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대법원에서 열린 ‘4차 산업혁명과 사법의 미래’ 심포지엄에 초청된 미국 인공지능 법률정보 서비스 업체 ‘렉스 마키나’ 설립자 조슈아 워커는 ‘알파고 판사’의 출현에 대해 단호하게 ‘노’(No)를 외쳤다고 한다. 판사는 기계와 달리 상황 자체에 대한 연민과 공감,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판결을 내리기 때문이란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민과 공감? 사회적 합의? 대한민국 법정에서 우리는 ‘저 판사는 알파고로 대체해도 되겠구만’ 싶은 기계적 판결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슬픈 일이다.
특히 2008년 신설된 형사 국민참여재판을 여러 차례 변론해 보니 점점 알파고가 바둑뿐 아니라 판사도 잘하지 않을까 하는 웃지 못할 생각이 든다. ‘연민과 공감, 사회적 합의에 충실한’ 배심원단의 평결이 판사에 의해 간단히 무시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국민참여재판을 하면 세 가지에 놀란다. 첫째, 배심원들이 하루 종일 보여주는 집중도와 열의가 실로 대단하다. 둘째, 아침까지는 완강히 ‘나 잘못한 것 없는데 재판을 받으니 억울해 죽겠다’고 가슴을 치던 피고인이 저녁 무렵이 되면 ‘이렇게 많은 분이 종일 내 말을 들어주어 이제는 결과에 상관없이 후련하다’고 말하곤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과정을 거쳐 배심원 다수가 무죄 의견을 낸 사건임에도 판사가 ‘간단하게’ 유죄를 선고하곤 해서 놀라게 된다.
국민참여재판은 한건당 수십명의 노력과 에너지, 그리고 상당한 비용이 든다. 아침 9시에 시작해서 밤 10시가 다 되어 끝난다. 8~10명의 배심원은 각자 생업이 있고 재판 중에 다른 사람과 만나면 의견이 바뀔 우려가 있으니 하루 만에 배심원 선정 절차부터 최종 선고까지 끝내는 것이 원칙이다. 아침에 배심원단을 뽑고 그 앞에서 공소 내용을 브리핑하고, 연설하듯 검사와 기싸움을 하며 변론을 편다. 증인이 위증한다 싶으면 즉석에서 수사기록을 뒤져 허위임을 주장해야 하니, 변호인단 중 다른 변호사가 신문한다고 해서 남은 변호사가 집중을 안 할 수도 없다. 증거서류를 보고 피고인 신문을 끝내면 보통 해가 뉘엿뉘엿 지는데 그걸로 끝이 아니다. 배심원들은 비밀 토론실에 들어가고, 결론이 날 때까지 몇 시간이고 모두 기다린다. 토론이 4시간이 넘게 걸려 자정까지 기다려본 적도 있다.
배심원단 의견을 판사실에 전달한 배심원단이 다시 법정에 들어온다. 배심원들도 기진맥진, 변호인들과 검사들도 마찬가지로 지쳐버린다. 판결문을 작성한 판사가 드디어 법정에 들어오면 모두 판사 입만 보면서 선고를 기다린다. 현행 국민참여재판법상 배심원단의 의견은 권고사항일 뿐, 최종 결정은 판사가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판사는 기계적으로 “배심원단은 무죄 의견이지만, 법리상 판단해 볼 때 피고인은 유죄”를 적은 판결문을 읽고 나가버린다. 아니, 법리상 불리한 것 누가 모른단 말인가. 그래서 법리 말고 국민의 판단을 받아보자고 해서 종일 국민이 읽고 보고 토론한 것인데. 어찌 저리 상황 자체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없고 ‘사회적 합의’에 대한 수용이 없을까.
그런 날은 패배한 장수가 되어 집에 돌아가면서 진지하게 과연 ‘리걸 마인드’(legal mind)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법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개념상 법리란 그동안 대법원이 법을 해석해온 이론 정도로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성서’와 ‘성서 해설서’ 관계쯤 되시겠다. 대법원에서 수십년간 내린 판결문의 문자 그대로가 법리라면, 굳이 사람이 판사를 할 필요가 없다. 판사의 업무는 종이 속 법을 현실 사건에 적용해서 누가 잘못한 것인지 판단을 내려주는 것이다. 그들의 ‘법리 적용’ 업무가 단순히 기존 대법원 판례 중 가장 유사한 판례를 검색해서 찾은 뒤 사안에 적용, 그 결과 “뚜뚜뚜두… 1+1은 ‘2’가 됩니다”라는 기계도 해낼 법한 결론을 내리는 것에 불과하다면 알파고가 가장 잘할 것이다. 미래에 없어질 직업군 중 하나로 판사가 꼽히지 않으려면, 기계와 달리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사법 작용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사법부의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조수진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