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보리’ 놀이를 하면서 깔깔거리고,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배꼽 잡고 웃는 조카를 보는 게 좋다. 무슨 날도 아닌데 케이크에 불을 붙여주면 세상 행복해한다.
[토요판] 남지은의 조카 덕후감
8. 고모랑 다큐 찍을래?
“조카와 고모 이야기를 7분짜리 라디오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어요.”
한 통의 메일을 받고 웃음부터 나왔다. 황당해서가 아니라, 놀라워서다. 6살 조카와 나의 이야기가 이 정도로 특별하단 말인가 싶어 신기했고, <한겨레> 토요판에 연재하는 ‘조카덕후감’이 많이 읽히는구나 뿌듯했다. 동생 부부와 상의 끝에 조카한테 좋은 추억을 남겨주자 싶어 하기로 했다. “대현아, 고모와 다큐멘터리 찍을래?”라는 말에 뭐가 뭔지 모를 테지만 일단 “응”이라고 답은 했으니, 당사자의 허락은 받은 셈이다.
평소 조카와 데이트하는 모습을 담고 싶다고 했다. 조카와 어디를 자주 가는지, 조카를 언제 주로 만나는지, 조카와 만나서 뭘 하는지, 조카와 어딜 가고 싶은지 등 다양한 질문을 받았다. 피디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프로젝트는 어느새 ‘조카와 추억 쌓기’에서 ‘고모의 반성문’으로 둔갑했다. 생각해보니 조카와 특별히 뭘 하는 게 없었다. 동생이 사는 경기도 파주 인근에서 일이 끝나면 들르거나, 약속 없는 주말에 동생네 가서 저녁 먹고 조카와 꽁냥꽁냥 놀다 오는 게 전부였다. 그러고 보면 조카와 둘이서 놀이공원 한번 가지 않았다. ‘캐리 언니 만나게 해주겠다’는 약속도 아직 지키지 않았다.
그래 이참에 만회하자 싶어 이런저런 아이디어를 냈다. 조카가 죽고 못 사는 ‘캐리 언니’를 만나는 극적인 순간을 담으면 어떨까요? 조카 데리고 물놀이를 할게요. 키즈카페 가서 온종일 놀아줄까요?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공허함만 커졌다. 이게 내가 조카와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가장 행복한 순간일까? 이건 내가 조카와 하고 싶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하고 싶은 일이다. 생각해 보면 마음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둘만의 이벤트를 하지 않은 게 아니다. 그저 동생네에서 조카와 같이 저녁을 먹고, 먹여주고, 조카를 안고 거실에 앉아서 티브이를 보는 게 가장 행복하다. ‘쌀보리’ 놀이를 하면서 깔깔거리고, 가위바위보를 하면서 배꼽 잡고 웃는 조카를 보는 게 좋다. 무슨 날도 아닌데 케이크에 불을 붙여주면 세상 행복해한다. 조카한테 팔베개를 해주고 이불을 덮어씌우고 안으면 발버둥을 치면서도 못 이긴 척 안겨 있는 모습이 귀엽다. 좋아하는 화상 통화를 해주려고 친구들한테 전화를 돌리는 일도 수고스럽지 않다. 전화를 안 받으면 “고모 친구 바쁜가 보다”라고 말하고, 전화를 받으면 “우리 고모 잘 부탁해요”라고 말하는 조카를 보면 세상근심 다 사라진다. 볼을 내밀고 “고모 뽀뽀”라고 하면 “쪽쪽” 입으로 소리까지 내며 ‘서비스’해주는 조카를 보는 게 행복할 뿐이다.
그래서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평소처럼 조카를 만나 동생네에서 밥을 먹고 쌀보리를 하고, 강제 뽀뽀를 시키고 깔깔 웃는 모습을 담기로 했다. 이런 평범한 일상이 우리가 가장 즐거운 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카도 나와의 이런 평범한 일상이 행복할까? 고모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쌀보리일까?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