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재판’의 결론을 미루는 대가로 외교부로부터 해외 파견 법관 자리를 추가로 얻어내려 한 정황이 드러났다. 대법원이 강제징용 재판의 결론을 5년이나 미루는 사이 소송을 낸 피해자들은 잇따라 숨졌다.
23일 <한겨레> 취재를 종합하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은 2015년 주오스트리아 대사에게 “외교부 관계자와 ‘징용 사건’ 관련 외교부의 의견서 제출을 협의했다”며 “주오스트리아 대사관에 법관을 파견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자”고 요청했다고 한다.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일본 기업의 배상책임을 인정할 경우 일본과 관계가 악화할 수 있다고 보는 외교부 입장을 고려해주는 대가로 법관의 해외 추가 파견을 요청한 셈이다. 대법원은 2010년 중단됐던 법관의 재외공관 파견을 2013년 재개한 뒤 외교부에 지속적으로 파견국을 추가해달라고 요청해왔다.
임 전 차장의 이런 ‘거래 시도’는 2013년 9월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는 대법원이 2012년 5월 ‘전범 기업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취지로 파기한 사건이 하급심을 거쳐 애초 판결 취지대로 대법원에 올라와 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해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면서 일본의 배상책임에 대한 정부 입장이 뒤흔들리던 시기였다.
당시 행정처는 ‘일본 공사가 2012년 6월 방문해 판결이 확정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했다’는 외교부 ‘고충’을 접수한다. 또 ‘재판을 미뤄 외교부에 절차적 만족감을 주는 방안’을 검토한다. ‘판사들의 해외 파견’과 ‘고위법관 외국 방문시 의전’ 등을 맡고 있는 외교부와 일종의 거래를 시도한 셈이다. 동시에 오스트리아 등 재외공관 파견 확대 방안 문건을 만들며 실행에 착수한다. 이 사건은 지금껏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특히 문건에는 행정처가 외교부와 징용 재판 관련 ‘절차적 정보’를 ‘공유’하며 소송을 꼼꼼히 ‘기획’하는 내용도 있다고 한다. “피고 측 변호사를 통해 외교부 입장을 담은 의견서를 제출하게 한다”, “변호인 선임신고서 접수 직후 외교부와 상의한다”, “국외송달을 핑계로 자연스럽게 심리불속행 기간을 넘긴다” 등의 내용이 등장한다. 이런 방안은 실제 일부 실현되거나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소장이 일본 기업들에 송달되는 과정이 늦어지며 소송이 지연돼 소송을 낸 징용 피해자 9명 중 7명이 사망했다.
재판 지연 대가로 파견을 계획하고, 실제 이를 추진한 정황 등을 종합할 때 다른 ‘재판거래’보다 사안이 무겁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때문에 법조계에선 행정처가 외교부는 물론 청와대와 교감했을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2015년 3월 행정처 문건에는 “‘주일대사’를 지낸 이병기 대통령 비서실장이 징용사건에 대해 청구 기각 취지의 파기 환송 판결을 기대할 것”을 예상하는 대목이 나온다. 파기환송까지 할 명분이 없자 최대한 미루는 절차를 택한 것으로 풀이된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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