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 6월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시흥동 집 인근 공원에서 재임 시절 일어난 법원행정처의 재판거래 파문과 관련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조선일보>에 상고법원 홍보를 위한 설문조사와 좌담회, 특집기사 등의 게재를 주문하면서 그 대가로 10억원에 가까운 법원 예산 일부를 광고비로 지급하기로 계획한 것으로 드러났다. 법원행정처가 ‘기사 거래’를 시도한 것으로, ‘국고횡령 예비’ 혐의로 수사할 사안이라는 지적까지 나온다.
법원행정처가 31일 추가로 공개한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행정처 문건 196개 가운데 2015년 4월25일 기획조정실과 사법정책실이 함께 작성한 ‘조선일보를 통한 상고법원 홍보전략’ 문건 등을 보면, 당시 행정처는 <조선일보>를 통해 상고법원을 집중적으로 홍보하기로 하고 조선일보 쪽에 전국 변호사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 지상 좌담회, 조선일보 내부 필진의 칼럼과 외부 기고문 게재 등을 제안한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일보를 통한 상고법원 홍보전략’ 문건은 이들 특집기사를 상고법원 설치법안이 회부된 2015년 6월 임시국회 개원 직전인 5월 넷째 주부터 6월 첫째 주 사이에 집중적으로 게재하기로 계획하고 있다. 문건은 설문조사의 경우 “(서울지방변호사회보다) 조선일보를 주체로 실시하는 방안이 설문조사의 성공 가능성을 확보하고 조사결과의 효과적인 홍보에 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문건은 이어 “조선일보를 조사주체로 할 경우, 전문 설문조사기관에 지급할 용역대금의 지원이 필요하다”며 “조선일보에 상고법원 관련 광고 등을 게재하면서 광고비에 설문조사 실시대금을 포함해 지급하는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문건은 “(법원 예산 가운데) 일반재판운영지원 일반 수용비 중 사법부 공보홍보 활동지원 세목(1133-210-01) 9억9900만원이 편성돼 있다”라고 구체적인 지출 세목까지 적시했다.
조선일보에서 상고법원 설문조사 결과가 보도된 바는 없다. 그러나 상고법원 보도와 관련해 협찬금·광고비 등이 대법원에서 조선일보로 넘어갔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검찰 관계자는 “법원행정처의 계획대로라면 국고횡령 예비 혐의로 수사가 가능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문건은 또 설문조사 기간을 미리 공지하지 않고, ‘상고법원 설치 찬성’이 60% 이상 나오면 바로 조사를 중단하며, 지역별로 가중치를 달리해 반대 입장의 반영 비율을 낮추려고 하는 등 설문조사 왜곡까지 계획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대법원이 상고법원 추진의 명분을 만들기 위해 여론조작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어서 큰 반발이 예상된다.
문건은 또 2015년 5월26일께 게재를 목표로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사회를 맡아 법조계와 사회 원로를 상대로 지상 좌담회를 여는 방안을 계획해 이를 <조선일보>에 제안하기로 했다. 행정처가 작성한 문건은 좌담회 참석 후보는 물론, 좌담회 진행의 구체적인 순서와 발언 내용, 논의 방향까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다.
행정처가 같은 해 5월6일 만든 ‘조선일보 방문 설명자료-상고제도 개선을 위한 국민적 공감대 형성’ 문건도 4월25일 문건 내용을 그대로 담고 있어, 이런 내용이 모두 <조선일보>에 제안됐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이에 앞서 같은 해 4월14일 행정처 기획조정실이 작성한 ‘상고법원 관련 언론 지상 좌담회 시행 방안’ 문건도 조선일보를 통한 지상 좌담회를 상세히 계획하면서, 좌담회에서 참석자들이 발언할 내용을 준비하기 위해 당시 이아무개 사법등기국장을 팀장으로 행정처 심의관들이 대거 참여하는 실무준비팀(테스크포스팀)을 구성하기로 했다.
문건은 이와 함께 당시 임시국회가 상고법원 설치법안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 전에 조선일보의 기명 칼럼과 ‘태평로’ 또는 ‘데스크에서’ 등의 칼럼을 통해 상고법원에 우호적인 칼럼을 게재할 것을 조선일보에 제안하기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집필진에 관련 자료 및 집필 내용에 관한 기초 보고서를 제공”하기로 했다.
이와 관련해 같은 해 5월4일 사법정책실이 작성한 ’조선일보 홍보전략 일정 및 컨텐츠 검토’ 문건은 ‘기사 컨텐츠’라는 항목에서 상고제도 개선 필요성, 상고법원안 내용, 대법관 증원론의 문제점, 상고법원 판사 임명방안, 외국 사례 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 같은 해 9월20일 ‘조선일보 보도요청 사항-연내 상고제도 개선을 위한 사회적 공감대 강화 방안’도 “상고심 사건의 소가 총액(5조)과 당사자 총수(12만)에 관한 기획보도”를 요청하면서, 다른 경제적 가치와 비교한 소가 총액의 경제적 가치 및 당사자들의 경제적 손실 등을 분야별로 구체적 소송 사례와 함께 제공하고 있다.
이들 문건이 작성된 직후 <조선일보>에는 상고법원 관련 보도가 쏟아졌다. 2015년 4월 말과 5월 초에 걸쳐 행정처 문건이 작성된 뒤 5월19일부터 6월 초까지 관련 기사와 칼럼, 기획보도가 이어졌다. 특히 5월28일 1면과 3면에 걸친 기획보도는 ‘상고법원 논의, 국민입장에서 보라’는 제목으로 “대법원에 연 3만7000건이 쏟아진다”고 지적했다. 같은 해 9월20일치 행정처의 ‘조선일보 보도요청 사항’ 문건 뒤에는 10월21일 특별기획과 11월4일 사설로 상고법원 논의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에 대해 <조선일보>는 31일 “법원행정처 문건은 행정처가 일방적으로 작성한 것으로, 조선일보와 무관합니다”라고 밝혔다. <조선일보>는 “만일 조선일보가 이와 관련된 것처럼 보도할 경우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고 덧붙였다.
여현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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