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의 판사 블랙리스트 문건으로 논란이 증폭되고 있는 지난 4월 서울 서초동 대법원 법원 전시관 안에 법관의 양심과 독립 등을 명시한 헌법 제103조가 적혀 있다.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형사재판에서 법관 재량에 따른 형량 가중·감경의 기준과 한계 등을 정하는 독립된 기구다. 동일 범죄인데도 재판부마다 형량 차이가 크게 벌어지는 것을 막는 일을 하는 곳이다. 국민의 사법 신뢰를 떠받치고 높이려는 조직인 셈이지만, 양승태 대법원에서는 거꾸로 양형위 소속 판사들이 ‘사법 농단’ 의혹에 적극 개입하면서 사법 신뢰 ‘추락’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법원 내부에서 양형위 상임위원(고법 부장판사급)은 ‘대법원장 특임장관’으로 불린다. 이규진 전 양형위 상임위원(2015년 2월~2017년 5월)은 여러 유형의 사법행정권 남용에 직간접으로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는다. 2015년 10월 ‘헌법재판소 무력화’ 문건 작성은 그가 재임하던 시절 양형위와 사법정책실 협업으로 이뤄졌다. 통합진보당 지방의원 비례대표 의원직 확인 소송에서 선고 연기와 판결문 내용에 개입했다는 의혹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전임자인 이진만 전 상임위원 역시 사법정책실 심의관과 티에프(TF)를 꾸려 통진당 소송 개입 방안을 검토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양형위 소속 평판사까지 업무와 무관한 일에 동원된 정황도 드러났다. 2016년 10월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차장은 양형위 소속 판사를 시켜 상고법원 법안을 대표발의한 홍일표 당시 새누리당 의원의 형사사건 수사·재판 대응 전략을 검토했다고 한다. 검찰은 해당 판사를 두 차례 불러 조사했는데, 당사자는 문건 중 자신이 작성하지 않은 내용도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법원은 13일 해당 판사가 맡던 사무를 다른 판사에게 맡겼다.
양형위는 대법원 직속 기구로 원칙적으로 사법행정 기구인 행정처와 독립돼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일부 판사들은 “고법 부장판사인 상임위원이 일종의 ‘특임장관’으로 각종 어두운 일을 도맡아 해왔다”고 지적한다. 행정처 사정을 잘 아는 판사는 “비교적 업무 부담이 덜한 양형위가 필요에 따라 수시로 동원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실제 이규진 전 상임위원은 국제인권법연구회 압박 방안을 논의하는 관련 회의에 정기적으로 참여한 사실이 대법원 자체 조사에서 드러난 바 있다.
양형위가 독립적으로 양형제도 및 양형기준 연구를 할 수 있도록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고법 부장판사급이 맡던 상임위원 자리를 외부에 개방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양형위원 13명 가운데 법관은 4명이다. 나머지는 검사·변호사·법학교수 등이다. 행정처는 “양형위원이 고검장 및 고법원장급 등으로 구성되는 만큼 상임위원도 그 급을 맞출 필요가 있다”며 부정적 반응을 보이고 있지만, 이는 김명수 대법원장의 ‘법원행정처 축소’ 약속과 맞지 않는다는 반론도 나온다. 한 부장판사는 “법무부에서도 주요 보직의 탈검찰화가 진행되고 있지 않으냐”고 꼬집었다. 독립기구인 양형위에 고법 부장판사급 인사를 ‘상근’시킬 합리적 이유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현소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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