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신길역 역사 내에서 열린 ‘신길역 리프트 이용 장애인 추락사망사건 유족 손해배상청구 소송 기자회견’에서 한씨의 유족이 발언하고 있다.
2017년 10월20일 오전 10시. 지체장애 1급 한아무개(62)씨가 탄 전동 휠체어가 높이 12m에 달하는 신길역 환승구간 계단 앞에 섰다. 베트남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상이군인이었던 한씨는 강동구 둔촌동에 있는 보훈병원에서 재활치료를 받기 위해 집을 나선 참이었다. 신길역 1호선에서 5호선으로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려면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해야 했지만, 역무원을 호출할 수 있는 버튼은 계단 왼쪽에 있었다. 전쟁에서 입은 부상과 수십년전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이 겹쳐 왼손을 쓸 수 없었던 한씨는 어쩔 수 없이 오른손으로 호출 버튼을 누르기 위해 계단을 등지는 방향으로 휠체어를 조작했다. 그 순간, 휠체어의 뒷바퀴가 계단에 걸려 한씨는 3m 아래 계단 중간 턱으로 추락했다. 이 사고로 머리에 심각한 외상을 입고 의식을 잃은 한씨는 3개월간 투병하다 지난 1월25일 끝내 숨졌다.
신길역 역사 내에서 경사로 휠체어 리프트를 타려다 숨진 피해자의 유족이 서울교통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한씨의 유족과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등은 15일 오전 한씨가 사고를 당한 서울 영등포구 신길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다시는 위험한 휠체어 리프트 사고가 재발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서울교통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낸다”고 밝혔다. 유족의 법률 대리를 맡은 사단법인 두루 이태영 변호사는 “역사 내 휠체어 리프트는 역무원없이 이용할 수 없게 되어있었고, 한씨는 역무원 호출 버튼을 누르려다 사고를 당했다”면서도 “서울교통공사는 리프트를 이용하기 전에 사고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고 밝혔다. 기자회견에 나선 한씨의 아들 역시 “서울교통공사쪽에서는 계속해서 책임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해왔다. 다시는 아버지같은 희생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소송을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지난해 10월 한아무개씨의 사고 직전 폐회로텔레비전(CCTV) 모습. 왼손을 쓰지 못하는 한씨가 오른손으로 직원 호출 버튼을 누르기 위해 자동 휠체어를 조작하고 있다. 유가족 제공.
서울교통공사는 한씨의 사고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입장이다. 공사 관계자는 “역사 내에서 발생한 사고에 공사의 책임이 있을 경우 보험을 통해 배상처리를 하는데, (한씨의 경우) 본인의 휠체어 조작 과실로 인해 사고가 발생했기 때문에 (공사의) 책임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소송을 제기한 유족이나 활동가들은 공사의 이같은 주장이 ‘직무 유기’라고 주장한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김성연 사무국장은 “리프트와 호출버튼이 설치된 구조를 보면, 역사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호출버튼을 누르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을 위험조차 사전에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씨가 사고를 당한 휠체어 리프트 현장을 보면, 직원 호출 버튼과 계단 끝과의 거리는 91cm에 불과했다. 전동휠체어를 조작해 안전하게 호출버튼을 누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공간이다.
15일 오전 한씨가 추락했던 신길역 환승구간 모습.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된 계단 왼편 배전상자에 ‘역직원의 도움이 필요한 고객께서는 호출버튼을 눌러주세요’라는 안내문이 써 있다. 신길역사는 한씨가 사고를 당한 뒤 계단 앞 바닥에 ‘진입 금지’라는 스티커를 붙였다.
장애인권활동가들은 지하철 등 공공시설에 설치된 경사형 휠체어 리프트로 인해 끊임없이 안전사고가 발생하고 있으며, 하루빨리 철거되어야 한다고 강조해왔다. 실제로 2001년 오이도역에서 휠체어 리프트의 와이어가 끊어지면서 1명이 숨지고 1명이 부상을 입은 사고 이후, 역사 내 휠체어 리프트 사고로 사상자가 발생한 주요 사건은 9건에 달한다.
서울시는 지난 2015년 ‘서울 장애인 이동권 선언’을 발표하면서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이 지하철역 입구에서 승강장까지 끊김없이 이동할 수 있도록 오는 2022년까지 37개 역사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27개 역사에서는 아직까지 엘리베이터만으로 이동하기 불가능한 구조다. 서울장애인차별철페연대 문애린 활동가는 “휠체어 리프트는 안전성·편의성 모두 보장되지 않는 위험한 시설”이라며 “장애인 이동권에 있어 교통공사뿐만 아니라 지자체의 책임도 함께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황금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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