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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조선인 ‘75년 애환’도 포클레인이 밀어버렸다

등록 2016-06-29 20:22수정 2016-06-30 15:12

[오늘 르포] 일본 내 조선인 ‘마지막 징용촌’ 우토로 마을 철거 시작

1941년 교토 군용 비행장 건설 동원
일 패망 뒤 한국 정부한테도 방치된 채
판자 덧댄 허름한 집서 침수로 고생

일 퇴거요청 알려지며 한국에서 모금
철거 뒤 공적주택 지어 살게 됐지만
재일조선인 역사 흔적없이 사라지게돼
“내 집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지난달 임시거주지로 이사한 강춘자 할머니가 27일 오후 일본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 마을에서 `우토로 마치즈쿠리(마을 만들기)' 공사가 본격 시작되며 맨 처음 헐리게 된 자신의 집을 찾아 살펴보며 아쉬워하고 있다.
지난달 임시거주지로 이사한 강춘자 할머니가 27일 오후 일본 교토부 우지시 우토로 마을에서 `우토로 마치즈쿠리(마을 만들기)' 공사가 본격 시작되며 맨 처음 헐리게 된 자신의 집을 찾아 살펴보며 아쉬워하고 있다.
반쯤 부서진 지붕 아래 앙상한 나무 벽과 기둥이 맨살을 드러냈다. 자식들이 뛰어놀고 철마다 초록 가득 피워내던 작은 마당은 성마른 포클레인에 자리를 내주었다. 일본 교토부 우지시 이세다초 우토로 51번지, 일본 내 마지막 조선인 징용촌인 우토로 마을이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우리 정부 지원금과 한일 시민사회 모금액을 더해 구입한 땅에 일본 정부와 교토부, 우지시가 공적 주택 등을 짓는 ‘우토로 마치즈쿠리(민관협치 마을 만들기)’ 사업이 장마철을 피하려 예정보다 한 달께 앞당겨진 지난 23일 본격적으로 시작됐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해체되고 있는 이 집은 1943년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온 뒤로 마을을 떠나본 적 없던 강춘자(76) 할머니의 집이다.

“새집도 좋지만 마음은 아직도 여기(우토로)에 있지요.”

강춘자 할머니는 지난달 중순 차로 25분 떨어진 임시거주지로 이사했지만, 장보기와 ‘마실’을 핑계로 우토로 마을을 자주 찾는다. 우토로의 유일한 전후 1세대 생존자인 강경남(92) 할머니도 “내 집이 없어진다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나 강 할머니도 알고 있다. 공사는 계속 진행될 것이고 할머니의 집은 사라질 것이다. 예정대로 ‘우토로 마치즈쿠리’ 사업은 진행되고 있는데 주민들의 마음에는 왜 근심이 가시질 못하는가.

강춘자 할머니의 동생 도자 씨(오른쪽)와 다가와 아키코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대표가 27일 오후 맨 처음 철거 공사가 시작된 강춘자 할머니 집을 들여다보고 있다.
강춘자 할머니의 동생 도자 씨(오른쪽)와 다가와 아키코 ‘우토로를 지키는 모임’ 대표가 27일 오후 맨 처음 철거 공사가 시작된 강춘자 할머니 집을 들여다보고 있다.
마을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김수환 미나미구 동포생활센터 대표는 “우토로 마을의 역사성이 배제된 채 불량주택 개선 사업으로만 진행될 수밖에 없는 현 상황”을 근본적인 원인으로 지적했다. 1941년 일본 정부가 교토 군용 비행장을 건설하기 위해 재일조선인 1300여명을 동원하며 자연스레 형성된 우토로 마을은 1989년 닛산차체로부터 토지를 구매한 서일본식산이 주민들에게 강제 퇴거를 요구하며 토지명도 소송을 제기해 쫓겨날 위기에 처했던 곳이다. 설상가상으로 일본 대법원은 2000년 퇴거 결정을 내렸지만, 소식이 알려지며 한일 시민들이 우토로 마을 보존을 위한 모금운동에 나섰고 한국 정부까지 지원에 나서 문제 해결의 물꼬를 텄다. 우여곡절 끝에 모금액으로 우토로 마을의 약 3분의 1 크기인 땅 2000평을 매입했지만 환율 변동과 땅값 상승의 암초를 만나 예상보다 면적도 줄여 땅도 겨우 산 마당에 건축비 마련은 요원했다. 그래서 주민들과 이들을 돕던 시민사회단체들은 일본 행정부를 설득해 이곳에 공적 주택을 짓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당장 주민들의 살 곳을 마련하는 일도 벅찬 상황에서, 재일조선인이 겪어낸 애환을 담고 있는 우토로 마을의 원형을 일부라도 지키자는 요청은 처음부터 의제에 포함되지 못했다. 주민들을 돕던 일본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도 사업 무산을 우려하는 마음에 일본 행정부와의 협상에서 ‘역사’는 한마디도 꺼내지 말라고 조언했다. 반성 없는 일본의 역사 외면이 우토로 마치즈쿠리를 통해 재일조선인의 흔적 지우기로 나타난 것이다.

앞으로 약 4~5년에 걸쳐 1차와 2차로 나누어 진행되는 공사가 완료되면 우토로 주민들은 새로 지어질 공적 주택(아파트)에 입주해 살게 된다. 계획대로라면 그곳에는 강제징용 독신자들의 숙소로 1980년대 중반까지 사람이 살았던 ‘한바집’도, 마을회관 ‘에루화’도 없을 것이다. 활주로에 쓰일 흙을 퍼내느라 주변 일본인 거주 구역보다 지대 자체가 낮아져 잦은 침수로 고생하고, 흙바닥에 판자 한 장씩 덧대가며 완성한 우토로 주민들의 집은 그 자체로 이들의 굴곡진 삶을 담아낸 역사책이다. 하지만 이 또한 새 우토로에는 없다.

하루 일을 마친 포클레인이 멈추고 해가 진다. 짙은 어둠과 침묵 속에 묻혀가는 우토로 마을처럼 우리 아픈 역사의 한 장이 소멸되고 있다.

우토로/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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