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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1076일…잊을 수 없는 ‘세월호 영웅들’을 다시 불러봅니다

등록 2017-03-27 16:56수정 2017-03-27 17:39

마지막 순간까지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이 일찌감치 도망칠 때 제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이어나갔던 ‘보통 사람들’. 제자들을 구하려 탈출이 어려운 곳으로 간 선생님들, 같은 반 친구에게 구명조끼를 건넨 학생, 끝까지 선내 방송을 포기하지 않았던 승무원, 자발적으로 실종자 수색에 나섰다가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목숨을 잃은 잠수사가 그들입니다.

지난 26일 세월호가 1075일 만에 마침내 전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처참히 녹슨 선체는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얼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2014년 4월16일, ‘세월호 침몰’의 순간 우리 곁에 머물렀던 영웅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박재동 화백이 그린 고 최혜정, 유니나 선생님.
박재동 화백이 그린 고 최혜정, 유니나 선생님.

아이들 구하러 객실 뛰어내려간 최혜정·유니나 선생님
“밖으로 나가라”고 외치던 고창석·남윤철 선생님

■ ‘영원한 스승’으로 남은 선생님들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을 듣고 가만히 자리를 지켰던 아이들, 이때 선생님들마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단원고 학생 325명과 함께 세월호에 탔던 선생님 11명이 침몰하는 배에서 제자들을 지키다 숨지거나 실종됐습니다.

최혜정 교사는 탈출하기 가장 쉬웠던 5층 객실에서 아이들이 있는 4층 객실로 뛰어 내려갔습니다. “너희 내가 책임질 테니까 다 갑판으로 올라가”라고 외치고 아이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단톡방에 ‘걱정하지 마. 너희부터 나가고 선생님 나갈게’라고 적었습니다. 그는 끝내 나오지 못했습니다.

일본어를 가르쳤던 유니나 교사도 5층 객실에서 아이들을 구하려고 아래층으로 내려간 뒤 실종됐습니다. 유 교사는 참사 54일째인 6월8일 3층 식당에서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상태로 발견됐습니다. 유 교사가 담임을 맡았던 1반 학생들은 10개 반 가운데 가장 많은 19명이 구조됐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최혜정·유니나 선생님 https://goo.gl/8w5QJi)

쏟아져 내리는 구명조끼를 모두 학생들한테 양보하고 배에서 빠져나가라고 외쳤던 고창석 교사, 비상구 앞에서 학생들을 탈출시키던 남윤철 교사 등도 최후까지 제자들 곁을 지켰습니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인 김초원·이지혜 교사의 아버지, 불교시민단체 회원 등이 2015년 9월 서울 종로구 조계종 대웅전 앞에서 세월호 기간제 교사 순직 인정을 촉구하며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세월호 참사 희생자인 김초원·이지혜 교사의 아버지, 불교시민단체 회원 등이 2015년 9월 서울 종로구 조계종 대웅전 앞에서 세월호 기간제 교사 순직 인정을 촉구하며 오체투지를 하고 있다. 김성광 기자
하지만 세월호 참사 3년이 다 되어가도록 ‘순직’ 인정을 받지 못한 이들이 있습니다. 김초원·이지혜 교사는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강아무개 교감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강 교감은 유서에 “교육청에서는 저 혼자에게 책임을 지워주세요. 누구에게도 책임을 넘기지 말고…”라고 적었습니다. 그의 죽음은 순직이 아닌 ‘공무상 사망’으로 처리됐습니다.(▶단원고 교감 선생님 ‘순직’ 인정 받을까? https://goo.gl/plVNZF)

‘영원한 스승’으로 남을 이들 선생님들의 이름은 ‘남윤철·최혜정·고창석·김응현·김초원·이해봉·양승진·박육근·유니나·전수영·이지혜’입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일찌감치 배를 포기하고 달아난 이준석 선장과는 달리 끝까지 승객 구조 활동을 했던 승무원 박지영씨.
세월호 참사 당시 일찌감치 배를 포기하고 달아난 이준석 선장과는 달리 끝까지 승객 구조 활동을 했던 승무원 박지영씨.

“너희들 다 구하고 나갈게” 박지영 승무원
“아이들 구하러 가야 돼” 양대홍 사무장

■ 비겁한 선장 대신한 세월호 승무원들

선장과 항해사, 기관사까지 중책을 맡은 사람들이 모두 달아난 세월호에 끝까지 본분을 잊지 않았던 승무원들이 있습니다. 박지영 승무원은 배가 기울어지기 시작하자 학생들에게 구명조끼를 건네고 급히 대피시킨 뒤 안타깝게 숨졌습니다. 당시 구조된 한 학생은 “승무원 언니에게 ‘언니도 어서 나가야죠’라고 하자 ‘너희들 다 구하고 난 나중에 나갈게. 선원이 마지막이야’라고 말했다”고 증언했습니다. 박 승무원은 승객 50여명이 안전하게 탈출할 수 있도록 ‘생명의 다리’를 만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배가 기울어 벽이 바닥이 되자 탈출에 장애물이 되었던 ‘문이 열린 출입문’을 닫아 승객들이 무사히 다른 출구로 가도록 했던 것입니다.

(▶50여명을 살린 ’생명의 다리’ https://goo.gl/eafeAf)

아내와의 마지막 통화에서 “아이들 구하러 가야 돼”란 말을 남긴 양대홍 사무장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3층 선원 식당칸으로 승객을 구하러 갔던 그도 한 달여 뒤 끝내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두 승무원은 각각 2014년 5월, 2015년 6월에 의사자로 인정됐습니다.

박재동 화백이 그린 고 정차웅·최덕하 학생.
박재동 화백이 그린 고 정차웅·최덕하 학생.

구명조끼 친구에게 양보한 정차웅군, 첫 신고 최덕하군

■ 최초 신고, 구명조끼 양보…어린 영웅들

해경 대원들이 우왕좌왕하며 적극적인 구조를 벌이지 않을 때, 당시 17살이었던 정차웅군은 자신의 구명조끼를 친구에게 양보하고 또 다른 친구를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들었습니다. 정군은 참사 당일 침몰 해역에서 어업지도선에 의해 발견됐습니다. 구명조끼를 입지 않은 채였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져 심폐소생술을 받았지만, 결국 숨졌습니다. 아들 둘을 둔 정군의 부모님은 “귀여운 짓을 많이 하는 딸 같은 아이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정차웅군 아버지 “제대로 못해준 것만 생각나” 오열 https://goo.gl/p1gjJ8)

첫 신고를 한 것도 단원고 학생 최덕하군이었습니다. 최군은 당일 오전 8시52분 전남소방본부 119상황실에 전화를 걸어 “배가 침몰하고 있다”고 알렸습니다. 이 신고를 받고서야 소방본부는 목포해경에 상황을 알렸고, 6분 뒤 해경 경비정이 현장을 향해 출동했습니다. 그러나 최군은 구조선을 탈 수 없었습니다. 최군은 참사 여드레 만인 4월24일 4층 선미 객실에서 발견됐습니다. (▶ 처음 신고했는데…이제야 널 찾아 미안해 https://goo.gl/fsGrTU)

단원고 학생 양온유·김주아양도 친구가 먼저였습니다. 이들은 이미 갑판 위에 있어 다른 학생들과 곧 구조될 수 있었지만 친구를 구하겠다며 배 안으로 들어갔다 숨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2015년 12월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고 있는 고 김관홍 잠수사.
2015년 12월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에 출석해 증언하고 있는 고 김관홍 잠수사.

자발적 수색·후유증 시달리다 끝내…김관홍 잠수사
‘파란 바지의 구조 영웅’ 김동수씨도 트라우마 시달려

■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의인들

선량한 이들에게 세월호 참사는 가혹한 짐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6월 ‘세월호 의인’으로 불리던 김관홍 잠수사가 오랜 트라우마와 후유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참사 일주일 뒤 자발적으로 수중 선체 수색 작업에 합류했습니다. 당시 진도행을 말렸던 김씨의 아내는 그가 큰 공사 계약을 포기하고 세월호 구조를 택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거길 왜 갔냐고요? 세 아이의 아빠라서요 https://goo.gl/0CefTF)

당시 잠수사들은 바지선에서 컵라면으로 허기를 채우며 하루 너댓번씩 수심 40미터 바닷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김 잠수사 또한 무리하게 잠수를 한 탓에 목과 허리에 디스크가 왔고, 왼쪽 허벅지 마비 증상 등 후유증을 겪어야 했습니다. 급기야 20여년간 해 온 잠수를 접어야 했고, 아내의 꽃가게 일과 대리운전으로 생업을 이어가며 세월호 진상규명 활동에 앞장서 왔습니다. 2015년 12월, 4·16세월호참사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그는 “나는 당시 생각이 다 난다. 잊을 수도 없고 뼈에 사무치는데 고위 공무원들은 왜 모르고 기억이 안 나느냐”며 일침을 놓기도 했습니다. 김탁환의 소설 <거짓말이다>는 그의 실화를 토대로 쓰여졌습니다.

‘파란 바지의 구조 영웅’ 김동수씨의 사연은 여러 사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화물트럭 운전기사였던 그는 배 안의 소방호스를 이용해 단원고 학생 20여명을 구했지만 이후 심각한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2015년 세월호 특조위 1차 청문회에 참석해 증인의 답변을 듣던 그는 “억울하다”고 외치며 자해를 시도해 세월호가 남긴 심리적 상처를 환기시키기도 했습니다.

김지숙 기자 suoop@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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