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
고스트 스토리 ① 죽음이 하는 말
고스트 스토리 ① 죽음이 하는 말
한 도시(사진)가 있다. 일본과 미국, 농촌과 도심, 원도심과 신도시, 판잣집과 고층 빌딩, 항구와 공항, 굴뚝과 첨단이 공존하는 곳. 선거 때마다 표심 분포가 전국 상황과 유사해 한국 여론 지형의 축소판이라 평가받는 곳. 1970년대 이 도시의 한 장소를 포착한 사진 속에서 한국 근현대를 압축한 시간이 보인다. 이 도시엔 가난한 사람들이 마지막을 의탁하는 공공의료원이 있다. <한겨레>는 이곳을 거쳐 죽음을 맞은 195명(+2018년 1월 사망자 1명)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들은 이 병원에서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연고 없이 죽어간 사망자 전수다. 한 사회가 죽음을 대면하는 방식에서 그 사회의 가장 깊은 바닥이 노출된다. 세월호의 죽음을 다루는 정치가 그 사실을 아프게 확인시켰다. ‘포기’되고 ‘처리’된 죽음들이 말문이 닫힌 채 도시의 그늘을 떠돌고 있었다. 도시 구석구석과 골목골목을 걸으며 그들의 흐린 자취를 더듬을 땐 유령을 좇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죽었으므로 투명했으나 살았을 때도 보이지 않았다. 깨진 유리처럼 조각난 흔적들을 맞추며 불러낸 목소리. 누구도 울어주지 않았던 그들의 죽음이 산 자들에게 하는 말. 연재 기획 ‘고스트 스토리’를 시작한다. ※도시 이름과 사진 출처는 2회 기사에서 밝힌다. 글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사진 ㅎ도서관 제공
죽음은 삶만큼이나 불평등하다. 한 도시에서 가장 가난하게 살다 가장 가난하게 죽은 195명(2001~2017년 ○○시 공공의료원 무연고 사망자)의 자취를 더듬었다. 지난 17년 동안 뿌려진 그들의 흔적은 거리의 먼지에 덮이고, 행인들의 발자국에 지워지고, 도시의 소란에 묻혔다. 애도되지 않는 죽음은 기억되지 않았다. 그들의 삶과 죽음이 흘린 조각들을 맞추며 숫자와 통계 뒤에서 그들이 하는 목소리를 모았다. 기억되지 못한 자들을 기록하는 일은 역사가 되지 못한 자들을 위한 역사 쓰기이기도 하다.
판잣집-빌딩, 항구-공항, 굴뚝-첨단
공존하는 국내 여론 지형의 축소판
‘이 도시’에서 살다 공공의료원에서
17년 동안 연고 없이 죽어간 195명 병원·공사장·거리·바다에서 사망·발견
최연소 0살·최고령 97살·평균 58.6살
5분의 1이 변사, 그중 5명이 자살
간질환·알코올중독·영양결핍·폐결핵
선행사인에서 읽히는 가난한 삶들 경찰이 지문을 떴을 때 내 손가락들은 지문을 내놓지 못했다. 지문이 남아 있지 않을 만큼 열손가락 끝은 닳아 있었다. 검은 인주를 묻힌 발가락도 살갗이 뭉개져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는 나의 ‘정체’를 찾아 경찰이 내가 쓰러진 일터 주변을 탐문했다. 나는 영세 설비공장과 유통업체들이 모여 있는 산업단지에서 죽었다. ‘사람이 쓰러졌다’는 사장의 신고를 받고 구급차가 도착했을 때 나는 몽롱한 의식을 붙든 채 “괜찮다”며 돌려보냈다. 정말 괜찮다고 느낀 것인지, 병원비가 걱정됐던 것인지, 나도 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구급차가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쓰러졌고 구급차가 다시 오기 전에 죽었다. 급성심근경색으로 추정(허혈성 심질환 발견)됐다. 노숙을 오래 한 나는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의 무늬를 잃었다. 내가 밟아온 길과 통과해온 시간들이 지문과 함께 마모돼 자취를 감췄다. “나야 모르지. 자기가 박철식이라고 하니까.” ‘박철식’은 일당 벌이를 준 사장이 나를 부르던 이름이었다. 내가 정말 박철식이었는지는 과학수사도 밝혀주지 못했다. 수취인을 찾지 못한 내 죽음의 소식은 아무에게도 전해지지 않았다. 사망자의 이름 칸에 나는 안개처럼 기재됐다. “박철식으로 호칭되던 자.” 확인되지 않는 자의 죽음은 유언조차 할 수 없었다. 노상에 쓰러져 있던 내(2007년 당시 1967년생 추정·남)가 저체온증으로 죽었을 때 뱉지 못한 나의 마지막 말도 입속에서 얼어버렸다. ‘ㅎ슈퍼’ 앞길에서 차에 치여 의식이 꺼져갈 때 내(2012년 당시 미상·남) 눈에 담긴 이 세계의 마지막 풍경도 눈 속으로 가라앉았다. 끝까지 신원이 파악되지 않는 내가 말과 풍경을 삼킨 채 ‘미상자’(박철식 포함 5명)로 정리됐다. 내 속엔 아직도 울음이 있다. 나(최연소 사망자·2001년 당시 0살·여)는 이름도 얻지 못한 채로 전철역 화장실에서 죽어 발견됐다. 단일 노선이 환승역이 되고 이용객이 갑절로 늘어나는 동안 내가 버려진 화장실도 녹이 슬고 부식했다. 제대로 한번 울지도 못하고 죽은 나는 울며 나를 버렸을 어린 엄마의 가슴속에서 뒤늦게 울고 있다. 내 등엔 아직도 세월이 있다. 나(최고령 사망자·2008년 당시 97살·여)는 이름에 불로(不老)의 염원을 담은 동네에서 한 세기를 살았다. 나의 장수가 동네 이름 덕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연으로 견뎌온 100여년이 축복일 수만은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을 재앙처럼 등에 지고 살았지만 나는 인연 하나 남기지 못한 사람이었다. 말이 되지 못한 울음을 기록해준 역사는 없었다. 0살이든 97살이든 아무도 나를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몇 시간이든 97년이든 내가 이 땅에 살았음을 기록해주는 사람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었다. 가난이 사인(死因)으로 적히진 않았다 사인이 나의 죽음을 모두 설명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패혈증(사망자들의 ‘최종사인-중간선행사인-선행사인’의 빈도 분석 결과 27회)과 패혈성 쇼크(11회)로 죽었다. 다발성 장기부전(25회)으로 죽었고, 심인성 쇼크(14회)로 죽었으며, 뇌출혈(10회)로 죽었다. 사망 뒤 표기되는 최종사인은 명료하지만 불친절했다. 죽기까지 내가 처했던 삶의 조건(임준 서울시립대 도시보건대학원 교수 “최종 사인이나 급성기 질환보다 선행사인을 봐야 한다”)을 읽어주진 않았다. 나는 선행사인으로 간경화(25회)와 간부전(8회)을 앓았다. 술을 많이 마셨고(알코올 남용 8회), 영양결핍(8회)을 달고 다녔다. 폐결핵(7회)이 활성화(영양상태와 주거환경이 열악할 때)돼 몸을 갉았다. 노숙으로 저체온증(4회)이 따라붙었다. 나의 선행사인들엔 거리의 시간과, 그동안 뱉은 한숨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배어 있었다. 사인의 방향을 바꿔 살피면 나의 죽음은 삶의 마지막 선택인 경우가 있었다. 나(2002년 당시 72살·남)의 선행사인은 만성폐쇄성 폐질환이었다. 호흡곤란에 따른 뇌기능 장애가 있었다. 중간선행사인은 호흡중추 마비로 진단됐다. 나의 최종사인은 심폐정지였다. 오후 6시. 3층짜리 적벽돌 건물 외벽 가스배관에 줄을 걸었다. 줄에 목을 밀어 넣고 몸을 던졌다. 자동차 한 대로 꽉 차는 좁은 골목을 내려다볼 때마다 호흡이 가빴었다. 골목이 사람과 자동차로 뒤엉켜 목이 멜 때처럼, 줄로 목맨 나도 숨길이 막혀 허공에서 버둥거렸다. 호흡 장애를 겪어온 나조차 줄의 조임에 호흡이 끊기는 고통을 느끼는구나. 순간 줄에서 목이 빠져 건물 아래로 낙하했다. 응급처치 중 사망 선고를 들었다. 내가 평소 지병인 폐질환으로 삶을 비관해왔다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진술했다. 성격이 원만하지 못해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다고도 했다. 나는 죽음을 계획했지만 추락사는 계획하지 않았다.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질병과, 목에 줄을 감으며 불러들인 죽음(변사자 41명 중 5명이 자살)과, 예기치 않은 추락이 달성한 죽음 사이에서, 나의 최종사인은 너무 깔끔하고 매끄러웠다. 한번 놓치면 따라잡을 수 없다는 두려움으로 달리는 것들에 매달려 손 놓지 못하는 사람들의 도시는 냉정했다. 손을 놓쳐 버린 자들이 손 놓아 버린 삶 앞에서 도시는 늘 딴청을 부렸다. 가난과 절망은 사망 자료에 적히는 사인이 아니었다. 나(2008년 당시 51살·남)는 ㅇ역 전동차 차고지에서 누운 채 발견됐다. 일반인은 들어갈 수 없는 장소에 내가 어떻게 들어갈 수 있었는지 역 직원들도 파악하지 못했다. 달리던 것이 달리기를 멈춘 곳에서 나는 3월 초의 새벽을 견디며 오래 떨었다. 직원의 신고로 응급실로 실려 갔다. 50여분 뒤 심폐소생술을 받았고, 다시 50여분 뒤 숨을 멈췄다. 최종사인은 저체온증으로 추정됐다. 나의 집을 두고 직선거리 1.5㎞ 떨어진 전동차의 집에서 죽어간 이유가 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알코올 소견 없음)이다. 나(2003년 당시 53살·남)는 한겨울(1월) ㄷ역 지하상가에서 얼어갔다. 병원 이송 3개월 뒤에 죽었는데 폐에 쇼크가 왔다고 했다. ㅂ역에서 앰뷸런스에 태워진 나(2012년 당시 56살·남)는 묻는 말에 응답하지 않아 문진이 불가능했다고 구급대원이 병원에 전했다. 15시간 만에 눈을 감았다. 공원에서 죽어가던 ‘행려자’ 나(2003년 당시 40살·남)는 주위에 있던 다른 ‘행려자’의 신고로 병원으로 옮겨졌다. 한 사람의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인데 나는 아무리 죽어도 누군가의 눈물이 되지 못했다.
대형 빌딩들이 건설되고 있는 ‘이 도시’의 한 공사장 주변에서 천연기념물 저어새(흰색)와 민물가마우지(검은색)가 날개를 쉬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추적 두려워 주민등록 없이 산 20년
말소자의 불안정한 삶이 암으로 끝나
노숙중 동상으로 손발 지문 잃은 남자
일당일 하다 죽었으나 신원확인 불가 사체인수 포기 뒤 화장장으로 직행
도시 곳곳에 누적된 그들의 흔적
그 흐린 조각들을 불러 모아 구성한
죽은 자들이 산 자들에게 하는 말
“보이지 않는 나를 보이게 하라” ㄱ동의 방만큼은 이 도시에 처음 왔을 때부터 3년을 살았다. 7군데 주소를 흘러 다니다 5년 만에 다시 찾아간 자리도 그 방이었다. 2001년 그 방을 끝으로 나는 다시 거리에서 잤다. 되돌아간 거리에서 내가 확인한 원리란 ‘힘없이 늙은 자가 낄 수 있는 무리는 힘없는 늙은 자들뿐’이란 사실이었다. ‘처치 곤란한 자’로서 나는 그해 이 도시를 떠났다. 거주불명 처리된 지역으로 흘러가 거리에서 눕고 먹었다. 10년 노숙 뒤 이 도시로 복귀했을 때 ㄱ동의 방은 증발하고 없었다. 93만3916㎡짜리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철거(전기공급설비 예정지)됐다. 모두 5년 가까이 지낸 그 방은 정주하지 못한 내가 ‘머물 곳’으로 여긴 유일한 거처였다. 2011년 5월 병원으로 실려 갔을 때 의사는 “위암이 발견됐다”고 했다. 내 입에서 심드렁함이 튀어나왔다. “까짓 죽으면 그뿐이오.” 퇴원(6월) 한 달 만에 구급차가 찾아왔을 땐 고시원에 있었다. 친구가 비용을 대줘 거리를 병상 삼지 않을 수 있었다. 급격한 기력 저하로 ‘거동불가 상태’라고 신고됐다.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체중이 줄었다고 간호사가 말했다.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끌어냈다. “이제 죽을 테니 그뿐이오.” 재입원 20일 뒤 나는 죽었다. 죽어도 살아도 그뿐인 목숨의 부질없음. 단 한 차례 반전의 기회도 얻지 못한 나에게 날아오는 ‘네 탓’이란 시선의 부질없음. 책임 없음. 내가 터득한 마지막 원리는 그뿐이었다. 떠다니며 살았던 자들은 죽어서도 떠다녔다. 나는 죽어서도 국경 없는 노동(▶3회 ‘부르혼의 혼’)에 묶여 떠다녔고, 나는 죽어서도 분단의 정치(▶4회 ‘주민번호 111111-1111111의 운명’)에 갇혀 떠다녔다. 말갛게 지워진 것은 ㄱ동의 방만이 아니었다. 내(2007년 당시 69살·남)가 죽은 수평의 땅엔 수직이 들어섰다. 내가 살던 낮고 낡은 판자촌이 자취 없이 밀리고 26층 높이의 아파트(2014년 입주)가 올라갔다. 좁고 굽은 한 뼘 골목과, 그 골목을 기어 다니는 소리와, 그 소리로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연들이 말끔하고 조용한 아파트들로 대체됐다. 내가 지워진 이 땅에 무엇이 있었는지 외지에서 고용돼 온 경비노동자는 알지 못했다. 옛 기억을 찾아 이 땅을 떠다닐 때마다 나의 혼이 아파트 벽에 부딪혀 곤두박질쳤다. 내(2014년 당시 47살·남)가 죽은 건설 현장에선 1년 뒤 오피스텔(2015년 입주)이 솟았다. 기계 소리 대신 1층 상가를 드나드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완공된 건물을 채웠다. 15층(264가구) 건물을 짓는 공사장 지하 3층에서 나는 청소작업 중 의식을 잃었다. 오피스텔에서 우측 대각선으로 150m 떨어진 곳에 나의 주소지가 있었다. 나는 그 방에 거주하지 않고 여관을 옮겨 다니며 일용직으로 일했다. 방값을 내지 못한 나는 주인을 마주치지 않으려 피해 다녔다. 나는 여전히 그 방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오피스텔 지하를 맴돈다. ‘꿈’을 새겨 넣어 작명한 오피스텔을 떠돌며 발화되지 않는 목소리로 이루지 못한 ‘꾸우움’을 발음한다. ‘포기’되고 ‘처리’되고 ‘공고’되고 나는 포기된 사람. 나(2015년 당시 43살·남)는 170㎝에 39㎏으로 죽었다. 몸무게 20㎏이 줄어 병원을 찾아갔을 때 구멍 뚫린 폐에서 중증 결핵이 확인됐다. 나는 가족관계를 끊고 살았다. 아버지 어머니는 오래전에 돌아가셨고 누나와 동생은 서로를 살필 처지가 아니었다. 의식이 점점 희미해질 무렵 병원에서 누나들을 찾아 연락했다. 누나들은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무연고 사망’은 죽음의 최저 등급이었다. 내 주검을 거둬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법과 행정이 공인하는 용어(① 연고자가 없는 시신 ② 연고자를 알 수 없는 시신 ③ 연고자가 있으나 시신 인수를 거부·기피하는 시신)였다. 누나들 대신 온 남동생은 심폐소생 거부 각서를 쓰고 임종을 보지 않겠다며 돌아갔다. 그날 나는 육신의 눈을 감았다. 동생은 보호자 역할을 원치 않았다. 나와 무관함을 이야기하고 ‘사체포기 각서’(시신 인수를 거부하며 시신 처리를 위임하는 서약서)에 서명했다. 나(2002년 당시 53살·남)는 ‘직장’(直葬·안치실에서 화장장으로 바로 이동)된 사람. 열아홉살 딸이 사체 인수를 거부하며 쏟아낸 이야기가 죽은 나의 가슴에 박혔다. “친부·친모를 모르고 살았어요. 주민센터에서 소녀 가장 지원을 받으며 간신히 살았어요. 아버지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땐 더 원망스러웠어요. 인간적 동정심도 전혀 없어요. 지금 남의 집에서 힘들게 살고 있어요. 행정기관에서 처리해 주세요.” 관할 기관(변사자는 시신이 발생한 자치단체, 기초생활 수급자는 수급을 관리하는 자치단체)의 가족 찾기와 가족의 사체포기를 거쳐 나의 무연고가 확정(장사 등에 관한 법률과 대통령령 등에 따른 무연고 ‘처리’ 지침)됐다. 나는 빠르게 소각됐다. 딸을 원망할 순 없었다. 죽어서 혈육에게 포기당한 사람이나 죽은 혈육을 포기하는 사람들에게 지난 시간이 몇 마디 말로 요약될 순 없었다. 나는 ‘처리’되고 ‘공고’되는 사람. 나(2002년 당시 48살·남)는 인수되거나 포기되길 다만 기다릴 뿐이었다. 나는 178일(최장 안치자는 2013년 사망한 몽골인으로 200일) 동안 병원 냉동고에 있었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뼛가루가 되는 데 반년이 걸린 나는 잃어버린 물건처럼 자치단체 게시판에 ‘공고’됐다. 나는 무연고 납골당에 봉안돼 수많은 ‘다른 나’를 만났다. 그곳에서 인연 없는 나와 내가 오직 무연(▶5회 ‘무연이 인연’)으로 연결됐다. 나의 죽음 값은 50만~75만원. 나는 규정된 비용(17년 사이 25만원 인상)으로 처리됐다. 화장용 수의와 관 등 기본 품목 7가지로 염해지고 입관됐다. 수의를 입기 전 사진과 입은 뒤의 사진, 관에 누운 사진을 첨부해 병원은 관할 자치단체에 입금 요청(홈리스행동 “75만원은 빈소 마련 등 존엄한 삶의 마무리를 위한 ‘장례’를 원천적으로 배제한 금액”)했다. 나는 비용 지급이 거부된 사람. 나(2001년 당시 46살·여)와 나(2002년 당시 48살·남)는 화장되기까지 98일과 178일이 걸렸다. 일부 자치단체는 나의 ‘처리’가 장기화되면서 불어난 안치료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 거부 이유로 예산 부족(2000년대 초)을 말했다. 병원이 안치료 손실을 보전하겠다면 시청에 요구하라고 했다. 예산 반영을 두고 구청과 의회가 마찰을 빚을 것이라고도 했다. 병원은 결국 안치료 전액을 감액했다. ‘귀중한 예산’을 쓰기에 나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나는 주검으로서만 필요한 사람. 열아홉살 딸이 원망을 쏟아낸 나(2002년 당시 53살·남)와 자치단체가 안치료 지급을 거부한 나(2001년 당시 46살·여)는 대학병원으로 보내져 해부(2001~2003년까지 11명)됐다. 죽으면 해부대에 눕겠다고 사전에 의사를 밝힌 것은 아니었다. 그땐 법(시체 해부 및 보존에 관한 법률)이 그렇다(인수자가 없는 시신 발생 때 자치단체장이 의과대학장에게 알리도록 한 조항으로 2015년 11월 위헌 결정)고 했다. 살아 있을 때 거추장스러운 존재였던 나는 죽었을 때만 쓸모를 인정받았다. 나는 ‘변사 영업’ 대상도 못 되는 사람. 연고 있는 변사자가 발견되면 시신 쟁탈전이 벌어졌다. 변사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는 경찰이 특정 장례식장으로 시신을 보낸 뒤 리베이트를 받는 일이 흔했다. 병원 없이 장례식장만 운영하는 업체들은 변사자 유치가 매출에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변사자를 두고 벌이는 경쟁을 조율하느라 경찰이 업자들을 불러 유치 순번을 정해주기도 했다. 장례비 치를 유족 없이 무연고로 죽은 나는 ‘탐낼 물건’조차 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떠난 ‘이 도시’의 한 구도심에서 빈집이 부서진 채 방치되고 있다. 박기용 기자 xe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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