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이정용(사진부)·정인환(정치부) 기자는 세계 각국의 시민운동가 등 1052명과 함께 ‘피스보트’(토파즈호)를 타고 105일간 세계일주를 하며, ‘지속 가능한 미래’(이번 51차 피스보트 주제)를 모색한다. 지난 3일 시작된 일본 평화단체 피스보트의 51번째 항해는 요코하마에서 출항해 앞으로 105일 동안 아시아-아프리카-유럽-라틴아메리카-남태평양 항로를 따라 세계를 일주한다.
바다에 섬광이 번득인다. 구름 사이를 뚫고 번개가 내려친다. 쿠르릉, 쾅! 멀리서 아련히 천둥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벼락이 어둠을 가른다. 찰라의 순간, 칠흑 같은 밤바다가 벌건 대낮이다.
항해에 나선 지 한달 남짓이 지나면서 바다야말로 ‘날씨의 어머니’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왼편으로 폭우가 쏟아지고, 오른편으로 햇살이 눈부신 바닷길을 가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며칠 전엔 뱃머리 갑판에서 깜찍한 떠돌이 구름을 마주치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맑게 갠 화창한 날 오후였다. 신선한 바람이 귓가를 간지럽게 했고, 하늘에는 뭉개 구름이 그림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코발트 빛 바다는 더 없이 투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끝 모르게 펼쳐져 있는 수평선을 넋 놓고 바라보고 있으려니, 저만치 맑게 빛나는 바다 한가운데 유난히 어둡게 변해 있는 지점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작은 점으로 보이던 어두운 부분은 조금씩 커지면서 면이 돼 갔다. 마치 배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곁에 섰던 항해 경험이 많은 피스보트 직원이 왜 마디 비명과 함께 쏜살같이 갑판에서 빠져나갔다. “비구름이다!” 미처 피하고 말 겨를도 없이 앙증맞은 ‘폭우’를 만났다. 지름이 7~8m나 될까? 잠깐 사이 갑판을 지나가면서 태양을 가린 구름의 그림자는 깜찍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장난꾸러기 구름은 굵은 빗줄기를 맘껏 쏟아 부었다. 가만히 서서 물 한 양동이를 뒤집어 쓴 꼴이 돼버렸다. 손으로 얼굴을 씻어내고 바라다보니, 꼬마 구름은 어느새 다른 놀잇감을 찾아 저만치 반대편 수평선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이런 조각 구름들이 모여 거대한 폭풍우를 만들어내는 것이리라. 그리스-이탈리아-모로코로 이어지는 항해 기간 동안 피스보트에선 ‘젠더’(성)를 주제로 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각종 강연과 세미나, 토론회가 줄을 이었고, 기항지에 내려서는 현지 여성단체를 방문해 활동가들을 만나는 자리도 잇따라 마련됐다. 그 가운데 지난 11일 오후 땅거미가 질 무렵 찾아간 이탈리아 여성운동의 산실 ‘국제 여성의 집’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로마 시내 비아 델라 룬가라에 있는 ‘여성의 집’에는 45개 여성단체가 입주해 있었다. 각 단체 대표자들이 뽑은 의장단과 이사진이 운영 책임을 맡고 있다니 일종의 자율 공동체인 셈이다. 도착하자마자 진한 커피와 갓 구워낸 케이크를 내놓던 한 활동가가 “예전엔 남성 기자가 오면 취재를 거부했었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벽에 내걸린 ‘당신이 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집’이란 글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건물의 역사가 흥미로웠다. ‘일상의 기적’이란 시적인 이름을 가진 단체에서 이탈리아어 여성화 작업을 벌이고 있다는 도나텔라 아르테세 활동가는 “집에서 글이나 쓰고 앉아 있는 것보다 건물 하나 점령하는 게 낫다”는 말로 설명을 시작했다. ‘여성의 집’이 애초 가톨릭 수도원이었다고. 1615년 완공돼 ‘부온 파스토레 수도원’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평생을 바깥세상과 차단된 채 생활하는 여성 수도자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아르테세는 “그야말로 ‘여성의 집’으로 안성맞춤인 건물”이라며 웃었다.
가톨릭 교회가 소유하고 있었지만 폐허가 된 채 방치돼 있던 이 건물로 지난 1983년 일단의 여성 운동가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전기와 수도, 난방을 끌어오기 시작했고, 건물 새 단장에 들어갔다. “건물을 무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냐”고 묻자, 아르테세는 “평화적으로 접수한 것으로 하자”고 말했다. 그는 “조금씩 인기척이 늘면서 가톨릭 교회는 퇴거를 종용해, 법정 공방까지 벌이기도 했다”며 “결국 시 정부가 건물을 사들였고, 지난 2001년 약간의 임대료를 물고 여성단체들이 공동으로 사용해도 좋다는 공식 허가를 받아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 여성 운동가들이 건물을 ‘접수’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앞서 1970년대 중반에도 ‘이탈리아 여성연맹’ 주도로 로마 중심가 피아자 나보나의 유서 깊은 건물인 ‘비아 델 고베르노 베키오’를 장악한 경험이 있다. 아르테세는 “당시 3~4년에 걸친 협상 끝에 시 당국은 경찰력을 동원해 여성들을 거리로 내몰았다”며 “그때의 쓰라린 경험이 ‘여성의 집’을 지켜내는 데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의 안내를 받아 건물을 둘러봤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150여 석 규모의 강당을 지나 2년 여 전부터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각국의 단체를 통해 여성운동 관련 사료를 모으고 있다는 사무실로 들어섰다. ‘아카이브’(자료실의 남성형)냐고 묻자, 아르테세가 기다렸다는 듯 ‘아키비아’(자료실의 여성형)라고 교정해준다. 저녁 8시 이후엔 남성의 출입이 금지된다는 카페와 유기농 식당, 여성만 묶을 수 있다는 호스텔까지 갖추고 있으니 가히 ‘여성의 집’으로 불릴 만했다.
피스보트 51회 월드크루즈가 쿠바를 떠나 대서양을 항해하는 동안 갑작스런 번개가 밤하늘을 밝히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처음엔 작은 점으로 보이던 어두운 부분은 조금씩 커지면서 면이 돼 갔다. 마치 배를 향해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순간 곁에 섰던 항해 경험이 많은 피스보트 직원이 왜 마디 비명과 함께 쏜살같이 갑판에서 빠져나갔다. “비구름이다!” 미처 피하고 말 겨를도 없이 앙증맞은 ‘폭우’를 만났다. 지름이 7~8m나 될까? 잠깐 사이 갑판을 지나가면서 태양을 가린 구름의 그림자는 깜찍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장난꾸러기 구름은 굵은 빗줄기를 맘껏 쏟아 부었다. 가만히 서서 물 한 양동이를 뒤집어 쓴 꼴이 돼버렸다. 손으로 얼굴을 씻어내고 바라다보니, 꼬마 구름은 어느새 다른 놀잇감을 찾아 저만치 반대편 수평선을 향해 내달리고 있었다. 이런 조각 구름들이 모여 거대한 폭풍우를 만들어내는 것이리라. 그리스-이탈리아-모로코로 이어지는 항해 기간 동안 피스보트에선 ‘젠더’(성)를 주제로 한 다양한 행사가 열렸다. 각종 강연과 세미나, 토론회가 줄을 이었고, 기항지에 내려서는 현지 여성단체를 방문해 활동가들을 만나는 자리도 잇따라 마련됐다. 그 가운데 지난 11일 오후 땅거미가 질 무렵 찾아간 이탈리아 여성운동의 산실 ‘국제 여성의 집’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로마 시내 비아 델라 룬가라에 있는 ‘여성의 집’에는 45개 여성단체가 입주해 있었다. 각 단체 대표자들이 뽑은 의장단과 이사진이 운영 책임을 맡고 있다니 일종의 자율 공동체인 셈이다. 도착하자마자 진한 커피와 갓 구워낸 케이크를 내놓던 한 활동가가 “예전엔 남성 기자가 오면 취재를 거부했었다”는 말로 인사를 대신한다. 벽에 내걸린 ‘당신이 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집’이란 글귀가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51회 피스보트 월드크루즈가 도착한 이탈리아 로마의 바티칸의 성베드로 성당앞에 전세계에서 온 많은 카톨릭 신자들이 예배를 올리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이탈리아 로마의 45개 여성단체들이 모여있는 여성의 집에서 각국의 여성들이 모여 여성폭력에 대한 토론을 하고 있다.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이날 밤 어둠이 깔린 ‘여성의 집’ 회의실에 각국의 여성들이 둘러 앉았다. 이탈리아 특유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 즉석 토론회가 열렸다. 일본의 평화운동가 와타나베 미나가 “폐경기 이후 여성은 ‘생산’이 불가능하니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도지사의 망언을 화제로 올렸다. 객석에서 야유와 함께 욕설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망언 직후 실시된 선거에서 300만표 이상의 차이로 그는 재선에 성공했다”고 소개하자, “그럼 여성들도 찍었다는 말 아니냐”고 되묻는다. “그의 동생이 유명한 영화배우”라는 설명이 나오자, 폭소와 함께 다시 야유가 시작됐다.
“공식 통계로만 한달 평균 200여명의 케냐 여성이 성폭행을 당한다.” 마이크를 넘겨받은 케냐의 여성운동가 로이스 아이쳉이 화제를 돌렸다. “창피해서 말 안하고, 아는 사람한테 당해서 말 못하고, 가족들 생각해서 숨기고, 까다로운 고발절차에 처벌도 가벼워 포기하고… 실제 피해자 수는 훨씬 많을 것이다.” 동감의 침묵이 잠시 회의실을 감싼다. 심각했던 것도 잠시, “최근 여성의원들 주도로 ‘성폭행 특별법’이 의회를 통과해, 성범죄자 처벌이 대폭 강화된 것은 물론 피해자 구제방안도 마련됐다”는 아이쳉의 말에 박수와 함께 휘파람과 환호성이 터져 나온다. 저마다 처한 현실은 조금씩 달랐지만, 이날의 유쾌한 ‘다국적 여성연대 수다회’는 밤늦도록 끝날 줄 몰랐다. 피스보트/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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