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경. 건물 오른쪽이 법원행정처. 한겨레 자료 사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일제강점기 ‘징용’ 소송을 미루는 대가로 청와대와 외교부로부터 해외 파견 법관 자리를 받아냈다는 의혹이 불거진 상황에서, 대법원이 파견 대상지인 주유엔(UN)대표부에 또 법관을 보내기로 결정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판거래’ 의혹이 제기된 뒤에도 행정처는 파견의 적절성 여부를 검토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대법원은 지난달 26일 정은영 서울서부지법 판사를 주유엔대표에 파견한다고 발표했다. 2016년 2월 파견됐다가 오는 8월 복귀하는 양재호 광주지법 순천지원 부장판사의 후임 인사로, 오는 27일 파견이 이뤄질 예정이다.
대법원이 인사 발령을 낸 지난달 26일은 양승태 행정처가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소송 재상고심을 수년간 미루는 대가로 외교부에 법관 파견을 요청했다는 의혹이 한참 불거진 상황이었다. 지난달 23일 첫 언론보도 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주오스트리아 대사에게 법관 파견을 요청하고, 행정처 기획조정실·사법정책실·사법지원실 등이 전방위적으로 개입한 정황 역시 드러난 이후다. 인사 발령 뒤에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주철기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만나 주유엔대표부 파견을 청탁하고, 이같은 요청이 윤병세 외교부 장관에게 전달된 구체적 사실이 추가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 행정처 관계자는 “파견 인사의 경우 각종 심사를 거쳐야 하므로 한두 달 전부터 선발 절차가 진행돼 왔고, 해당 시점에는 정 판사에게도 이미 선발이 통지됐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의혹 제기 이후 행정처 내부에서 파견 중단을 고려하거나, 파견의 적절성 여부를 검토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런 점은 고려하거나 논의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국민적 관심이 쏟아진 ‘재판거래’ 의혹과 그 대가로 지목된 파견을 연결 지어 따져보지 않았다는 취지다. 이를 두고 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최소한 내부 의견 수렴 과정이라도 있어야 했다. 대법원이 ‘재판거래’ 의혹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것 아니겠느냐”고 꼬집었다.
2012년 5월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일제 징용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손해배상해야한다는 판결을 내려 선고를 듣고 나온 관련 유가족들이 소감을 밝히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게다가 사법행정 책임자인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이 단장으로 있었던 대법원 특별조사단은 지난 5월 조사 과정에서 여러 건의 ‘징용’ 문건을 확인한 바 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돌연 중단됐던 법관 해외 파견은 박근혜 정부가 들어선 뒤인 2013년 갑작스레 재개됐다. 조사 과정에서 그 실마리가 될 만한 부분을 확인했는데도 파견 결정 과정에서 관련 검토를 벌이지 않은 것이다. 특별조사단은 ‘징용’ 문건을 열람하고도 “상고법원 입법 또는 국제인권법연구회 관련 사법행정권 남용과 관련성이 높지 않다고 판단해 별도로 조사하지 않았다”고 밝힌 바 있다.
법관의 공관 파견은 행정처가 내부 선발 과정을 거친 뒤 뽑힌 판사를 추천하면, 외교부에서 공관 근무 적합도 등을 따지는 적격심사를 거쳐 파견을 확정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현재 외교부는 정 판사에 대한 적격심사를 진행하고 있다. 다만 외교부 내부에서는 최근 ‘재판거래’ 의혹이 불거져 외교부 압수수색까지 이뤄진 상황에서 법관 파견을 이어나가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분위기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중앙지법 이언학 영장전담 부장판사는 지난 2일 징용 사건 ‘재판거래’의 ‘카운터파트’로 알려진 외교부 동북아국, 기획조정실 등에 대해 압수수색 영장을 내주면서도 정작 각종 문건을 생산하고 청탁을 건넨 행정처 국제심의관실 등에 대해서는 “일개 심의관이 작성한 문건에 따라 대법관이 재판한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영장을 기각한 바 있다. 지난 10일 박범석 부장판사도 검찰이 징용재판 관련 전·현직 심의관, 재판연구관, 주심 대법관 등에 대해 청구한 영장을 무더기 기각했다. 현소은 기자
son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