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민주화운동으로 퇴학, 고문당해
출소 뒤 귀향, 농민운동에 투신
민중총궐기 참석해 ‘쌀값 안정’ 요구
경찰 물대포에 맞아 뇌출혈로 중태
경찰 물대포에 맞아 중태에 빠졌던 백남기 씨가 25일 오전 316일 만에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사망했다. 시민들이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영안실로 그의 시신을 운구하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생명과 평화의 일꾼’이라 불리던 그의 뜨거운 심장이 결국 차갑게 식었다.
지난해 11월 민중 총궐기 집회에 참여했다가 차가운 물대포에 쓰러져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백남기(69) 농민은 지난 23일부터 상태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신장 기능 약화로 약물 치료도 불가능해져 주말을 넘기기 어렵다는 의료진의 의견에 가족과 지인들이 백씨 곁으로 급히 모여들었다. 가족들은 지난 7월에도 비슷한 증세를 보였지만 잘 넘겼던 일을 떠올리며 실낱 같은 희망을 놓지 않았으나, 결국 백씨는 25일 오후 1시58분께 숨졌다. 자신의 생일을 하루 지난 날이었다. 딸 도라지씨는 자신의 트위터에 “여전히 경찰이 장례식장을 둘러싸고 있지만 명복을 빌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아버지 고이 잘 보내드릴 준비하겠습니다. 꼭 이기겠습니다”라고 썼다.
그는 1947년 조상들이 9대째 살아온 전남 보성군 웅치면 부춘마을에서 태어났다. 1968년 중앙대 행정학과에 입학해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과 유신 등 독재정치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2차례 제적당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격당한 10·26 사태 이후 찾아온 ‘서울의 봄’으로 백 농민은 1980년 학교로 돌아와 다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의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돼, 고춧가루물이 코에 들이부어지는 등 고문을 당했다.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중앙대로부터 퇴학 조치도 당했다.
1981년 3·1절 특사로 가석방된 직후 박경숙(63)씨와 결혼하고 그가 신혼살림을 차린 곳은, 조상들이 대대로 살아온 부춘마을이었다.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란 자신의 가톨릭 세례명처럼 낮은 곳으로 임한 예수의 정신을 따르기 위해서였을까. 급속한 경제 성장기를 맞아 젊은이들은 도시로 올라가는 시대였으나, 그는 정반대 방향의 길을 택했다. 그는 전국을 돌아다녀 구한 우리밀 종자로 농사를 지어 보성군의 ‘우리밀 1호 농민’이 됐다. 1994년엔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를 함께 만들어 공동의장으로 선출됐다. 딸 두 명의 이름은 도라지(35), 민주화(30), 아들 이름은 두산(33)이라고 지었다. 집에서 키우는 개의 이름은 오이삼’(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일)과 팔일팔(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일)로 지었다. 1992년 가톨릭 농민회 부회장을 맡을 당시 기존의 생존권 투쟁 대신, 평화·생명·공동체 운동을 이끌었던 그를 두고 오랜 동료들은 ‘생명과 평화의 일꾼’이라 불렀다.
지난해 11월14일 그는 집에서 아침을 먹고, 농민 120여명과 함께 상경해 ‘민중 총궐기’ 집회에 참석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한 쌀값 안정 공약을 지키라고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박 대통령은 80㎏ 쌀값을 21만원대로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으나, 2013년 17만원이던 쌀값은 당시 15만원으로 폭락한 상황이었다.
그는 이날 시위 도중 오후 7시께 종로구청 앞 사거리에서 경찰 차벽으로 다가갔다가 경찰이 발사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지면서 머리를 아스팔트 바닥에 세게 부딪혔다. 뇌출혈로 병원으로 이송돼 4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고 이후 뇌수술도 받았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생명을 이어왔다.
그가 쓰러진 직후 가족과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가 꾸려져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해왔다. 지난해 11월18일엔 강신명 전 경찰청장과 구은수 전 서울지방경찰청장 등 7명을 살인미수 혐의로 고발했다. 지난 3월엔 국가와 강 전 청장을 대상으로 2억4000만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소송도 제기했다. 지난 12일 야3당 요구로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서 청문회가 열렸으나, 강 전 청장은 당시 살수 조치가 적절했다면서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백남기 농민이 살던 부춘마을 주민들은 한창 가을걷이를 하던 중 백씨 사망 소식을 듣고 애통해 했다. 백씨와 어릴 때부터 친구로 지낸 동년배 선영환(69)씨의 부인 이미자(62)씨는 “정말 애통하고 속이 상한다”고 말했다. 전국농민회 광주전남연맹은 시·군별로 분향소를 설치하기로 했고, 간부들은 대책 논의를 위해 서울로 향했다.
백씨가 지난해 11월 생애 마지막으로 직접 손으로 뿌린 우리밀은 지난 6월 백씨의 후배들과 아내 박씨가 거둬들였다. 백씨가 쓰러지기 전 소출량은 40㎏짜리 가마 50~60개였지만, 이번엔 가마 32.5개에 그쳤다. 가족들은 이날 거둔 밀에 ‘백남기 밀’이란 이름을 붙여 종자로 보급하기로 했다. 오는 가을, 가족들은 ‘백남기 밀’ 씨앗을 그의 밭에 다시 뿌릴 예정이다.
김지훈 박임근 기자 watchd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