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장이 지난해 9월 22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퇴임식에 참석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자진해서 검찰에 ‘압수당한’ 유에스비(USB) 저장장치에서 일부 파일이 삭제된 흔적이 발견됐다. 검찰은 디지털포렌식을 통해 삭제 파일 복구를 시작했다. 법조계에서는 사법농단의 정점에 있는 양 전 대법원장이 이 저장장치를 사실상 임의제출한 배경을 두고 뒷말이 무성하다.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2일 “저장장치에서 삭제된 파일은 폴더 이름 등으로 볼 때 대법원장 재직 당시 문건으로 보인다. 문건 내용과 삭제 시점 등을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앞서 양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은 지난달 30일 검찰 압수수색 과정에서 “퇴직 때 갖고 나온 유에스비 저장장치를 자택 서재에 보관하고 있다”고 검찰에 먼저 알린 바 있다.
유에스비 저장장치의 디지털포렌식은 컴퓨터 하드디스크 조사와 동일한 방법으로 진행된다. 저장된 문서를 열어보거나 내용을 수정·삭제한 시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검찰 관계자는 “저장장치의 파일이 ‘지워졌다’는 것은 (기존 파일 위에) 다른 파일이 저장됐다는 의미다. 이런 덮어쓰기를 몇 번 했느냐가 관건인데, 여러 번 덮어썼다면 복구가 쉽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덮어쓰기가 의도적으로 이뤄졌는지 등도 조사하고 있다. 앞서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재임 시절 사용했던 컴퓨터 하드디스크가 디가우싱(강한 자성을 통한 파일 영구 삭제)된 탓에 복구에 실패한 바 있다.
법조계에서는 양 전 대법원장이 유에스비 저장장치의 존재를 ‘실토’한 배경을 놓고 여러 해석이 나오고 있다. 저장장치에서 결정적 증거가 나오면 사실상 양 전 대법원장이 ‘자백’한 셈이 된다. 저장장치에 결정적 증거가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수사 100여일 만에 이뤄진 압수수색인 만큼 양 전 대법원장이 저장장치 내용을 검토할 시간이 충분했다. 저장장치를 내줌으로써 ‘나는 떳떳하다’는 명분을 확보하려 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한 검찰 관계자도 “주거지 압수수색을 대비해 온 양 전 대법원장이 법원의 영장 기각으로 괜한 오해를 받느니 충분한 사전 검토를 마친 자료를 검찰에 내주는 식으로 향후 법률적 방어의 명분을 쥐려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사실상 주거지 압수수색을 한 셈이어서 추가 압수수색을 막는 효과도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 판사는 “법원이 저장장치를 검찰이 확보했다는 이유를 들어 추가 압수수색영장이 들어오더라도 기각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반면 증거 가치가 없는 ‘깡통 저장장치’라고 단정하기에는 이르다는 시각도 있다. 저장장치 속 문건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어도, 검찰이 이미 확보한 다른 문건이나 진술과 결합할 경우 폭발력이 커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변호사는 “양 전 대법원장이 보기엔 법적 문제가 없어 보였던 것이 (검찰 쪽) 다른 증거와 종합하면 유의미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자신이 쓴 글에서 오탈자를 제대로 골라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한편 검찰은 지금까지 확인된 재판거래 의혹 외에도 양승태 법원행정처가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직접 접촉해 재판 관련 기밀자료를 전달하고, 일선 재판부를 접촉해 재판 방향 등을 전달한 단서를 추가로 확인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
현소은 기자, 강희철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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