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4·3 수형인들의 마지막 재판
④ 다시, 기다림의 시간
④ 다시, 기다림의 시간
제주 4·3 수형인들이 지난 14일 재심 청구에 대한 마지막 심문기일을 앞두고 제주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김평국 할머니가 말했다
“땅속에 묻어두고 산 70년
세상이 알게되니 기분이 좋아" 최초 판결 존재 인정돼야
재심 개시 결정도 가능
법원 "가급적 빨리 결론내겠다"
긴 기다림이 다시 시작됐다 제주 4·3 수형인들은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은 군사재판에서 징역형을 선고받아 전국 형무소에 수감됐던 사람들로, 수형인 명부를 보면 2530명의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두 군사재판의 역사적 맥락은 차이가 있다. 1948년 12월 군사재판은 같은 해 10월 무장대 토벌 명목으로 해안가로부터 5㎞ 이상의 중산간 마을 민간인 출입금지, 11월 계엄령 선포의 연장선에서 진행됐다. 그러나 군·경의 강경 진압 탓에 무장대와 관계없는 제주 주민들까지 학살됐다. 이때 학살은 피했지만 무장대 관련자가 아니냐며 잡혀 온 사람들을 형법 제77조 내란죄 위반으로 처벌했던 재판이 1948년 12월 군사재판이다. 이때 제주 주민들은 학살을 피해 남녀노소를 따지지 않고 산으로 도망갔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이 산에서 보내는 1948년 겨울은 피난민들에게 혹독했다. 1949년 5월10일 총선거를 앞둔 3월2일에 창설된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 사령관 유재흥 대령은 진압뿐 아니라 주민들에게 “하산하면 과거의 죄를 묻지 않고 생명을 보장해주겠다”는 ‘선무 공작’을 시작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 보고서>를 보면 그는 제주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해안선에서 위로는 다 태워버려 없어진 상태였고, 산중에는 피난민 2만명 가량과 무장공비 230명 가량이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부는 양씨 사례처럼 ‘귀순자’를 바로 용서해줄 생각이 없었다. 이날 법정에 나온 박동수(85)씨도 양씨처럼 1948년 겨울 “토벌작전이 시작되니 살기 위해 산으로 피신했다.” 박씨가 살던 제주도 애월읍 소길리도 중산간 마을로, 군·경의 소개령 와중에 학살이 벌어졌다. 박씨는 “아버님도 형님도 군인한테 돌아가셨다. 아마 1949년 3월 잡혔을 것이다. 고사리가 나던 때였으니까”라고 말했다. 살기 위해 도망친 박씨에게 경찰은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제주도 애월읍 신엄 지서에서 “직사게 맞은” 박씨는 제주농업학교 수용소에 갇혀 고문을 받았다. “당시 질문은 단순합니다. 봉홧불을 어떻게 올렸냐, 지서를 습격했냐, (산사람에게) 쌀을 어떻게 올렸느냐…. 아니라고 하면 두들겨 패니까, 고문하니까 거짓말로 예예 한 거죠. 고문이 심해서 흉터가 허벅지에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과거 증언 때 “관덕정 앞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고 진술했던 박씨였지만, 이날은 “재판이라고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다르게 말했다. 85살의 고령, 70년의 세월은 박씨의 기억을 흐릿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함만은 잊지 않았다. “제주항에서 목포항까지, 목포항에서 인천형무소까지 가는 과정은 솔직하게 너무 억울했습니다. 인간 대 인간으로 취급을 안 해줬어요. 오늘처럼 재판장님, 검사님, 변호사님 앞에서 이런 과정을 밟고 실형을 받았으면 덜 억울합니다. 이런 과정을 지키지 않고 인천형무소 마당에서 죄명도 안 알려주고 누구는 20년, 누구는 7년, 누구는 5년…. 그게 뭐 군법에 있는 건지 아리송합니다.” 한라산으로 도망갔다 내려온 주민 중 1659명 중 형이 확인된 1657명은 1949년 6월23일~7월7일까지 열 차례 열린 군사재판에서 사형(345명, 20.8%), 무기징역(238명, 14.3%), 징역 15년(308명, 18.6%), 징역 7년(706명, 42.6%), 징역 5년(13명), 징역 3년(25명), 징역 1년(22명)을 선고받았다. 대부분이 토벌대에 쫓겨 피난 간 중산간 마을 주민들이었다. 죄명은 국방경비법 제32조 적에 대한 구원통신연락, 제33조 간첩죄 위반. 변호인은 재심 청구서에서 “계엄 해제 이후라 군사법원인 군법회의는 민간인에 대한 관할을 갖지 못했다. 국방경비법이 부당하게 민간인에게 적용돼 사실상 학살의 법적 도구로 사용됐다”고 지적했다. 지난 14일 제주지법 201호 법정에선 제주 4·3 재심 청구에 대한 마지막 심문이 열렸다. 지난해 4월19일 재심을 청구한 지 1년 2개월이 흘렀다. 이날도 1949년 군사재판을 받은 ‘할머니’ 김경인(86)·김순화(85)·박순석(90)씨가 법정에 나왔다.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 얼굴까지 다친 김경인씨는 변호인의 질문에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에휴!”, “아이고!”를 여러 차례 뱉어냈다. 내내 떨던 김씨는 “그저 죽기 전에 죄만 벗겨줍서”라며 두 손을 빌었다. 부모님을 총살로 잃은 김순화씨는 부모님 행방을 묻는 경찰에게 “학살당했다”고 말했다가 뺨을 맞은 뒤로 그 말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일본에 유학을 다녀와 우체국 전화 교환원으로 일했던 박순석씨는 일본어 ‘조센’을 ‘한국’이 아닌 ‘조선’으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렸다. 산으로 도망갔다 1949년 군사재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은 박씨는 “내 이야기를 글로 써주겠다더니 몹쓸 병에 걸려 누워있다”는 남편과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준 외손녀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세 할머니 이야기를 끝으로 요양원에 있어 법정에 오지 못한 1명을 제외한 17명의 당사자 심문은 4개월 만에 끝났다. “김평국 할머니가 그날 너무 떨어서 못한 이야기가 있다며 한 말씀 꼭 드리고 싶다 하십니다.” 재판이 끝날 무렵 임재성 변호사가 말했다. 지난 3월19일 17명 중 처음으로 법정에 섰던 김평국(88)씨가 임 변호사 옆에 앉았다. 김씨는 “개인 재판이 아닌 공동 재판이니까 먼저 끝났다고 나 몰라라 할 수가 없었다. 방청석에 앉아서 힘이 돼주는 것도 우리의 일”이라며 재판 내내 법정을 지켜왔다. “재판이라는 거를 처음 경험하는데, 저같이 늙고 시골에서 자란 사람들은 재판이 이런 걸 아주 몰랐죠. 세월은 자꾸 가는데 백살이 되기 전에 재판이 완전히 끝나서 우리가 이겼구나, 곱게 끝났구나 하는 걸 보고 싶기도 합니다. 나이만 안 먹었으면 몇년이 흘러도 괜찮습니다. 나이가 먹어가니까 마음이 급해요. 재판장님이 재판을 될 수 있으면 빨리 끝내서 저희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얘기하니 좋아졌습니다. 땅속에 묻어두고 70년을 살지 않았습니까. 재판이 시작돼서 우리도 숨도 쉬게 되고 세상 사람들이 다 알게 되니 기분이 좋은 겁니다. 그래도 빨리빨리 끝나서 ‘이제 죽어도 을큰(마음에 모자라 아쉽거나 섭섭한 느낌이 있다는 뜻의 제주도 사투리)하지 않다’는 말이 나오게 도와주십시오.” 판결문 없어도 재심은 가능 이날 심문을 종결한 재판부 고민은 판결의 존재 여부다. 4·3 수형인들을 감옥에 보낸 두 번의 군사재판은 법적 절차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아 공소장, 재판 기록, 심지어 판결문도 존재하지 않는다. 재심은 고문과 불법구금 등이 인정되면 ‘유죄의 확정판결’을 다시 판단해달라는 절차이기 때문에, 판결이 없다면 재심은 불가능하다. 재판 전까지 알려진 유일한 공식기록은 ‘수형인 명부’뿐이었다. 1999년 정부기록보존소(현 국가기록원)에서 발견된 수형인 명부에는 1948년과 1949년 군사재판에서 처벌받은 2530명의 이름, 주소, 판결, 언도 일자, 형무소 등이 적혀있는데 당사자 증언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그런데 4·3 수형인 변호인은 재판 과정에서 국가기록원에 보관됐던 오영종(88)·현우룡(93)씨의 군 집행 지휘서를 발견했다. 군사재판에서 판결이 확정돼 즉시 집행해달라는 내용으로 이름, 판결 언도일, 죄명, 집행명령일, 판결 결과가 적혀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재판에서 변호인들은 1948~1949년 육군본부 법무감실 기록심사과장으로 일했던 고원증씨에 대한 국방부의 증언 청취록을 법원에 제출했다. 2005년 진행된 인터뷰에서 그는 “(군사재판 기록을) 본 적이 있다”며 “사형언도를 받은 사람은 바로 사형집행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하는데, 내가 당시 기록심사과장으로써 확인을 하였고 경무대(청와대)에 직접 가서 결재를 받아 전화로 집행해도 좋다는 연락을 했다”고 말했다. 다만 관련 기록은 “6·25 전쟁 당시 육군본부가 1950년 6월28일 새벽에 철수하였는데 전선 상황이 위급해 각 국실별로 휴대하지 못하는 것은 소각했다고 들었다”고 고씨는 밝혔다.
제주 4·3 수형인인 김평국(88)씨가 지난 14일 재심 청구에 대한 마지막 심문을 마치고 제주지법 앞에 앉아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