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지분을 100% 출자했다고 했다. 그 신문사를 찾아가 '디지털 전략'을 배울 예정이었다. 창간(1703년)한 지 300년 하고도 13년이 더 지난 신문이었다. '반신반의'했다. 뻔한 자기자랑이나 변명만 늘어놓는다면 따져 물을 작정이었다. "국가정책을 홍보하는 것에 대한 자괴감은 없냐?"고. 언론진흥재단 '2016 KPF 디플로마-디지털 저널리즘' 교육 일정 중 하나였다. 오스트리아의 일간지 비너 자이퉁(Wiener Zeitung)을 찾아간 날(6월14일)이었다.
"환영.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매일 신문."
비너 자이퉁 아카데미의 교장인 볼프강 레너 박사의 프리젠테이션이 시작됐다. '언제 창간했고, 정부로부터 언제 독립했고, 수익은 어디서 나오는지'…. 예측 가능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날만 세번째 방문지였다. 일행들이 슬슬 지쳐갔다. 그때 레너 박사가 "영상을 하나 보여주겠다"며 스피커를 만졌다.
의미가 무엇인지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영상이었다. 아마추어들의 작품이라고 했다. 비너 자이퉁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는 영상 공모전을 열어 선정한 것들이라고 했다. "한번 더 보여드릴까요?"라고 묻고는 다시 틀었다. 10초짜리 영상이라 다시 보는 데 부담은 없었다.(여러분도 다시 보시길)
따분하게 느껴지던 레너 박사의 '강연'에서 '얘기가 되는'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비너 자이퉁은 정기 독자가 꾸준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동시에 "인터넷 독자도 늘고" 있었다. 50대 이상의 독자들에겐 종이신문이, 젊은 독자들에겐 모바일이나 인터넷 신문이 잘 먹히고 있었다. 이런 천국같은.
천국의 감동을 음미하려는 찰나, 다시 레너 박사가 "그럼 또 영상을 하나 보실까요"라며(물론 독어로), 또 다시 알 듯 모를 듯한 10초짜리 영상이 이어졌다. 물론, 이번에도 반복 재생.
2010년대 중반인데 정기 독자가 유지되는 신문. 2010년 중반인데 인터넷 독자가 늘어나고 있는 신문. 그 신문사에서 일하고 있는 박사가 부러웠다. 아시아에서 온 '탐방객'에 신이 난 박사가 샘나 물었다.
"종이냐 디지털이냐를 떠나 사람들이 점점 글로 된 기사를 읽지 않고 있다. 그래서 당신들도 저런 영상들을 만든 거 아닌가? (앞으로 어쩔 거냐?)"
비너 자이퉁에서 운영하는 '자전거 스튜디오' 사진 박현철
바보같은 질문에 대한 답은 이랬다.
"신문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글을 읽는 문화가 쇠퇴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학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신문을 더 읽게 할 수 있는지 자문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할 역할이 있다. 그래서 과학 기사 같은 것을 많이 싣는다. 스포츠를 주로 다루는 다른(상업적인) 신문들이 하지 않는 일이다."
참 바람직한데 교과서같은 답이다. 상업적 언론이 하지 않는 일을 사실상 '국영' 신문이 한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쉽나. 상업언론도 자기 이익에 따라 정부와 '짝짜꿍'하는 세상인데.
그러고 보니 앞서 방문했던 오스트리아 공영방송(ORF: The Austrian Broadcasting Corporation)에서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 "민간 방송이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한다" "소수자를 위한 방송을 해야 한다" "콘텐츠가 좋으면 많이 볼 것이다".
이들은 '국가가, 공공이 운영한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우리와 다르구나, 라고 생각할 찰나, 다시 레너 박사가 "영상 하나 보실까요?" 한다. 틈을 주지 않는다.
잔잔한 감동을 곱씹을 기회는 박사가 친절하게 보여준 빨간색 영상에 묻혀버렸다. 그 순간 '아 박사는 지금 우리들 상대로 비너 자이퉁을 각인시키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다행히 이번엔 박사가 '방해'하지 않았다) 돌이켜보니 박사가 무슨 얘길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메모를 봐야 생각난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국가에서 가져왔다는 영상 속 빨간색과 비너 자이퉁이라는 이름은 생생하게 남았으니, 박사의 프리젠테이션은 완전 성공한 셈이다.
'300년도 더 된 신문도 30분 만에 하는 브랜드 각인을 30년도 안 된 젊은 우리는 잘 하고 있는 걸까. 확산이네 유입이네 하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했지 제대로 된 전략을 고민해 본 적이 있는 걸까. 뭣이 중헌 지도 모르고 살았구나'라고 생각하는 찰나, 레너 박사가 또.... 이하 생략.
비엔나/박현철 기자 fkcool@hani.co.kr
PS>>국외 연수 중에도 일행 중 누군가는 "다른 덴 벌써 기사가 나오던데, 돌아와서 쓰면 너무 늦어버리는 거 아니냐"고, 회사로부터 '쪼임'을 당했다. 뭣이 중한 지도 모르고…. 그런데 남욕할 게 아니었다. 며칠 뒤 메신저로 이것저것 묻는 나를 향해 팀 동료가 핀잔을 줬다. "한국 일에 관심 좀 줄이고 오스트리아에 집중하세요. 왜 이래? 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