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해군기지의 민간인 진입 차단 펜스와 강정의 연대자들이 남긴 멧부리 박 응원 문구(“멧부리 박 삼춘 반갑수다!”). 이문영 기자
▶ 6월29일 제주에도 장마가 올라왔습니다. 비가 많이 내려 강정천(제주 서귀포시 강정동) 물이 불었습니다. 이날 오전 강정천에서 노란색 튜브 하나가 바다로 떠내려갔습니다. 예전엔 서건도에 가닿거나 범섬 너머로 흘러갔을 튜브가 빙글 돌더니 해군기지 입구로 들어갔습니다. 기지 건설 뒤 해류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튜브가 ‘노란 경로’를 그리며 확인시켰습니다. 튜브의 경로는 해군기지 준공으로 뒤바뀐 강정의 변화를 상징합니다. 그 경로는 해군기지의 강정바다 파괴 과정을 감시해온 한 남자의 ‘기록 투쟁’으로 확인됐습니다. 거대한 국책사업 앞에 버티고 선 왜소한 한 남자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박인천씨.”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해군기지 초소에 설치된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자신을 쫓아다니며 촬영하는 시시티브이를 그도 동영상 카메라를 꺼내 찍었다. 기지를 감시하는 그를 시시티브이가 감시했고, 자신을 감시하는 시시티브이를 그가 감시했다. 기지 안에서 양복을 입은 사람이 나왔다.
“박인천씨, 간첩이에요?”
처음 보는 사람이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뭐, 간첩?”
격한 언쟁이 5월27일 멧부리(제주도 서귀포시의 강정천과 바다가 만나는 지역 일대)의 공기를 찢었다.
“부대 내부 사진 찍어서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잖아요. 간첩질 하는가 싶어서 우리가 감시하는데, 왜요? 나중에 어떻게 되는지 봐요.”
“협박하는 거야?”
“당신 집도 없잖아. 텐트 치고 생활하면서. (시시티브이로) 낚시하러 온 민간인은 안 찍어. 당신처럼 불순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 찍는 거지.”
“방산비리(전·현직 해군 장성 무더기 기소)나 일삼는 해군이.”
“간첩질 하는 것보단 나아. 증거수집 중이야. 기다려봐. 당신들 때문에 민군복합공동시설로 바뀐 거야.”
해군 관계자는 그의 감시를 ‘간첩활동’으로 규정했다. 제주해군기지의 ‘민군복합형관광미항 변질’이 강정 주민과 평화활동가들의 반대 탓이라고도 했다. 감시와 감시가 충돌했다. 감시하는 주체와 감시받는 대상이 멧부리에서 경계를 섞었다. 해군기지 건설을 감시해온 그를 기지 준공(지난 2월26일) 뒤부터 해군이 감시했다. 공사가 완료되지 않아 민간인 진입 차단 펜스는 그대로였다. 강정의 연대자들이 펜스 위에 남긴 글씨도 아직 철거 전이었다.
“멧부리 박 삼춘 반갑수다!”
2014년 4월 멧부리 박이 제주해군기지 동방파제 건설 공사장 앞에 서 있다. 정용일 <한겨레21> 기자
제주해군기지 동방파제 끝에 세워진 초소가 멧부리를 경계하고 있다. 뒤로 보이는 섬은 범섬. 이문영 기자
멧부리가 줄자 멧부리 박도 말라갔다
그, 멧부리 박(본명 박인천·45). 해군기지가 내려다보이는 리조트 옥상에서 비옷을 입은 멧부리 박이 입항하는 군함에 카메라를 겨눴다. 6월29일 강정마을에 장맛비가 떨어졌다. 리조트 아래로 강정천이 흘렀고, 강정천 뒤에서 멧부리가 수척했다. 앙상해진 멧부리 바위를 철조망 감은 해군기지 담장이 세로로 잘라먹었다. 동방파제 초소에선 초병들이 멧부리를 바라보며 경계근무를 섰다. 멧부리의 몸이 줄어들수록 멧부리에 살며 멧부리를 살펴온 멧부리 박의 몸도 말라갔다.
서쪽에서 나타난 소형 군함 한 척이 남방파제를 따라 접근했다. 멧부리 박이 처음 보는 배였다. 군함은 남방파제 끝을 지나 속도를 없앴다. 운행 방향을 반대로 틀어 선체를 입구로 돌렸다. 변침각을 크게 그려야 하는 입항은 물의 속도만큼 더뎠다. 군함이 정박하기까지 30여분이 걸렸다. 멧부리 박이 관찰해온 입출항 장면은 위태롭고 권태로웠다. 대형 군함은 두 척의 예인선이 끌어줘야 40~50분 만에 정박할 수 있었다. 기동전단의 입출항은 전혀 기동적이지 않았다. “진짜 전쟁이라도 나면 큰일”이라며 그가 카메라 줌을 당겼다.
카메라로 들어온 강정마을은 기지 준공 전의 모습과 크게 달랐다. 바다와 접한 기지가 해안의 풍경을 바꿨고, 기지 진입로와 부대시설이 육지의 경관 자체를 흔들었다. 기지 안에선 끝나지 않은 공사가 계속되고 있었고, 영내 관사가 빌라촌처럼 붉은 지붕을 덮었다. 깨진 구럼비(2012년 3월7일 발파)의 흔적은 기지 안 도로에 깔리거나 수변공원 공사장 끝에서 안쓰럽게 엎드려 있었다. 크루즈 터미널 공사로 강정포구는 왜소하게 쪼그라들었고, 중덕삼거리 망루(해군기지 감시)는 터미널 우회도로 건설(토지 수용과 행정대집행을 압박)에 밀려 쫓겨났다. 아침, 낮, 저녁, 하루 세 차례 해군기지에서 흘러나오는 군가가 기지 담을 넘어 마을로 흘러들었다.
멧부리는 ‘맷부리’거나 ‘묏부리’였다. 매의 날카로운 부리를 닮아 맷부리였고, 강정바다로 뻗어 내린 산줄기가 부리처럼 불거져 묏부리였다. 부드럽고 완만한 선이 바위 위로 흘렀던 구럼비와도 달랐다. 거칠하고 뾰족한 선이 하늘을 찌르고 땅을 치받아 ‘개구럼비’라고도 불렸다.
멧부리는 뜨거운 진격과 차가운 방어가 맞닿아 생성됐다. 한라산의 용암이 강정의 바다와 다툰 곳에서 멧부리가 굳었다. 무정형의 바위 사이로 용암이 밀어낸 멧부리의 숨길이 보였다. 그 숨길마다 육상의 식물들이 싹을 틔워 초록을 올렸고, 수중의 생명들이 얕게 고인 물속에서 알을 깨고 고물댔었다. 절대보전지역(‘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에 따라 지정한 절대 훼손할 수 없는 지역)이던 멧부리는 2009년 12월 ‘절대’를 빼앗겼다(한나라당 도의원들이 날치기 해제). 두 글자를 잃는 순간 멧부리는 해군기지 대표 부지(강정동 2694)가 됐다.
2014년 7월9일 서귀포 남쪽 180㎞ 해상에서 질주하던 너구리(제8호 태풍)가 일본으로 진로를 꺾었다. 서귀포 기상대엔 순간 최대풍속 19.5m/s가 찍혔다. 해군기지 동방파제 건너편에서 거센 비바람을 맞으며 멧부리 박이 카메라를 켰다. 카메라를 받친 그의 왼손 손가락이 짧았다. 그(장애 4급)는 1989년 공장 프레스기에 검지와 중지와 약지의 두 마디씩을 잃었다. 잘린 세 손가락 끝에 남은 아릿한 통증은 아픈 바위와, 아픈 바다와, 아픈 마음을 촉각하는 그의 더듬이가 됐다.
바다 저편에서 달려온 파도가 괴물처럼 부풀어 오르며 남방파제를 포악하게 핥았다. 방파제에 꽂힌 철근들이 일제히 휘어 쓰러졌다. 그가 찍은 사진들(2014년 7월11일) 안에서 붉은 철근들이 바짝 드러누워 있었다. 망치에 두들겨 맞고 한 방향으로 비뚤어진 녹슨 대못들 같았다. 4개월 뒤(11월21일) 멧부리 박이 남방파제를 다시 찍었다. 파도에 엎어진 철근들을 노동자들이 힘을 모아 일으키고 있었다. 12월9일엔 포클레인까지 동원돼 굽고 녹슨 철근들을 세웠다.
강정마을에 온 용접노동자
바위 틈에서 야생의 삶 살며
제주해군기지 4년째 감시
공사 초기부터 준공 뒤까지
멧부리 떠나지 않고 파수
바다에 빠뜨린 케이슨 잔해
통제받지 않는 오탁수 오염
민군복합관광미항 약속 이행과
급변침 과정에서 사고 여부 등
관찰·기록해 페이스북에 공개
너구리가 철근을 짓밟기 84일 전에도 멧부리 박은 기지 공사장을 촬영했다. 바지선 뒤쪽에서 엎어지기 전의 철근들이 찍혔다. 그날 제주로 향하던 세월호가 진도 바다에서 침몰했다. 배에 실린 426t의 철근 중 278t의 도착 예정지는 해군기지였다. “괴물이 되어버린 국책사업이 세월호 참사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비극적인 사실”(6월29일 강정마을회·제주해군기지 건설 저지를 위한 전국대책회의 등 성명)이 확인됐다. 세월호 참사와 해군기지 철근 수급, 굽은 철근 재사용의 연관성에 그와 강정 주민들은 의구심을 품었다. “철근 계약 및 운송의 모든 절차는 시공사와 공급업체 간 진행된 것으로 기지사업단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해군은 밝혔다.
보고, 살피고, 써서, 알리는 투쟁
박인천은 용접노동자였다. 2009년 용접 도중 발 디딘 사다리가 넘어져 허리를 크게 다쳤다. 산업재해를 인정하지 않는 사업주와 2년을 싸웠으나 보상받지 못했다. 허리가 지탱해주지 못하는 두 다리는 “구름 위를 걷는 듯” 휘청거렸다. 전처럼 일을 할 수 없게 된 그의 삶도 궁핍해졌다. 마음에서 “악이 치받아” 올랐다. “거리에서 농성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세상에서 내가 가장 억울한 줄 알았는데 저 사람들은 뭐가 억울해서 싸울까” 궁금했다. 2012년 강정생명평화대행진에 끼었다. 약해진 허리 힘을 키우겠다며 배낭을 질곡처럼 짊어지고 걸었다. 더는 걸을 수 없는 곳에 이르렀을 때 부러지지 않는 사다리를 만나길 그는 고대했다.
2012년 8월 태풍 볼라벤(제주 순간최대풍속 39.9m/s)에 파손된 케이슨(수중 건설 기초공사에 주로 사용되는 상자 모양의 구조물) 7기가 강정 바다에 오래 방치돼 있었다. 1공구 시공사인 삼성물산이 제작한 케이슨은 아파트 8층 높이와 무게 8885톤(한 기당 15억여원)에 달했다. 파손된 케이슨으로 추정되는 구조물을 2013년 1월 포클레인이 바지선 위에서 부수어 밤바다로 밀어 넣는 장면을 목격했다. 포클레인 삽날이 바지선 바닥을 긁는 소리가 귀를 긁어댔다. “공사 현장을 지켜보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 채 강정 바다가 폐허가 되고 말겠다”고 박인천은 생각했다. 그는 멧부리 바위틈에 비닐을 씌우고 ‘거주’를 시작했다. 멧부리 바위가 그의 집이 되면서 박인천은 멧부리 박이 됐다. 멧부리 박은 제주해군기지 공사 초기부터 멧부리를 떠나지 않고 감시한 유일한 ‘파수꾼’이 됐다.
감시 시작 한 달 뒤 첫 사진(2013년 2월2일)을 찍었다. 파도가 끊어버린 오탁수방지막을 수리하지 않은 채 사석(구조물의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 채워 넣는 잡석)을 매립하는 장면이었다. 전날 풍랑이 있었다. 멧부리(기지 부지로 수용된 쪽) 해안에 동방파제를 놓는 과정에서 풍랑이 거셀 때마다 사석이 쓸려나갔다. 사석 유실과 재매립은 테트라포드(파도나 해일을 막기 위해 방파제에 설치하는 콘크리트 블록)를 쌓을 때까지 되풀이됐다. 오탁수가 통제받지 않을 때마다 강정 앞바다는 흙탕물로 덮였다. “매일 물의 수난을 봐야 하는” 그의 “마음도 깨끗해질 리 없었다.”(2013년 9월14일) 카메라를 마련하지 못해 휴대전화로 증거를 남겼다. 사진과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한 사람이라도 더 봐주길 바랐다. 멧부리 박의 싸움은 관찰하고 기록하는 것이었다. 보고, 살피고, 써서, 알리는 일은 권력에 맞선 권력 없는 자의 가난한 저항이었다. “나의 투쟁 방식은 고작 이런 것”(2014년 6월26일)이라고 그는 썼다.
펌프준설선은 진공청소기였다. 모든 것을 빨아들여 매립지에 토해냈다. 물과 모래, 물고기와 플랑크톤, 해초와 쓰레기까지, 매립은 죽은 것과 산 것을 가리지 않았다. 매립지 위에서 새들이 선회했다. 준설선 파이프가 뱉은 죽은 물고기의 냄새를 맡았을 것이었다. 소나무 타는 연기(재선충 방제작업)가 산에서 안개처럼 내려와 마을을 덮었다. 공사장에서 내려앉은 먼지로 강정 바다는 붉은 거품을 물었다. “자연을 망치는 좀벌레는 인간”(2014년 11월8일)이라고 바다가 호소하는 듯했다.
멧부리 박이 해군기지를 감시하며 거주하는 천막. 이문영 기자
2014년 7월9일 태풍 너구리가 해군기지 남방파제를 쓸고 간 뒤 일제히 휘어버린 철근들. 멧부리 박 제공
볼라벤이 파손한 케이슨의 파쇄(2015년까지 계속)는 강정 바다 오염의 주원인 중 하나가 됐다. 2013년 쇄암봉을 수중으로 떨어뜨려 파손된 케이슨을 깨던 시공사가 2014년부턴 파쇄 면적이 넓은 쇄암판으로 수면을 부수며 케이슨을 분쇄했다. 바스러진 시멘트 가루가 강정 바다 밑에 쌓였다. 고철만 발라낸 콘크리트 덩어리를 바다에 쏟아 넣는 장면들도 수차례 촬영됐다. 해경에 민원을 넣으면 “흙탕물은 오염물질이 아니라 처벌할 수 없다”거나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진 않는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너구리도 케이슨을 무너뜨렸다. 직립하듯 허리를 세운 고공의 파도에 휩쓸려 케이슨 두 기가 이탈하고 한 기가 기울어진 현장이 멧부리 박의 영상에 잡혔다. 해군은 50년 주기로 오는 대형 태풍에도 견딜 수 있는 공법이라고 밝혀왔다. 바다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연산호 군락(공사 시작 전 동일 장소에서 촬영한 사진 비교 결과)의 폐사와 개체수 감소가 급격(2015년 시민사회단체와 합동 조사)했다.
“바다도, 나도 화석이 되는 것 같다”
멧부리는 전선의 척후로서 고요하거나 격렬했다. 공사가 시작되면 기계의 굉음이 살아 있는 것들의 소리를 삼켜 존재를 지웠고, 공사가 멈추면 새와 풀벌레의 소리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며 생명으로 끓었다. 고요와 격렬의 한가운데서 멧부리 박은 멧부리를 비우지 않았다. ‘군사보호구역이므로 출입을 통제한다’(현재 제주해군기지는 군사보호구역 미설정 상태)는 표지판 설치(군사보호구역 설정 논의 대상에서도 멧부리는 제외)를 중단시키거나, 멧부리를 매립해 해수욕장으로 만들려는 해군의 시도를 마을에 알려 무산시키기도 했다. 멧부리에 공백을 두지 않아 막아낸 일들이 있었다.
멧부리 박은 ‘야생’을 살았다. 2013년 1월 바위 위에 걸친 그의 첫 비닐집은 겨울을 덮기엔 너무 얇았다. 던지면 펴지는 1인용 텐트를 한 달 뒤 멧부리 북쪽 바위에 쳤다. 공사장 펜스가 겨울바람을 막아 “좋고”, 범섬과 서건도가 보여 경치가 “좋고”, 강정 바다에서 뛰는 남방큰돌고래도 볼 수 있어 “좋고”…. 좋고 좋고 좋아서 “내겐 최고의 명당”이라며 그는 자족했다. ‘명당’에 터 잡은 두 번째 집도 반년 만에 바닷바람에 부식했다. 손바닥으로 누르면 마른오징어 찢어지듯 천이 찢어졌고, 생쥐가 물어뜯은 구멍으로 모기가 침입해 그를 물어뜯었다. 바다도, 텐트도, 그도 “화석이 돼가는 것 같았”다.
2013년 가을 해양경찰청(인천) 국정감사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공사 과정에서 확인한 문제들을 증언했다. 그가 멧부리로 돌아왔을 때 그의 세 번째 집이 있었다. 마을로 내려오지 않는 그를 위해 주민들이 크고 튼튼한 새 천막을 세웠다. 멧부리 박은 “바람이 솔잎에 걸려 기분 좋은 소리를 내는 소나무 아래” 정착했다. 소나무는 그가 올라가서 기지를 들여다보는 전망대가 되기도 했다. 그가 비운 두 번째 집엔 비 내리는 날 길고양이들이 들러 안식했다.
멧부리 박은 전기 없이 살았다. 태양열로 랜턴을 충전해 필요할 때만 불을 밝혔다. 빛이 없는 공간에서 오래 지낼수록 청각이 발달했다. 처음엔 정겹던 강정천 물소리가 깊은 밤 천둥소리처럼 커질 때가 있었다. 2015년 9월16일 군함이 처음 입항했다. 그날 이후 그는 군함의 경적소리에 잠을 깼다. 군함이 뽑아 올리는 경적은 강정이 기지촌이 됐다는 사실을 천둥처럼 인식시켰다.
가끔 강정천 물을 받아 끓여 먹기도 했지만 보통은 삼시 세끼 생라면을 씹어 먹으며 해군기지를 주시했다. 아침 6시쯤 일어나자마자 그는 라면을 먹거나 먹기를 건너뛰고 리조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담배꽁초를 주워 리조트에 보답했다. 2016년 1월5일 잠수함 이천함, 6일 잠수함 나대용함, 12일 충무공이순신함, 18일 세종대왕함, 27일 문무대왕함과 서애류성룡함…. 기지 준공 후 그는 매일 군함들을 살폈다. 입출항 과정에서 사고가 나지 않는지, 해군기지가 약속대로 민군복합형관광미항의 기능을 하고 있는지, 완공된 기지가 바다를 더럽히지는 않는지 주시했다. 하수관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색깔과 정화장치를 관찰해 오염 가능성도 추정했다.
변함없고 단조롭지만 ‘포기하지 않는 반복’이 그에게 ‘흐름을 읽는 눈’을 줬다. 군사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무작정 시간을 투여해 보고 있으면” 무엇이 달라졌는지 구분할 수 있었다. 자신을 보며 “저 인간이 흐름을 꿰고 있다”고 해군이 인정하게 만들고 싶었다. 누군가의 감시를 의식할 때 군사기지도 스스로를 통제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흐름을 붙들기 위해, 그는 날마다, 혼자, 변함없이, 카메라를 주시했다.
2014년 2월 포클레인이 바지선 위에서 콘크리트 구조물을 부수고 있다. 멧부리 박 제공
국민과 비국민의 경계에서
동해에서 들어오는 군함들은 두 차례 급변침(乙자 형태)을 해야 했다. 범섬 뒤를 지나온 배는 동방파제 쪽의 기지 입구를 지나쳐 남방파제 시작 지점에서 유턴했다. 동방파제 쪽으로 되돌아온 뒤엔 다시 배를 거꾸로 선회해야 입구로 진입할 수 있었다. 준공 전 시뮬레이션에선 언급되지 않던 급변침이 한 차례 더 관찰됐다.
강정 바다는 파도가 거칠기로 유명했다. 멧부리를 자르고 구럼비를 부수며 들어선 해군기지의 입출항 안전성은 건설 내내 논란이 됐다. 어선이 정박하는 강정포구(서방파제 쪽) 옆을 피하고 정면에서 들이치는 거친 파도를 남방파제로 막고 나면 선택할 수 있는 출입구는 동방파제 쪽뿐이었다. 동방파제 쪽은 암초(천연기념물 제442호 연산호 군락이어서 파쇄 불가)와 범섬이 입출항을 방해해 급변침(최초 77도로 설정됐으나 2012년 설계오류가 확인되자 15만톤 크루즈에 한해 30도로 변경)을 거쳐야 드나들 수 있었다. 항로를 벗어날 경우 무거운 군함이 암초에 걸릴 위험이 상존했다. 뱃길을 벗어나거나 변침 과정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해 배가 밀리기도 했다. 군함과 잠수함과 고깃배가 기지 입구에서 아찔하게 뒤엉키는 날(지난 5월18일)도 있었다.
해군 쪽으로부터 “간첩” 비난
감시 기록 갑자기 페북서 삭제
“해군기지 군사보호구역 지정 뒤
촬영 등 군형법으로 처벌 가능”
반대활동 주민에게 구상권 압박
안전 보호받아야 할 국민과
그들 위해 희생해야 할 국민
국민-비국민 나누는 정치권력
외부세력 아닌 삶터 지키는 저항
“우리는 여전히 여기 살고 있다”
지난 3월15일 기지방어훈련을 한다며 해군 병사들이 멧부리 입구의 콘크리트 구조물 뒤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해 총을 조준했다. 총구 앞으로 올레7코스가 뻗어 있었다. 마을 어른들은 총을 보는 순간 4·3의 공포를 떠올렸다. 총은 강정의 역사와 양립 가능한 쇠붙이가 아니었다. 강정마을에도 세 곳의 4·3 학살터(1948년 11월16일 큰당밭 학살, 11월21일 서울집밭 학살, 12월16일 메모루 학살로 마을 주민 160여명 사망)가 있었다. 4·3은 강정의 지도를 다시 그렸다. 강정 쌀 ‘팔금’(강정천 1급수 물로 키워낸 특산품)이 ‘산사람들’의 밥이 되는 것을 막겠다며 경찰은 마을의 경계를 재설정했다. 논을 중심으로 자리 잡은 민가를 소개해 지금의 강정마을로 몰아넣고 돌담을 쳤다. 경찰이 마을을 뒤지며 ‘빨갱이’를 찾을 때 강정 아이들은 멧부리 바위에 숨어 몸을 감췄다. 68년이 흘러 해군기지 초소가 지켜보는 멧부리는 더 이상 은신의 땅이 되지 못했다.
해군 방산비리의 대명사가 된 ‘통영함’이 2015년 9월16일(군함 첫 입항일) 제주해군기지에 정박해 있다. 멧부리 박 제공
멧부리 박은 감시 내용을 근거로 기지사업단에 항의전화를 하고, 시청에 민원도 넣고, 정보공개청구를 하며, 국민신문고에 제보했다. 2014년 6월엔 해군기지 사업단 안에서 진행된 연산호 조사에 참여해 관찰 내용을 증언했다. 군 관사 건설 저지 농성천막 행정대집행(2015년 1월31일)을 막다 체포됐을 땐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면회 간 마을 주민들 앞에서 그는 “오랜만에 따뜻한 데서 따뜻한 밥을 먹었다”며 웃었다. 지난 4년간 멧부리 박이 감시활동을 쉰 적은 경찰 조사를 받거나 유치장에 있을 때뿐이다.
매일같이 강정천을 찾던 왜가리가 있었다. 사람이 다가오면 날아갔다가 같은 자리로 돌아왔다. 몇 달 전 하늘을 날던 다른 왜가리가 매의 공격을 받고 떨어져 죽었다. 죽은 왜가리를 멧부리 박이 바위 사이에 넣어두었는데 짐승들이 깃털만 남기고 먹어치웠다. 강정천을 찾는 왜가리는 깃털이 뿌려진 바위 근처를 맴돌았다. 죽은 왜가리의 짝이 아닐까 그는 상상했다. 멧부리에서 혼자 살며 그도 그 왜가리처럼 가끔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멧부리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시간이 늘어나면서 대인기피증이 오는 때도 있었다. 그는 굳이 외로움을 달래려 하지 않았다. “마음의 날이 순해지면 감시하는 눈도 무뎌질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해군기지를 감시하다 “간첩”으로 몰린 멧부리 박은 ‘안전을 보호받아야 할 국민’과 ‘그들의 안전을 위해 위험에 빠져야 할 국민’이 따로 있는지 궁금했다. 국민을 배제한 채 이뤄진 “국민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결단”(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 체계 배치 관련 박근혜 대통령 14일 발언)에서 두 국민이 같은 국민일 리 없었다. 성주 밖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사드를 품어야 하는 성주군민들은 국민에서 제외됐다. 밀양 밖 국민에게 전기를 보내기 위해 송전탑을 꽂아야 하는 밀양 주민은 국민이 아니었고, 육지를 지키기 위해 바다를 내줘야 하는 강정 주민도 국민이 아니었다. 국가가 국민으로부터 제외시킨 ‘국민 아닌 자들’의 반발은 그때도 “불필요”(제주해군기지 건설 관련 2012년 2월1일 김황식 당시 국무총리)했고, 지금도 “불필요”(14일 박 대통령)했다. 국민을 위해 비국민이 된 자들의 몸부림은 국민을 위험에 빠뜨리는 “불순세력”의 행동(21일 박 대통령 국가안전보장회의 발언)이 됐다. 어떤 국민을 위해 다른 국민이 버려지는 나라에서 몇 명의 국민이 남을지 멧부리 박은 알 수 없었다.
지난 5월18일 군함과 잠수함과 고깃배가 기지 입구에서 아찔하게 뒤엉켜 있다. 멧부리 박 제공
“카메라 가방이 나의 십자가”
그가 4년째 페이스북에 올려온 해군기지 감시기록이 40여일 전(6월14일) 갑자기 사라졌다. 페이스북코리아 쪽은 “실명 사용 원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계정을 만들 때부터 한글 실명 ‘박인천’을 사용해왔다. 페북코리아 쪽은 영문 성씨 앞에 ‘엠’(M) 자가 포함돼 있어 가명으로 인식했다며 신분 증명을 보내라고 했다. 신분증을 메일로 보낸 지(6월18일) 한 달이 넘은 지금(7월23일)까지 계정은 복구되지 않고 있다(<한겨레>가 취재 과정에서 7월6일 복구 약속을 받았으나 여전히 미처리). 2013년 이후 제주해군기지를 매일 관찰한 유일한 감시일지가 석연찮은 이유로 통째로 삭제됐다.
멧부리 박의 감시활동에 머지않아 군형법이 적용될 수도 있었다. 해군과 제주도는 지난달 제주기지의 군사보호구역 지정 논의를 시작했다. 해군은 크루즈선 입출항 방파제(남·서방파제)까지 군사보호구역으로 지정하겠다(제주도는 ‘불가’ 표명)고 밝혔다. 크루즈 입출항 시설의 군사보호구역 지정 시도는 “사실상 민군복합형관광미항이 군항임을 자인하는 것”이라며 강정마을회는 반발했다. 해군기지 자체가 군사보호구역이 되면 기지를 대상으로 한 촬영·녹취·측량에 벌금과 징역형을 부과(군사기지 및 군사시설 보호법)할 수 있게 된다. 해군 관계자는 “지금도 촬영하는 분이 있는데 법적 제재가 취해질 수 있다”고 했다. “우리는 환경 법규를 준수하며 공사를 진행해왔고 준공 후에도 사후 관리를 철저히 하고 있다”고도 했다. 해군은 지난 3월말 삼성물산의 공사 지연에 책임이 있다며 34억5천만원의 구상권을 강정 주민들과 평화활동가들에게 청구했다. 최근 대림산업(231억원)과 삼성물산(131억원)이 추가 보상을 요구하면서 해군의 구상권 청구액이 뛸 가능성도 커졌다.
멧부리 박은 강정의 ‘공식’ 주민이다. 그를 포함해 강정으로 주소를 옮긴 평화활동가는 25명이다. 그들은 ‘외부세력’이 아니라 정치권력의 독단과 국가 간 힘의 대결 속에서 마을과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저항하는 주민이다. 그들은 멧부리 박이 만난 ‘단단한 사다리’였다.
“사람이 배제된 채 결정되는 국책사업은 사람을 우습게 본다.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고 지켜봐야 한다. 아직 우리가 그곳에 살고 있다는 사실, 우리가 살면서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평화는 모든 생명에게 절박했다. 강정천에서 태어나 바다로 내려간 은어들은 매년 4~5월께 강으로 돌아왔다. 차오르는 밀물을 타고 냇깍(멧부리 끝에서 강정천과 바다가 만나는 폭포 형태를 띤 주상절리)을 거슬러 오르는 은어 떼를 강정 주민들은 ‘올림은어’라고 불렀다. 해군기지 공사장에서 모래를 퍼내면서 은어의 산란처였던 강정천 모래가 그쪽으로 쓸려 들어갔다. 은어가 급감했고 은어를 먹으러 찾아오던 새들도 크게 줄었다. 바다는 그렇게 파괴에 반응하고 있었다.
멧부리 박은 키 160㎝에 몸무게 47㎏의 남자다. 배낭을 메고 카메라 가방을 껴안으면 작은 몸이 앞뒤로 가득 덮인다. 그는 “이 가방이 나의 십자가”라고 했다. 파괴에 반응하는 바다와 감응하며, 멧부리 박이 멧부리에서 ‘여전히’ 감시하고 있다.
제주/이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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