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 출입구 위쪽에 놓인 '정의의 여신상'.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조작 간첩 사건’ 같은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손해배상 등 국가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시효는 언제까지일까. 정부는 답을 알고 있다. 유엔 총회가 2005년 채택하고 한국도 찬성한 ‘국제인권법의 중대한 위반과 국제인도법의 심각한 위반 피해자를 위한 구제조치와 손해배상에 관한 기본 원칙과 지침’은 중대한 인권침해 범죄에는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런 국제인권규범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2011년 대법원은 ‘시효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천명하는 대신, 권리는 사라졌지만 과거사 사건에서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때 대법원은 특별한 기간 제한을 두지 않아, 법원과 피해자는 민법의 손해배상 소멸시효를 적용해 ‘재심 무죄 확정일로부터 3년’을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기간으로 봤다. 하지만 2013년 12월12일 대법원 1부(주심 박병대 대법관)가 민법의 시효정지 규정을 내세워 손해배상 소멸시효를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로 갑자기 못박으면서 ‘진도 가족 조작간첩 사건’의 박동운(72)씨처럼 억울한 사례들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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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한 차별 배상 ‘소멸시효 6개월’이라는 대법원 판결의 가장 큰 문제점은 똑같은 피해자인데 소송 청구 시기나 법원 재판의 속도 같은 우연한 차이로 큰 차별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박동운씨는 2009년 11월에, ‘재일동포 조작간첩 사건’ 이아무개씨는 2010년 7월에 서울고법에서 재심 무죄를 선고받았다. 두 사람 모두 형사보상 결정일로부터 6개월 뒤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씨의 재판이 박씨 재판보다 속도가 빨랐고 국가도 상고하지 않아 2012년 7월 서울고법의 손해배상 선고가 확정됐다. 하지만 2심이 2013년 7월에 선고되고 국가가 상고까지 한 박씨는 2013년 12월12일 대법원 선고 때까지 재판이 끝나지 않아 그 뒤 손해배상 청구가 기각됐다.
‘모자 조작간첩 사건’의 이준호·배병희씨와 ‘일본 관련 조작간첩 사건’ 김아무개씨는 모두 형사보상 결정일로부터 6개월이 지난 2010년 5월, 2010년 6월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하지만 김씨는 대법원의 ‘소멸시효’ 판결 전인 2012년 7월에, 이씨 모자는 ‘소멸시효 판결’ 이후인 2014년 1월에 대법원 선고가 나면서 희비가 엇갈렸다.
이상희 변호사는 “법원이 공권력의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를 구제하고 국가에 책임을 묻는 대신 국가 재정을 고려해 시효를 단축하는 등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며 “피해자의 손해배상을 차별하고 국가폭력에 면죄부를 주는 정의롭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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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 잘못, 헌재는 바로잡을까 ‘손해배상 청구 기각’이 확정된 과거사 피해자들의 마지막 희망은 헌법재판소다. 갑작스러운 대법원 판결로 배상금을 토해내야 할 처지에 몰린 박동운씨 등 여러 사건의 피해자들은 ‘형사보상 결정 확정일로부터 6개월’의 근거가 된 민법 시효정지 조항 등이 위헌이라며 2014~2015년 사이 각각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헌재는 4년째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 1월31일부터는 헌재소장의 장기 공백으로 재판관 9명이 채워지지 않아 주요 사건의 심리도 더 늦어지고 있다.
최근 과거사 해결 의지를 보이고 있는 법무부의 태도도 관심을 끌고 있다.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서 소멸시효를 주장해온 정부 방침을 바로잡을 기회이기 때문이다. ‘법무·검찰 개혁위원회’ 위원장인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논문 등을 통해 “(과거사 인권침해 사건에서) 국가의 소멸시효 주장은 파렴치한 것”이라며 “소멸시효 주장의 채택은 곧 사법부가 범죄의 방조자가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여러 차례 지적하기도 했다.
김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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