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22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사법 농단’ 의혹의 핵심으로 지목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이 사용했던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지난해 ‘디가우징’(강력한 자성을 통한 파일 영구 삭제)을 통해 복구 불가능한 상태인 것으로 26일 확인됐다. 법원행정처는 또 디가우징하지 않은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이 사건 주요 관련자가 쓰던 컴퓨터 하드디스크의 검찰 제출을 거부했다.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는 이날 오후 법원행정처에서 일부 자료를 넘겨받은 뒤 취재진을 만나 “(행정처 회신을 통해) 양 전 대법원장이 쓰던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퇴임 뒤인) 지난해 10월 디가우징된 사실을 확인했다. 박병대 전 처장의 하드디스크도 디가우징됐다고 하는데,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다”고 밝혔다.
법원행정처는 디가우징 논란이 커지자 “대법관·대법원장이 사용한 컴퓨터는 그 직무 특성상 임의로 재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해 ‘사용할 수 없는 장비’로 분류된다. 이에 따라 완전 소거 조치를 위해 디가우징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은 이날 퇴근길에 기자들과 만나 “(디가우징은) 해당 피시 사용자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해,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디가우징을 결정했음을 내비쳤다.
양 전 대법원장은 지난해 9월22일 퇴임했다. 그가 쓰던 컴퓨터를 디가우징한 지난해 10월은 김명수 대법원장이 사법 농단 의혹에 대해 “당장 급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라고 밝히면서 재조사가 임박한 시점이었다. 일선 판사들도 “의혹 규명을 위해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보존해야 한다”고 요구하던 때였다.
법원행정처는 또 검찰이 요청한 임종헌 전 차장 등이 쓰던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대해서도 “현재 제기되고 있는 의혹과 관련성이 없거나 공무상 비밀이 담겨있다”는 등의 이유로 제출을 거부했다. 또 재판 거래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검찰이 요청한 공용 휴대전화 및 이메일 기록, 법인카드 사용내역, 관용차 운행일지도 제출하지 않았다. 대신 사법 농단 관련 410개 문건 파일 중심으로 자료를 검찰에 넘겼다. 검찰 관계자는 “410개는 전체 컴퓨터 파일의 0.1%에 불과하다”고 했다. 더구나 법원행정처의 이런 대응은 김 대법원장이 지난 15일 대국민 담화에서 밝힌 “검찰 수사 적극 협조” 입장과도 차이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검찰은 컴퓨터 하드디스크 실물을 확보하는 것이 수사의 관건이라고 보고, 행정처에 대한 압수수색영장 청구 등 강제 조사에 착수할 가능성을 내비쳤다. 검찰 관계자는 “법원 판례를 보면 하드디스크에서 추출한 자료의 경우 (당사자) 본인이 법정에 나와서 자발적으로 작성 여부를 인정하거나 ‘로그 기록’이 포함돼 있지 않으면 증거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하드디스크 원본 분석을 우리가 직접 해야 한다”고 했다. 또 디가우징된 양 전 원장 등의 하드디스크에 대해서도 “수사기관에서 복구 가능성을 시도해봐야 한다”고 했다. 이에 법원행정처는 “하드디스크 임의제출 가능성은 열려있다”며 여지를 남겼다.
강희철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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