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주년 대한민국 법원의 날인 지난 13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열린 양승태 사법농단 대응을 위한 시국회의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의 얼굴탈을 쓰고 수의를 입은 채 두사람의 구속을 촉구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 1주일간 법원은 차관급인 고법부장 출신 유해용 변호사(사법연수원 19기)의 ‘유출 문건 파기’로 골치를 앓았다. 대법원이 안이한 대처로 사법농단 핵심 증거 파기를 방조하고, 영장판사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예단으로 재판거래 의혹의 주요 증거인멸을 부추겼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사법 70주년 기념식(13일) 분위기는 축 가라앉은 듯 보였다. 하지만 법조계 일부에서는 유출 문건 파기는 누군가에겐 ‘신의 한 수’라는 씁쓸한 분석이 나온다. 증거파기 변호사, 사법농단 책임자, 대법원 모두 ‘최악은 피했다’는 것이다.
대법원 수석·선임재판연구관을 지낸 유 변호사가 지난 2월 퇴임 당시 법원 밖으로 들고 나간 자료에는 수만 건의 재판연구관 보고서뿐 아니라 법원행정처와 주고받은 각종 재판개입 문건이 포함돼 있을 거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사건과 통합진보당 소송에서 법원행정처와 소송담당 재판연구관 사이 ‘가교’ 역할을 한 정황도 이미 드러난 바 있다.
‘문건을 훼손하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검찰에 써낸 유 변호사는 한동안 비난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다만 자신에게 불리한 증거를 없앤 일은 증거인멸죄로 처벌이 어렵다. 다른 사법 농단 관여자들의 증거를 없앴다는 혐의 역시 “파기된 문건이 누구의, 어떤 혐의에 대한 증거인지 몰랐다”는 방어논리를 펼치고 나설 거란 관측도 있다. 증거인멸 등으로 구속 가능성은 커졌지만, ‘득실’을 따져볼 때 당장 사법농단 본류인 재판거래 피의자가 되는 것보다는 증거를 없애는 것이 유리했다고 판단했을 거라는 해석이다. 이미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판사들은 “(문건 유출은) 부적절한 행위일 뿐 죄가 되지 않는다”, “(유출 자료 압수수색은) 재판의 본질적 부분을 침해할 수 있다”며 유 변호사에게 ‘면죄부’를 줬다.
‘유해용발 호재’를 맞이한 재판거래 의혹의 핵심 관여자들도 일단은 한숨 돌리게 됐다. 유 변호사가 대법원에서 일한 2014~16년은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거래 시도가 집중적으로 진행되던 때다. 유 변호사 컴퓨터에서 재판거래 문건이 무더기 발견될 경우, 이제껏 영장기각 단골 사유로 거론된 ‘재판과 사법행정의 분리’라는 명분은 무너질 가능성이 크다. 이번 증거파기로 재판거래 책임자들까지 덩달아 위기를 돌파하게 된 셈이다.
대법원도 증거파기를 사실상 ‘방조’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그동안 ‘재판 본질 침해’ 등을 이유로 철통같이 방어해온 재판연구관실 자료가 공개되는 일은 일단 막을 수 있게 됐다. 게다가 ‘문건 회수’로 인한 검찰과의 전면충돌도 피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난 7일 대법원은 별다른 법적 근거 없이 유 변호사 문건에 대해 ‘회수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는데, 이에 검찰은 “대법원의 회수는 증거인멸에 해당할 수 있다”며 반발했다. 회수 시도 시 검찰과의 전면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유 변호사가 ‘대리전’을 펼쳐준 양상이 된 것이다.
이 때문에 법원 안팎에서는 유 변호사가 자신은 물론 전·현직 판사들까지 상당 부분 ‘구제’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한 판사는 “유 변호사가 자신은 물론, 핵심 관계자들까지 구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사법농단 진실 규명은 늦춰졌다. ‘자기 사람’은 보호했지만, 국민은 배신했고, 그로 인해 사법부에 대한 실망감도 더 커지게 됐다”고 꼬집었다.
현소은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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