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당하는 사람이 있나 싶었는데, 오히려 당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전화금융사기) 얘기다. 올해 상반기, 날마다 116명씩 당했다. 한 사람이 평균 860만원씩 빼앗겼다. 상반기 피해자 수(2만1006명)는 지난해 같은 기간(1만3433명)에 견줘 56.4% 늘었고, 8월까지 피해액(2631억원)이 이미 지난해 전체 피해액(2431억원)보다 많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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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갈수록 기승…하루 116명씩 ‘날벼락’)
‘어눌한 연변 사투리’는 이제 통하지 않는다는데, 얼마나 잘 속이기에 이렇게 당하는 것일까. 서울에 사는 40살 여성 회사원 ㄱ씨와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특별수사 제1부 정석현 계장’의 통화 녹음 내용을 직접 들어봤다. 정신없던 오전 10시께 “검찰청인데 ㄱ씨 맞죠?”라는 남성의 목소리에 전화를 들고 조용히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ㄱ씨 본인 명의 계좌가 금융범죄사기단 검거 과정에서 발견됐습니다. 직접 개설한 게 맞는지 확인 조사 중입니다. 2017년 12월6일 광명시 철산동에서 우리은행과 하나은행, 두 개 통장 개설됐는데 직접 개설했습니까?
=아뇨. 그런 적 없습니다.
-본인이 한 게 아니란 말씀이죠. 오…전혀 알지 못했다 이 말입니까?
=네.
-저희가 혐의점을 찾고자 연락 드린 거 아니니 오해 마시고요. 개인정보 유출로 인해 다른 피해자들처럼 명의도용을 당한 피해자인지 분류수사 중입니다.
다소 빠르고 딱딱한 말투에다 전문용어 등을 섞어가며 은근히 압박한다. 수사기관이 말하는
‘1단계 : 피해자에게 접근’하기다.
-ㄱ씨가 문제 되는 부분은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본인 명의 계좌가 불법 대포 통장으로 범죄 수익금 세탁 용도로 사용된 겁니다. 피해가 발생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본인이 연관성 없다는 진술을 받아야 합니다. 피해자로서 진술이므로 녹취해야 하고요. 메모 부탁합니다. 저희 서울중앙지검 내선 번호는 02-530-3114번. 3114입니다. 법원으로부터 부여된 사건번호는 제18고정, 어떤 물건을 고정시킨다 할 때 고정 5027호입니다.
사기범은 ㄱ씨에게 평소 02로 시작하는 전화가 온 적이 있는지, 왜 안 받았는지 조곤조곤 따진다. 지난 4~8월 지방검찰청 내선 번호로 여러 차례 연락했는데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관인 자신이 직접 전화해 진술을 녹취하게 됐다고 설명하면서
‘2단계 : 심리적 압박 및 주변 도움 차단’으로 들어간다.
-이 녹취는 본인을 대신해 법원에 제출할 중요 자료이므로 법적 증거로 채택하기 위해 주위가 조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실 텐데 공공기관이나 수사기관은 본인 인적사항 중 비밀번호, 계좌번호, 주민번호를 수집하지 않습니다. 본인 동의 하에 녹취조사 도와드릴 건데 불편하면 출석해서 조사받아도 됩니다.
그러나 ㄱ씨가 “요즘 피싱이 많아서 확인하고 싶다. 30분 뒤에 내가 이 번호로 전화하겠다”고 하자 사기범은 화를 냈다.
-그러면 녹취조사 하지 말고 조사요구서 자택 주소로 발송할게요. ㄱ씨 본인 신분증 지참해서 지정된 시간·날짜에 서울중앙지검으로 출석해서 조사받으세요. 녹취 단말기 연결했는데 지금 진행이 안 되면 수사 절차상 본인 자택으로 출석요구서 발송하게 돼 있어요. 오해 소지가 있어선 안 돼요. 본인의 중요 인적사항은 요즘 모방범죄 많아서 수집 안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사기범의 기세에 ㄱ씨의 기가 꺾였다. ㄱ씨 이름 석 자를 계속 언급해 심리적으로 위축시키려는 시도다. 사기범은 본격적으로
‘3단계 : 피해자 안심시키기’와
‘4단계 : 계좌 현황 파악’에 나섰다. ㄱ씨 명의의 대포 통장은 ‘동결 처리’했지만, ㄱ씨가 사용하는 합법적인 통장까지 동결 처리되면 안 되므로 조처를 취해 주겠다며 어느 은행 계좌를 갖고 있는지 묻는다. 한편으론 ‘동결 처리’란 “지급 정지 또는 폐기했다는 것”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하면서, 한편으론 “진술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 비밀번호 요구하는 거 아니다”라고 압박한다. ㄱ씨는 은행 2곳의 이름을 댔다.
-일반적인 입출금인지 마이너스통장인지 예금인지?
=다 입출금이에요.
-전부 입출금이고요?
=네.
-추가할 진술 없죠?
=네.
-이제 본인 진술 토대로 금감원에 접수시킬 거고 예금자보호법 적용받아서 본인 계좌의 합법적 시행을 도와드릴 겁니다. 우리가 아니고 금융감독원이 합니다. 합법적인 계좌를 실제 이용하고 있다면, 금감원으로부터 보호받을 잔고가 얼마죠?
ㄱ씨가 “왜 잔고를 묻냐”고 하자 사기범은 또 버럭 화를 냈다.
‘5단계 : 금전 편취 시도’는 의외로 사기범의 빠른 포기로 끝났다.
-하지 마십시오. 진술 안 받겠습니다, 제가. 본인 입장에서 도와드리려고 전화한 건데 그러시면 제가 할 필요 없습니다. 본인이 확인할 거 혼자 하십시오. 진술 안 받겠어요.
=그러세요.
-(뚝)
여기까지만 통화 시간이 20분 가까이 됐다. 만약 잔고를 얘기하면 돈을 빼앗는 시도로 이어진다. 경찰청 등이 밝힌 범죄 패턴을 보면, 사기범들은 전화를 끊지 말라고 하면서 은행 창구나 자동입출금기(ATM)로 유도하거나 실제 검찰청·경찰청·금융감독원 누리집 첫 화면과 거의 똑같은 피싱 사이트에 접속하게 한 뒤 피해자가 직접 돈을 이체하도록 한다. 배터리가 충분한지, 보조 배터리를 갖고 있는지 계속 묻는다. 입출금 통장이냐고 계속 묻는데, 이는 해지 절차를 밟아야 하는 정기예금이나 적금보다 사기 치기 쉽기 때문이다. 잔고 확인 단계에서 액수가 너무 적으면, 즉 사기 칠 돈이 없으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는다. 위조한 신분증, 공문서를 피해자 이메일로 보내 안심시키는 등 수법이 더 교묘해지고 있다.
ㄱ씨가 받은 전화는 ‘대출 빙자형’과 ‘사칭형’ 가운데 후자다. 실제 범죄는 ‘대출 빙자형’이 70%로 훨씬 많다. 수법은 다음과 같다.
-캐피탈사·저축은행·전국은행연합회 등의 직원인데 저금리로 대출해주겠다며 접근한다.
-신용등급이 낮아서 자금 융통이 어려울 텐데 기존 대출금을 조금이라도 갚으면 신용도가 올라가므로 한국자산관리공사 정부 정책 자금을 낮은 금리로 대출해주겠다고 한다.
-대출 상담을 하면서 대출이 부결됐으나 상환능력평가만 조정하면 조건부 승인이 날 것이라는 식으로 피해자의 기대를 형성한다.
-개인정보 유출 방지, 정보 활용 동의 등을 운운하며 피해자를 안심시킨다.
-기존 대출금 일부를 상환하라며 사기범 계좌로 돈을 보내게 하거나 새 대출금을 받기 전에 내야 할 인지세 명목 등으로 이체시킨다.
피해자는 노인들보다 오히려 젊은 층이 더 많다. 올해 상반기 피해자 가운데 ‘사칭형’ 피해자는 20~30대(39%)가 가장 많았고, 특히 대부분이 여성(201명 가운데 175명)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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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대 여성은 보이스피싱 봉?) 그다음은 60대 이상(31.6%), 40~50대(29.3%) 순이었다. ‘대출 방지형’은 자금 수요가 많은 40~50대(67.2%)에 집중됐다.
알고도 당한다는 보이스 피싱을 어떻게 하면 피할 수 있을까. 일단 ‘사기 패턴’을 알아두는 게 좋다. 그러나 ‘대출 빙자형’은 정상적인 대출 상담 전화와 구별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대출 권유 전화를 받으면 금융회사 직원인지 문의한 뒤 전화를 끊고 해당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해 진짜 직원인지 확인해야 한다. 대출 모집인이라고 주장하면 역시 전화를 끊고 대출 모집인 통합조회 시스템(
loanconsultant.or.kr)에서 등록번호를 조회해보면 된다. 금감원은 “대출 승인은 금융회사 내부의 여러 의사 결정 과정을 거쳐 최종 결정된다. 신용등급 단기 상승이나 조작 등으로 저금리 상환 대출이 가능하다는 것은 100% 사기”라고 말했다.
검찰이나 경찰, 금융감독원은 피해자에게 이런 식으로 전화하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전화를 일단 끊고, 114 전화나 공식 누리집을 통해 해당 기관에 실제 직원인지 물어보면 된다. 사기범이 전화를 끊지 않은 채 신분을 확인해 보라며 알려주는 아이피(IP)나 애플리케이션 등을 사용하면 가짜 사이트로 연결되니 유의해야 한다.
그런데도 속아서 돈을 이체했거나 사기 사이트나 앱 등에 개인정보와 비밀번호 등을 입력했다면 빨리 112로 전화해야 한다. 해당 금융회사로 연결돼 지급 정지를 신청할 수 있다.
금융감독원과 경찰청의
보이스피싱 지킴이 사이트를 알아두면 좋다. 티(T)전화, 후후, 후스콜 등 스팸이나 광고로 등록된 번호들을 차단해주는 앱을 설치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범죄를 막기엔 한계가 있다. 금감원은 그동안 확보한 사기범 음성파일과 전화번호 등을 토대로 사기범들의 ‘패턴’을 찾아내 보이스 피싱이 의심될 경우 전화 받는 사람에게 경고음을 보내주는 식의 인공지능 앱을 민간 회사와 협업해 도입할 계획이다.
이지은 기자
jieuny@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