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참가자가 지난 7월7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낙태죄 위헌 판결과 낙태죄 폐지를 촉구하는 전국총집중 집회에서 팔에 낙태죄의 근거인 형법 제269조 제1항의 폐지를 주장하는 그림을 새겼다.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
산부인과 의사들이 임신중절 수술을 전면 거부하겠다고 선언하자 보건복지부가 29일 한 발 뒤로 물러섰습니다. 보건복지부는 17일 의사의 낙태수술을 비도덕적 진료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어길 경우 자격정지 1개월 처분을 내리겠다고 공포했으나 논란이 일자 행정 처분을 유예한다고 밝혔습니다. 직선제 산부인과의사회가 전날 “국민의 건강권을 지키며 밤을 새우는 산부인과 의사가 비도덕적인 의사로 지탄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반발하자 하루 만에 입장을 바꾼 것입니다.
보건복지부는 이에 앞서 비도덕적 진료 행위 유형을 세분화하고 처분 기준을 정비하는 등 현행 제도 미비점을 개선 보완한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 일부 개정안을 공포·시행한다고 지난 17일 밝혔습니다. 여기에서 제시된 ‘비도덕적 행위’ 가운데 하나로 형법 제270조 ‘의사·한의사·조산사 등이 부녀의 촉탁을 받아 낙태한 때에는 2년 이하 징역에 처한다’는 조항을 위반해 낙태하게 한 경우를 포함시켜 의사 자격정지 1개월 처분을 내리겠다고 밝혔습니다.
의사회는 “산부인과 의사를 비도덕적이라고 낙인찍고 처벌의 의지를 명문화 한 것”이라며
보건복지부를 비판하고 나섰는데요. 보건복지부 입장은 다릅니다. 개정 행정 규칙은 비도덕적인 진료 행위 유형을 구체화하고 처분 기준을 정비한 것으로 기존에도 불법 낙태 수술을 포함해 모두 자격정지 1개월의 처분을 받게 돼 있었다는 설명입니다. 다만 이번에 진료 중 성범죄(12개월), 무허가 의약품 사용(3개월), 일회용 주사기 재사용(6개월) 등에 대한 처벌이 강화됐다는 겁니다.
인공 임신중절 수술에 대한 의사 면허 자격정지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닙니다. 보건복지부는 2016년 9월에도 의사 면허 자격 정지 대상인 비도덕적 진료 행위를 구체화하고 자격 정지 기간을 1개월에서 12개월로 연장하도록 했었습니다. 임신중절 수술이 비도덕적 진료행위에 포함돼 의료계와 사회 전반적인 논란으로 이어지자 의료계 반발에 부닥친 정부는 한발 물러섰는데요. 애초 자격정지 12개월에서 형법 269조(1항은 ‘부녀가 약물이나 기타 방법으로 낙태를 하면 1년 이하 징역이나 2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되어 있다), 270조 위반으로 처벌 받은 의사에 한해 자격정지 1개월 처분으로 축소했습니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28일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2016년 9월 비도덕적 진료 행위에 대해 12개월 자격 정지를 했다가 1개월로 단축했다. 그 안에 대한 법제처 심사가 1년 걸렸고 지난 7월에 심사 완료 통지가 와서 공표한 것인데 쟁점으로 부각된 상황”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비도덕적 (의료) 행위’ 문제보다 보다 근원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보건복지부와 의료계 갈등 이면에는 45년 된 모자보건법이 자리 잡고 있는데요. 현행법상 의사가 부녀의 부탁을 받아 낙태하게 한 경우 업무상동의낙태죄에 해당하여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합니다. 모자보건법이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경우에 한해 임신 24주 이내 임신중절 수술이 허용될 뿐입니다.
문제는 모자보건법이 규정한 중절 수술 허용 사유가 43년 전인 1973년에 개정됐다는 것입니다. 변화한 의학적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모자보건법 제 14조 1항은 △본인이나 배우자가 우생학적 또는 유전학적 정신장애나 신체질환 또는 전염성 질환이 있는 경우 △강간 또는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간에 임신된 경우 △임신의 지속이 모체의 건강을 심각하게 해치는 경우 등에 한해서만 24주 이내에 인공 임신중절 수술을 허용합니다. 현행법은 기형아를 유발할 모체의 전염성 감염은 인공 임신중절 수술 허용 사유이지만, 생존 불가능한 기형아로 확인된 태아의 인공 임신중절 수술은 허용하지 않는 모순을 안고 있습니다.
의사회도 “모자보건법은 의학적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대한산부인과 의사회가 2010년 회원 75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모자보건법 개정 필요성에 대해 응답자 97.9%가 찬성했습니다. 게다가 향후 모자보건법 개정안에는 여성계 등 사회 각계에서 도출된 사회·경제적 사유가 포함돼야 한다는 의견이 90.6%나 됐습니다. 또 의학적으로 심한 기형 등 태아 질환에 대한 사유가 모자보건법에 포함돼야 한다는 의견도 94.6%에 이르렀습니다.
수많은 낙태수술이 음성적으로 이뤄지는 현실에서 불법 인공 임신중절의 원인 및 해결 방안에 대한 고민 없이 여성과 의사에 대한 처벌만 강화하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인지를 놓고 비판의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익명을 요청한 한 변호사는 “임신중절 처벌 조항에 대해 헌재 위헌 심판을 받고 있고 그 결과에 따라 굉장한 변화를 앞두고 있는데 복지부가 왜 이렇게 섣불리 나서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현재 낙태 위헌 여부에 대한 헌법소원 절차도 6년 만에 재진행되고 있습니다. 2012년 헌법재판소는 낙태죄 및 의사의 업무상 동의 낙태죄에 대해 4대 4로 팽팽한 대립 끝에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변화된 사회상과 여성계, 의료계 의견이 반영돼야 하지만 주무부처인 보건복지부는 수수방관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24일 공개 변론을 앞두고 헌법재판소가 관련 부처에 의견을 제출하라고 요구했지만 보건복지부는 무응답으로 일관하고 있는 겁니다. 이번 헌재 결정은 이달 중으로 결론이 날 예정이었으나 미뤄진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 때문에 현재 시점에서 낙태와 관련한 의사 행정 처분을 논의하기보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낫지 않냐는 의견이 제기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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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입법조사처도 낙태죄가 사문화돼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된다는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국회입법조사처 정치행정조사실 법제사법팀 도규엽 입법조사관은 지난 5월 ‘낙태죄에 대한 외국 입법례와 시사점’ 보고서를 통해 낙태 처벌에 대한 법령 재정비가 필요하다고 주문했습니다. 많은 인공 임신중절이 행해지고 있지만 낙태죄로 기소돼 처벌받은 경우는 극소수에 그치고, 실효성에 대한 고민과 더불어 태아 생명의 실질적 보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고서를 보면, 프랑스는 임신 12주 이내 곤란한 상황에 부닥친 임신부는 의사에게 낙태를 요청할 수 있습니다. 독일은 시술 3일 이전에 의사 상담으로 수술이 불가피하다고 판단되면 12주 미만 낙태가 허용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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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평균 낙태 건수에 대한 통계는 정부와 의료계가 다르게 집계하고 있습니다. 대한산부인과의사회는 지난해 11월 우리나라의 일평균 낙태수술 건수를 약 3000건으로 추정한다고 밝혔습니다. 이 수치는 보건복지부 공식 발표 자료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데요. 보건복지부는 2005년 하루 평균 낙태수술이 1000건 정도 시행됐고 2010년에는 이보다 낙태수술이 훨씬 감소한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2010년 연간 국내 낙태수술 건수는 16만8000건입니다.
보건복지부가 실태 분석부터 제대로 하고 여성들의 사회적 요구와 의사들의 현실적 요구를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뭔가 움직여야 할 시점입니다.
박유리 박현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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