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절충적 판단으로 ‘우회로’
‘처벌조항 합헌’ 유지하면서
‘처벌은 안된다’ 확실한 신호
대법원에 공 넘겨 무죄판결 길 열어
하급심 먼저 무죄선고 나올수도
수감중인 100여명 풀려날지 주목
과거 사건 재심·보상은?
처벌조항 위헌판결 나야 소급적용
아직은 재심·형사보상 쉽지 않아
대법원 특별사면 가능성도
28일 헌법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해 ‘대체복무제 없는 처벌은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도 2019년 말까지 경과기간을 두는 헌법불합치 결정을 하면서 수사·재판 중이거나 수감된 병역거부 당사자 ‘구제’가 어떻게 될지에 관심이 쏠린다. 당장 여호와의 증인을 믿는 일가족이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손자가 대를 이어가며 옥살이를 하는 일은 없게 됐다.
■ 검찰·법원, 기소·선고 일단 중지 헌재 내부에선 이번 결정이 “현재의 재판부 구성에선 최대치”라는 평가가 나온다. 일부 재판관이 막판까지 병역의무 이행자와의 ‘형평성’을 고민한 탓에 핵심 쟁점인 병역거부 처벌 조항은 합헌으로 결론났지만, ‘양심에 따른’ 이들을 구제하는 길을 열어놓는 ‘우회로’를 찾았다는 것이다.
헌재가 대체복무제 ‘데드라인’으로 국회에 제시한 2020년 1월1일 이후부터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사법처리는 불가능해진다. 그 이전이라도 검찰 수사와 기소는 보류될 것으로 보인다. 유죄가 확정돼 수감된 이들은 현재 100여명(여호와의 증인 자체 집계)인데, 법무부가 위헌 취지에 따라 가석방이나 형 집행정지를 고려할 수도 있다. 반면 수감자 대부분이 형기(징역 1년6개월)를 상당 부분 채운 상황이기 때문에 만기출소할 가능성도 제기된다.
양심적 병역거부로 징역 1년6개월의 처벌을 받았던 백종건(왼쪽)씨가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대체복무제 없는 병역법 규 정에 대한 헌법불합치 결정이 나온 뒤 같은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병역거부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대한변호사협회는 지난해 12월 변호사법의 결격 사유를 들어 백씨의 변호사 등록을 거부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관건은 이미 병역법 위반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인 경우다. 하급심은 최대한 선고를 미루면서 올해 하반기로 예상되는 대법원 전원합의체(전합) 판단을 기다릴 가능성이 크다. 심리 과정을 잘 아는 헌재 관계자는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면 법원이 유죄 선고할 필요가 없어진다. 전합에서 판례를 바꿀 것으로 본다”고 했다.
기존 대법원 유죄 판례에 반하는 하급심 무죄 판단이 80여건에 달했던 점에 비춰, 헌재의 위헌 취지를 살려 전합 판단 전에라도 적극적으로 무죄 선고를 내리는 재판부가 나올 수도 있다. 다만 하급심에 따라 유무죄 판단이 갈릴 가능성도 있다. 2009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참가자 처벌에 적용된 ‘야간 옥외집회 금지’ 집시법 조항에 대해 헌재가 헌법불합치를 결정하자, 하급심에서 ‘각기 따로’ 판결이 쏟아지며 혼란이 가중됐다. 이에 헌재 다른 관계자는 “처벌은 안 된다는 신호가 뚜렷하기 때문에 유죄 선고는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다.
■ 대법원으로 넘어간 공 양심적 병역거부 사건에 무죄 판결을 내렸던 한 판사는 “처벌 조항 자체에 위헌을 선언하면 병역기피자나 재심 등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헌재가 절충적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는 “결국 처벌 조항에 대해서는 대법원으로 공이 넘어간 셈”이라고 했다. 대체복무제 도입에 찬성하고도 처벌 조항은 합헌이라고 판단한 강일원·서기석 재판관도 “양심적 병역거부는 병역법이 규정한 처벌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다른 판사는 “대법원에서 무죄 선고를 하기 훨씬 편해진 측면도 있다”고 했다.
공을 넘겨받은 대법원은 심리에 고삐를 죌 것으로 보인다. 헌재와 최고법원 경쟁을 벌여온 대법원으로서는 대법원이 가진 법률 해석 권한을 최대한 활용해, 최근 전원합의체로 회부한 병역법·예비군법 위반 사건에 대한 신속한 판단을 통해 혼선을 줄일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은 오는 8월30일 공개변론 뒤 이른 시일 안에 선고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 재심 절차 어떻게 수천명의 ‘병역거부 전과자’들이 재심을 통해 ‘빨간줄’을 지울 수 있을지도 중요하다. 헌법재판소법은 처벌 조항 위헌을 선언할 경우 과거 처벌에까지 소급 적용하도록 규정한다. 이 경우 해당 조항에 대해 헌재의 마지막 합헌 결정이 나온 2011년 8월31일 이후 형이 확정된 이는 재심을 청구해 무죄를 선고받고, 구금일수에 따라 형사보상금도 받을 수 있다. 병무청 자료를 보면 대략 3500여명 정도다.
헌재는 처벌 조항 자체에 대해서는 위헌을 선고하지 않아 재심 전망은 갈린다. 법원 관계자는 “처벌 조항은 합헌 결정이 났기 때문에 헌법재판소법 조항만 놓고 보면 재심 사유가 되기 힘들어 보인다”고 했다. 반면 헌법연구관 출신인 노희범 변호사는 “처벌 조항에 대해 깔끔하지는 않지만 실질적 위헌을 선언했기 때문에 재심이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고 짚었다.
병역거부 사건에 무죄 판결을 했던 또 다른 판사는 “대체복무제 미비에 따른 형사처벌 문제점을 지적하고도 처벌 조항은 합헌이라고 한 것은, 재심과 형사보상을 어렵게 하려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법조계 일부에선 재심이 어려울 경우 ‘전과’로 인해 변호사·의사 자격 등을 얻지 못하는 이들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구제하는 방안도 제기된다.
현소은 김민경 고한솔 기자 s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