사소한 고통 앞에서도 자기의 무사안일만을 염려하지만, 지혜롭고 선량한 사람은 큰 고통 속에서도 자기보다 이웃의 고통을 염려하는 것이다. (…) 사람들이 큰 염려 없이 안락한 삶을 사는 곳에서는 모두가 비슷하게 친절하고 선량해 보이지만, 막상 위험과 고통이 닥쳐오면 참으로 선한 사람만이 인간의 긍지와 양심을 지킬 수 있다. 그런 까닭에 비범하고 위대한 선은 언제나 그만큼 큰 고통 속에서만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다.”(<호모 에티쿠스>·1999) 퍼내도 슬픔, 퍼내도 고통의 나라. 한국 사회 고통의 뿌리를 묻기 위해 광주행 고속열차를 탔다. 전남대 인문학관 앞 등나무. 푸른 이파리가 고통처럼 피고 얽혀 가득했던 6월14일. 고통의 깊이만큼 깊이 파인 얼굴, 작은 키 큰 정신. 김상봉을 만났다. 사건. 세월호에서 서울 구의역 19살 청년의 죽음까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생각의 좌표를 짚어준다면. “함석헌이 자주 한 말이 있다. 한국 사회 불행의 뿌리가 뭐냐고 물으면 ‘자기상실’, 그게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고. 왜 그런가. 한국 사회가 주체로서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집단이기 때문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거다. 말기적 현상이다. 한국 사회는 외적으로는 외세에 기생하고 내적으로는 희생양을 만듦으로써 지탱되는 사회다. 본래적 의미에서 ‘나라’라고 하는 걸 추구해보지 못했다. (김상봉은 5·18을 다룬 탁월한 논문 ‘그들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의 나라로’를 썼다.) 우리 모두가 같이 나아갈 방향이 없는 나라다. 언제든지 ‘변침’될 수 있는. 외부의 조종에 의해 순식간에 달라질 수 있는 나라, 그런 파국에 처할 수 있는 나라가 이 나라다. 이승만 시대에 외세 의존이 고착됐고 박정희 시대에는 외세 의존에 더해 약자의 희생 위에서 지배세력들이 생존을 확보하는 패러다임이 만들어졌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본질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 정확히 나타났다. 처음 들어선 민주정부가 힘없는 노동자들에게 ‘보답’한 것이 정리해고였다. 약자의 희생에 기초해 사회 안정을 확보한다는 패러다임에 근본적으로 손도 못 댔다. 그게 상징적으로 드러난 게 ‘세월호’다. 가만히 있는 것. ‘물’이 들어오는 걸 모른다. 개인이 주체로서 한 번도 교육받지 못했다. 그래서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는다. 선장이 배를 버리고 도망가는 것만큼 경악할 만한 일이다. 막상 ‘물’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살려고 발버둥친다. 그 아우성이 ‘강남역 사건’이다. 칼로 찌르는 것만 살인이 아니다. 공적자금 투입해서 자본가만 살리고 노동자들 쫓아내는 것도 다 살인이다. 우리 사회 전체가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죽임으로써 자기의 생존을 겨우 부지하는 사회다. 희생시킨다는 것은 언제나 폭력적인 것이다. 칼로 찌르고 목을 조르는 것만 살인이 아니다. 해고가 살인이다.” 김상봉은 칸트 연구로 독일 마인츠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귀국해서는 그리스도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로 있다 해직됐다. 민예총 문예아카데미 교장으로 일했고 2005년 전남대 철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문학비평가 이명원은 말했다. “김상봉의 철학은 한국적 현실의 비극성에 대한 윤리적 인간학에 가깝다. 동시에 김상봉의 철학은 오늘의 현실에서 드물게 ‘대지의 형이상학’ 또는 ‘땅으로 강림한 철학’의 가능성과 고투를 보여주고 있다.”(<말과 사람>·2008) 김상봉에게 철학은 대학 강단의 그 알량한 높이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유하고 움직이고 싸우고 응답하는 것, 그것이 그의 철학이다. 시작은 고통을 공유하는 것부터 윤리. 우리 사회의 고통을 대하는 윤리는 무엇인가. “지금까지 윤리는 다 개인윤리였다. 이마누엘 칸트가 대표적이다. 윤리에 대한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 함석헌은 말했다. 선과 악은 언제나 집단적으로 나타난다고. 홀로주체의 선악이라는 건 추상적인 관념 속에서만 있는 거다. 현실에서 선악은 언제나 서로주체다. 주체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우리가 공통적으로 처해 있는 악이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문제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바꾸려 하지 않고 ‘내가 무슨 힘이 있어?’라고 말한다. 모든 출발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생각의 주체성이다. 인간이 절망적인 상황에 묶여 있어도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한 데카르트는 2천 년 동안 믿어온 것을 묻고 의심했다. 현실을 보편적으로 인식하고 난 뒤 우리는 만나야 한다. 만나서 길을 같이 찾아야 한다. 만나서 같이 생각하고 형성해야 한다. 그 에토스(윤리)가 우리한테 결여돼 있다. 동학에서 5·18, ‘촛불’까지 우리는 해본 적이 있다. 그 점에서 한국 사회의 가능성을 폄하하면 안 된다. 지금 필요한 건 주인의식이다. 주체가 된다는 건 세계의 주인이 되는 거다. 분명히 주인의식을 가지고 시대정신을 만들어가겠다는 호연지기가 필요하다. 그게 윤리다.” 슬픔. ‘슬픔의 철학자’라고 일컬을 만큼 그동안 고통·슬픔을 깊이 천착해왔는데. “우리는 주체로서 살지 못했기 때문에 객체로 살아간다. 객체는 계속 당한다. 여기저기서 학대받는다. 그게 온 세상에 널린 게 ‘세월호’이고 ‘구의역’이다. 자기 속에서 쾌락을 느끼는 것도 다른 의미에서 수동성에 지나지 않는다. 행위(action)는 오직 형성하는 것이다. 형성은 자기 혼자 못한다. 반드시 같이 해야 한다. 세계 속에서 안심입명(安心立命)할 수 있는 집을 짓고 길을 닦는 것. 거기로 건너가기 위한 첫 단초가 고통의 공유다. 고통의 보편성의 바다로 나아가는 것, 불교식으로 말하면 고해(苦海)다. 어떤 경우에도 바다는 자기만의 것일 수 없다. 아픔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나 혼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식하면 비로소 그때 묻게 된다. 함석헌은 말했다. 모든 앎은 앓음이라고. 앓음이 보편성과 결합하는 순간 인식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앎이다. 나의 고통만이 아니라 모두의 고통이라는 걸 알 때 앎의 차원으로 간다. 고통이 중요한 건 아파할 때 그것이 우리를 참된 의미의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떻게 만나고, 더불어 연대해야 하는지 깨닫게 해주는 단초가 앓음, 아파하는 것이다.” 한국적 자본과 노동의 대립구도 해법 찾아야 김상봉이 보기에 법의 정신이 지배적인 것이 될수록 우리는 내적으로 고립된다. 참된 만남은 “고통의 공유, 고통의 교환, 서로에게 자기를 수동적으로 내놓는 용기”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리고 들어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이고 그에 응답할 때 우리는 비로소 홀로주체성의 골방에서 서로주체성의 광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응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들어야 한다고 김상봉은 강조한다. 고명섭 <한겨레> 기자는 김상봉의 철학을 ‘슬픔의 해석학’이라고 설명한다.(<만남의 철학>·2015) 김상봉은 말한다. “벗어나고 싶으니까 슬픔이고 고통이다. 자기동일성 속에서 자기에게 머무르고 자기를 확장하려는 슬픔은 슬픔이 아니고 우울증일 뿐이다.” 슬픔을 믿고, 슬픔에 정직하게 마주 서고, 슬픔에 응답해야 한다는 게 김상봉이 전하는 슬픔의 철학이다. 자본. 여전히 통제 불가능하다. 노동. 자본에 깔려 압사 직전이다. 비통한 이들의 현실은 개선 가능한가. “독재-반독재 구도는 이제 자본과 노동의 대립구도로 바뀌어야 한다. 다만 무시간적으로, 문맥 없이 자본의 문제를 의제화하는 건 경계해야 한다. <조선일보>가 정치에 대한 냉소를 씨 뿌림으로써 변화 의지를 꺾는 것이나, 진보 진영에서 끊임없이 자본주의 담론을 재생산한 결과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할 게 없네’라는 생각을 만드는 거나 똑같다. 지금은 19세기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노동의 대립구도가 아니다. 21세기 한국에서만 볼 수 있는 대립구도다. 지극히 한국적인 대립구도를 정확히 인식하고 분석해서 해법을 찾는 게 절체절명의 과제다. 인식의 주체성이 여기서 등장한다. 그 많은 사회과학자들 중 누가 재벌 문제, 한국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해 얼마나 현실적합적 인식을 가지고 ‘이것이 선결문제’라고 말하고 있나. 자기에 대한 무관심이 이토록 철저한 질병으로 자리잡은 나라가 세상에 또 없을 것 같다. 한국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라는 제2의 사회구성체론이 나와야 한다.” 언론. 과연 사회 개선에 이바지하고 있나. 저열한 호기심의 충족, 아니면 불합리한 사회구조의 은폐 수단 아닌가. “언론은 지속적으로 질문하지 않는다. 집단적 지성의 현실태가 언론이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게 잠들어 있는 지성이다. 질문하지 않고 조건반사적인 행태를 반복한다. 사건이 터지면 충격받고 슬퍼하지만, 문제의 근원을 묻고, 해결하기 위한 대안을 묻고, 여러 대안을 공론장에서 매개하는 일을 안 한다고 본다. 세월호 이후 강남역·구의역 사건까지 오는 동안 언론이 무엇을 지속적으로 의제화했는가 하고 물으면, 없다고 봐야 한다. 우리의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재벌을 해체하고 경제를 민주화할 거냐다. 지금 한국 사회는 ‘재벌자본주의 쓰나미’ 속에 익사하는 상황이다. 가만히 있지 않으려면 거기에 답을 해야 한다. 삼성 문제, 노동권과 노동자 경영 참여 문제…. 언론이 과연 10년, 20년 전과 앞으로 10년, 20년 뒤를 생각하는 역사의식이 있는 것일까. 즉자적, 조건반사적으로 사건·사고에만 대응한다. 언론의 종말을 말할 만하다.” 한국 현실 진단하는 책을 읽자
김상봉 교수는 연대를 위해서 한국 현실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말하는 책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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