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한열기념관 3층에서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이 기자회견문을 읽고 있다.
육군 22사단에 소속된 일병이 입대한지 5달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병은 목숨을 끊기 전 부소대장에게 “선임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하고 있다”고 보고했지만, 육군 쪽은 피해자를 ‘배려병사’로 지정한 것 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군인권센터는 20일 낮 서울 마포구 이한열기념관 3층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육군 22사단의 ㄱ일병(21)이 지난 4월 부대로 전입한 뒤 선임병들로부터 지속적인 폭언, 욕설, 폭행에 시달렸고, 19일 오후 외진차 경기도 성남시 분당 국군수도병원에 왔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밝혔다. ㄱ일병은 이날 동료와 함께 병원에서 치과 진료를 받은 뒤, 오후 4시께 홀로 병원 7층 도서관에 올라가 뛰어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ㄱ일병은 곧바로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 치료를 받았으나 약 30여분 뒤인 4시30분께 다발성 골절 등으로 숨졌다.
ㄱ일병이 병원 건물에서 뛰어내렸을 당시 갖고 있던 수첩에는 “부대에서 일을 하는데 폭언과 욕설을 들었다”, “부식을 받으러 가지 않는다는 이유로 선임들이 ‘짬 좀 찼냐’며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선임들이 ‘강냉이 하나 더 뽑히고 싶냐? 하나 더 뽑히면 부모님이 얼마나 슬퍼하겠냐?’고 폭언을 했다”, “불침번 근무 중에 선임이 목을 만지면서 얼굴을 쳐다보며 ‘왜 대답을 안하냐?’고 희롱했다” 등의 가혹행위가 구체적으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ㄱ일병의 수첩 내용은 사고 이튿날인 이날 오전 유족들이 헌병대를 통해 확인한 것으로, 가혹행위를 저지른 선임은 모두 3명인 것으로 알려졌다.
군인권센터는 ㄱ일병이 가혹행위를 부대에 알렸는데 후속조치가 부족했다고 주장했다. ㄱ일병은 지난 14일 부소대장에게 면담을 신청해 선임들로부터 받은 폭행 사실을 보고했다. 부대는 ㄱ병사를 ‘배려병사’로 지정하고 전방 근무(GOP)에서 제외했다. 하지만 ㄱ일병과 가해자를 분리하지는 않았다. 군인권센터의 임태훈 소장은 “ㄱ일병은 사망 당일 부대 동료와 함께 동료 아버지의 차를 타고 국군수도병원으로 이동했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특별한 보호와 관찰이 필요한 배려병사를 인솔간부 없이 외부로 내보낸 것은 군이 직무를 유기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ㄱ일병이 숨졌을 당시 갖고 있던 지갑에서는 “엄마 미안해. 앞으로 살면서 무엇하나 이겨낼 사진이 없어. 매일 눈을 뜨는데 괴롭고 매순간 모든 게 끝나길 바랄 뿐이야. 그냥 편히 쉬고싶어”라는 내용의 메모가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ㄱ일병의 유족들은 이날 오전 22사단 헌병대 수사과장에게서 이런 내용을 보고받았으나, 군은 ‘수사 자료’라는 이유로 유족들이 메모나 수첩을 촬영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군인권센터는 “인사참모가 유가족들에게 와서 700만원 정도를 위로금으로 전달하겠다고 밝힌 것 외에, 22사단 관계자 중 유족을 찾아오거나 연락해 사과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한다”며 “분노한 유족들은 현재 빈소조차 차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이번 사건이 발생한 육군 22사단은 지난 2014년 임 병장 총기 난사사건, 지난 1월 얼굴에 구타흔을 가진 일병이 휴가 복귀 직후 자살한 사건 등이 발생했던 곳이다. 군인권센터는 “피해자가 사전에 가혹행위를 신고했지만, 병영부조리의 기본 원칙인 피해자·가해자 분리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면서 ㄱ일병은 결국 죽음으로 내몰렸다”며 “가해자를 즉각 구속하는 한편, 책임자들에 대한 징계 조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편, 육군은 이에 대해 “어제 발생한 사고라 아직 내용을 파악하고 있다. 군인권센터에서 제시한 의혹을 포함해 한 점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철저하게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황금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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