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주택도시공사와 희망제작소가 진행하는 ‘행복한 아파트 공동체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상생활 기술 나눔’ 프로그램에 참가한 서울 신내동 신내데시앙 주민들이 동네에서 세대를 아울러 할 수 있는 활동이 뭐가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요즘 날씨가 너무 추워서 세탁기가 안 돌아가기에 후배한테 물으니까 헤어드라이어로 녹이면 된대요. 해봤더니 되더라고. 이런 것들을 주민들한테도 알려주면 좋겠네요.”(김군수 임차인대표회장)
“동파뿐만이 아니라, 당장 도움이 필요한데 어디에 얘기하면 좋을지 난감한 문제들이 생길 때 같은 동 안에서 해결해볼 수 있지 않을까요? 아파트 1층에 메모지 붙일 수 있는 소통판을 만들어서 ‘언제까지 세탁기 쓰시러 오세요’라든가 ‘쌀이 너무 많은데 좀 가져가세요’ 같은 걸 붙여두면 좋을 것 같아요. 젊은 엄마들은 온라인 주민모임을 잘 활용하지만 연세 드신 분들은 못하시잖아요.”(주민 기숙영씨)
서울 신내동 아파트단지들 속 신내데시앙의 책울터 작은 도서관에 최근 모인 주민들 열댓명이 세 조로 나뉘어 ‘공동 버킷리스트 찾기’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울주택도시공사와 희망제작소가 진행하는 ‘행복한 아파트 공동체 만들기’ 사업 가운데 하나인 ‘일상생활 기술 나눔’ 프로그램이었다. 주민들이 발 벗고 나서 세대 간 벽을 허물고 사람 냄새 나는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취지다. 일상생활의 기술은 삶을 꾸려나가는 데 필요한 소소한 지혜로, ‘이웃’이 아닌 다른 데서는 배우기 어렵다. 이 이웃들과 공동 생활공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혜와 정보를 나누다 보면 아파트라는 삭막한 공간도 든든하고 따뜻해질 수 있다.
이튿날 저녁 중계동 중계센트럴파크 주민카페에도 이런 자리가 마련됐다. 주제는 ‘알쓸신잡 가이드북 만들기’. 동네 숨은 맛집이나 질 좋은 옷 싸게 파는 곳, 친절하고 세탁 잘하는 세탁소 같은, 동네에서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하지만 막상 검색하려면 막막한 ‘깨알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이었다. 같은 ‘동네 활동’이라도 참여하는 주민들이 하고 싶은 것이 다르기 때문에, 각 동네의 주제는 사전에 실시한 주민투표로 결정됐다.
이날 모임에선 김수진(40)씨의 정보력이 빛을 발했다. “(한국가스공사가 운영하는) 천연가스체험관에 가면 빨래건조기를 쓸 수 있어요. 직원이 아닌 사람도 이용할 수 있는 회사 구내식당이 아파트 근처에 몇 곳 있는데 ○○은 돈가스가 정말 맛있고, △△은 가격이 저렴해요. 아이들 데리고 한 번씩 가보세요. 시장 반찬가게 중엔 □□이 제일 훌륭해요.” 열댓명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우와” 탄성과 함께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요?” 하는 반응이 쏟아졌다.
서울주택도시공사와 희망제작소가 진행하는 ‘행복한 아파트 공동체 만들기’ 프로젝트의 ‘일상생활 기술 나눔’ 프로그램에 참가한 서울 중계동 중계센트럴파크 주민들이 맛집 등 동네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모임을 진행한 희망제작소 쪽은 주민들이 동네에서 맘 편히 말 걸 수 있는 새로운 관계망을 만들 계기를 마련하는 데 특히 공을 들였다. 조별로 활동비 10만원을 지급하면서 일주일 안에 할 수 있는 동네 활동을 해보라고 한 게 대표적이다. 일회성 만남에 그치지 않고, 동네 활동을 계기로 얼굴 한번 더 보고 연락처를 주고받으며 ‘이웃이 있는 삶’을 꾸려볼 수 있게 유도한 것이다.
신내동에서 조현(11)양의 이야기를 30~40대 주부들이 귀 기울여 듣던 조에선 주말에 가족, 친구들까지 함께 불러 아파트 놀이터에서 배드민턴도 치고 달리기 시합도 하기로 했다. 구자순(67)씨의 조에선 “아파트 근처에 새로 생긴 카페의 치즈케이크가 맛있다”는 한지윤(39) 책울터 도서관장의 소개로 그곳에서 ‘세대공감 수다’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김군수 회장의 조에선 당장 이날 저녁 볼링장에 가기로 했다. “동네에서 소통할 친구가 필요한 것 같다”며 조별 이야기에 적극적이던 노현정(36)씨는 “아이 맡길 사람을 찾아봐야겠다”며 신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동네에서 편안한 수다와 일상을 나누는, 이웃이라는 ‘비빌 언덕’ 하나가 각자에게 생길 것이라는 기대를 품기에 충분했다.
역시 세 조로 나뉜 중계동 주민들은 각각 △동네 반찬가게 비교 분석 △가장 맛있는 배달음식점 찾기 △아파트에 붙은 과외나 공부방, 요리교실 등의 생활정보 전단지 내용을 모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이웃과 공유하기를 하는 데 조별 활동비 10만원을 쓰기로 했다.
주민들의 만족감은 높아 보였다. 중계동 주민 채명희(39)씨는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동네에 뭐가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유모차 끌고 다니다 보니 멀리 갈 수가 없고 자연스럽게 동네에 관심이 생겼다”며 “이렇게 동네에서 편한 차림으로 같이 애 키우는 얘기도 하면서 정보를 나눌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신내동 주민 구자순씨는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다가 이런 프로그램을 한다는 아파트 안내방송이 나와서 한번 와봤는데, 여기서 손자들, 딸, 며느리 같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참 기쁘다”며 “여태 그냥 나와 가족이 잘 사는 거만 생각했지, 동네를 위해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 (다른 생각을 해보는) 좋은 기회가 됐다”고 했다.
프로그램을 기획한 안수정 희망제작소 연구원은 “공동체의 가치를 강조하면 주민들이 부담스러워하고 참여하기도 어렵다. 공동체 활동은 ‘의무’가 아니다”라며 “하지만 일상에서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이웃과 함께 가볍게 할 수 있는 것, 세대나 지역정보를 매개로 한 이런 활동에 한 발 정도만 담가보면 관계가 형성되고 이웃이 왜 필요한지 스스로 알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글·사진 조혜정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정책센터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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