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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사회일반

멍 때리지 못한 자 게 섰거라

등록 2017-05-01 17:07수정 2017-05-03 10:21

3회 한강 멍때리기 대회 심사위원 체험기
포도대장 옷 입고 ‘산만한’ 참가자 선별
개인 참가자·튀는 옷 입으면 점수 높아
참가자들 “우승보다 추억 만들어 기뻐”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열린 ‘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에 김미영 기자가 포도대장 옷을 입고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열린 ‘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에 김미영 기자가 포도대장 옷을 입고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
“대회 심사위원 체험기로 쓰는 게 어때?”

급조한 취재 아이템이 내 발등을 찍었다. 올해로 3회째를 맞는 ‘서울 한강 멍때리기 대회’ 관련 아이템을 냈다가 일이 커졌다. 대회를 주관하는 웁쓰양 컴퍼니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 “(멍때리는 사람을 찾아내는) 심사위원 체험기를 쓰고 싶은데요…(그건 안 된다고 해주세요, 제발).” “음…네, 그렇게 하세요.”

역무원, 교도관 등 이색 참가자들 눈길

올 봄 최고기온인 28도를 기록한 30일.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쉬는 날’인 일요일에 대회가 열리는 서울 망원한강공원에 서 있자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생각하는 일조차 멈추자는 멍때리기 대회에서 할 일이 많았다.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취재도 해야 했다.

오후 2시, 참가자 등록이 시작됐다. 교복·작업복·잠옷 등 다양한 복장을 한 사람들이 번호표를 받으러 접수대에 길게 줄을 섰다. 5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참가자는 모두 70명. 역무원·교도관·요리사·모델·주부·탤런트·외국인 유학생 등이 골고루 참여했다. 웁쓰양은 “도시의 축소판을 보여주고 싶어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을 가진 참가자들을 선발했고, 이들에게 되도록 자신을 드러내는 특색 있는 복장을 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이 다양한 만큼 참가 목적도 각양각색이다. 참가자들이 직접 쓴 보드판에는 “감옥살이를 벗어나 광합성이 하고 싶었다”(교도관) “만화나 게임이 없으면 심심해하는 초등학생 아들에게 멍때리기의 훌륭함을 가르쳐주고 싶어서”(주부) “지난해에 우승을 못해서”(택배기사) “멍때릴 수 없는 직업이라 마음껏 멍때리고 싶어서”(안전관리사·버스운전기사) “17년간 쉼 없이 일했는데 머리를 싹 비우려고”(애니메이션 감독) “즐거운 추억 만들려고”(말레이시아 유학생) 등이 적혀 있었다.

‘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멍때리면서 심사위원과 눈 마주친 참가자 ‘경고’

대회는 멍때리는 참가자들이 90분 동안 얼마나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했는지를 놓고 승부를 겨룬다. 대회 시작 전부터 종료 때까지 수시로 심박수를 체크하고(기술점수), 현장 관객들이 점수를 주는 인기투표(예술점수)를 합산해 순위를 매긴다. 웃거나 졸면 탈락이다.

심사위원은 총 3명. 저승사자처럼 갓을 쓴 웁쓰양과 포도대장 옷을 입은 두 명이 한 줄로 서서 참가자들 사이를 돌며 탈락자를 가려낸다. 웁쓰양이 노란색과 빨간색 종이가 앞뒤로 붙은 대형카드로 경고에 이어 퇴장 조처를 하면 포도대장들은 탈락자를 경기장 밖으로 끌어낸다. 현장 감독인 포도대장이 내가 체험할 일이다. 오후 3시, 대회 시작에 앞서 포도대장 도포를 덧입었다. 남자 체형에 맞춰 준비된 옷은 컸고, 모자는 묵직했다. 땀이 났다. 도포를 입으니 여기저기서 카메라가 우리를 향했다.

‘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열린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한 참가자가 탈락해 심사위원을 맡은 김미영 기자에 의해 경기장 밖으로 끌려 나가고 있다.
‘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열린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한 참가자가 탈락해 심사위원을 맡은 김미영 기자에 의해 경기장 밖으로 끌려 나가고 있다.
참가자들의 ‘멍력’(멍때리기 실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대회 시작 30분이 넘도록 탈락 행위를 하는 이들을 찾기가 힘들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웁쓰양이 걸음이 빨라지더니 한 번 경고를 줬던 34번 참가자 이헌규(40)씨 뒤에 다시 섰다. 빨간색 카드를 높이 들었다. 사회자가 “첫 번째 탈락자가 나왔다”며 외치자 취재 카메라가 순식간에 몰려왔다. 같이 포도대장을 맡은 김동현(21·자원봉사자)씨와 함께 이씨의 양팔을 붙잡았다. 토끼눈이 된 탈락자는 “왜요?”라고 물으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억울한 표정이었다.

사실 그의 멍때리기는 완벽했다. 그가 탈락한 건 함께 참여한 팀원들 때문이다. 마을버스 운전기사인 이씨는 초등학생인 아들 진성(10), 딸 다솜(9)이와 함께 추억을 만들고자 참여했다. 팀으로 참여할 경우 팀원 중 한 명이라도 멍때리기를 실패하면 전원 탈락이다. 땡볕 아래 앉아있기 힘든 아들딸은 번갈아가며 산만했고, 이씨 가족은 첫 번째 탈락자가 됐다. 이씨에게 “아이들 때문에요”라고 귀띔해주자 그제야 이씨는 고개를 끄덕이고 웃으며 대회장을 빠져 나갔다.

대회 시간이 끝나갈 때쯤 되자 힘들어 하는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긴 머리카락을 수시로 넘기며 나와 자주 눈이 마주쳤던 63번 참가자는 경고를 한 번 받았다. 입을 수시로 삐죽거리고, 손을 계속 움직이던 28번 여성 참가자 두 명은 결국 탈락했다. 훤칠한 키로 주목을 끌었던 남성 모델인 6번 참가자도 포도대장 팔에 이끌려 대회장을 떠났다.

우승은 잠옷을 맞춰 입고 ‘머~엉’이라고 쓴 담요를 제작해 덮은 11번 대학동창생 팀이 차지했다. “탈노동을 꿈꾼다”는 직장인 두 명과 ‘백수’ 한 명으로 구성된 이 팀은 매일 아침 출근하기 싫어 이불 속에 앉아 멍때리고 있는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했다는 이유로 높은 예술점수를 받았다. 현재 ‘백수’라는 김정식(28)씨는 “친구들과 만나 함께 준비하는 과정이 즐거웠다”며 웃었다.

‘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우승하려면 팀보다 개인으로, 의상은 튈수록 유리

“평소 부정승차하는 ‘진상 고객’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멍때리기로 풀려고 나왔다”는 역무원 조승익(28)씨는 특별상을 받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유명 애니메이션 <로보카폴리> 감독인 엄준영(41)씨는 “막상 해보니 평정심 유지가 쉽지 않더라. 17년간 쉼 없이 일하느라 ‘번 아웃’된 나에게 특별한 추억이 됐다”고 말했다.

참가자로 멍때리고 앉아 있었다면 몰랐을 ‘우승 비법’을 심사위원으로 참여해보니 알 것 같았다. 첫째, 튀어야 한다. 의상부터 눈에 띄어야 관객들로부터 예술점수인 스티커를 많이 받을 수 있다. 둘째, 참가에 의의를 두는 게 아니고 우승을 노린다면 혼자가 낫다. 내가 잘해도 팀원이 못 하면 동반탈락이다. 셋째, 도우미 서비스를 잘 활용하라. 참가자들에겐 색깔이 다른 카드가 제공되는데, 대회 도중 물과 안마, 부채질 같은 서비스를 요청하는 카드다. 카드를 들면 도우미들이 달려온다. 사용 횟수 제한이 없기 때문에 이를 활용해 잠시 쉬어가는 영리한 참가자들이 제법 보였다. 단, 심박수 변화가 없도록 평정심은 유지해야 한다.

‘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2017 한강 멍때리기 대회’가 30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한강공원에서 열려 참가자들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한강 멍때리기 대회는 서울에서만 벌써 3회째다. 지방 개최 요청도 많아 지난해 수원에서도 한 차례 열렸다. 이달에는 대전에서도 열린다. 2014년 처음 열린 멍때리기 대회는 국제적 유명세도 얻어 중국 베이징(2015년)에 이어 올해 8월엔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대회가 예정돼있다.

“멍때리기 대회와 참가자들이 궁금해 참가하게 됐다”는 탤런트 박세준(57)씨는 “멍때려보니 알겠다. 일상에서 쉬어가는 의미를 일깨우는 대회였다. 일상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인 거다. 즐거우면 그걸로 된 거였다”며 환하게 웃었다. 글 김미영 기자 instyle@hani.co.kr, 사진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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