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주년 대한민국 법원의 날인 지난 9월13일 오전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시민단체 회원들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의 얼굴탈을 쓰고 수의를 입은 채 두 사람의 구속을 촉구하는 행위극을 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양승태 대법원’은 내부 비리가 알려지는 것에 유독 민감했다. 위신 추락과 상고법원 추진에 차질을 우려해서다. 법원행정처(행정처)를 앞세워 비리를 덮었다. 여의치 않으면 특정 사건의 상고심 선고를 앞당겨 국민의 관심을 호도했다. 심지어 재판에 개입하고, 영장 기록까지 빼내어 수사 확대를 막으려 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이 지난 14일 법원에 제출한 임종헌(59·구속기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에서 드러난 사실이다. 실행자는 임 전 차장이었으나, 양승태 대법원장과 박병대 법원행정처장, 박 처장의 후임인 고영한 전 행정처장도 임 전 차장과 공모했다고 밝혔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행정처가 2015년 1월 “현직 법관이 최초로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하자 사회적 이목이 집중될 수 있는 국회의원 내란음모 사건의 상고심 판결 선고 시기를 앞당겨 국민의 관심을 전환하는 조치를 취했다”고 적었다.
당시 현직이던 최민호 판사가 한 사채업자한테서 2억6천만원을 받은 혐의(뇌물)로 구속되자 “메가톤급 후폭풍”이 우려된다며,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 사건 상고심 선고를 앞당겨 국민의 관심을 호도했다는 것이다. 이 내용은 임 전 차장이 제출한 유에스비(USB) 저장장치에서 나온 ‘최 판사 관련 대응 방안’ 문건(2015년 1월18일 작성)에 들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 문건 작성 다음 날 대법원은 이 전 의원의 선고기일을 1월22일로 앞당겨 발표했고, 사흘 뒤 대법원 전원합의체(재판장 양승태 대법원장)는 상고를 기각해 이 전 의원에게 징역 9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최 판사 사건의 여파를 의식해 ‘감사위원회’를 만들었지만, “실제로는 이미 언론 등에 공개된 사건만을 감사위원회에 회부하는 등 편의적·변칙적으로 운영했다”고 검찰은 밝혔다. 또 “법원 비위가 이슈화되는 경우, 대법원장과 사법부의 위신이 추락하고 사법부의 위상 강화를 위한 정책 추진에도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해 이를 은폐·축소하거나 국민의 관심을 전환·분산시켜 파장을 최소화하는 ‘사법부 위기 대응 방안’을 강구·추진”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검찰은 부산고법 문아무개 판사 비리 사건을 지목했다.
임 전 차장의 공소장을 보면, 2015년 9월께 행정처는 대검찰청에서 ‘문 판사가 그 지역 건설업자한테서 골프·룸살롱 접대를 받았다’는 비위 관련 통보 문건을 받았다.(
기사 전문) 그러나 임 전 차장과 박병대 당시 행정처장, 양승태 대법원장은 “최 판사 사건에 이어 문 판사 비위사실까지 외부에 알려져 이슈화될 경우 대법원장과 사법부의 위신 추락으로 사법정책(상고법원) 추진에 심각한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이를 은폐·축소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문 판사와 부산에서 함께 근무했던 이규진 양형위 상임위원을 시켜 검찰 통보 내용을 알려주면서 “자중하라”고 전달하는 선에 끝냈다.
그런데 이듬해 9월과 11월, ‘정운호 게이트’와 ‘부산 엘시티 사건’ 등의 여파로 문 판사 문제가 다시 불거지자 이번에는 문 판사의 스폰서인 건설업자 재판에 개입한다. 조현오 전 경찰청장에게 뇌물을 건넨 혐의로 재판을 받던 건설업자 정아무개씨가 법정 자백에도 불구하고 1심 무죄가 나고 2심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자 “2심에서도 무죄가 나면 검찰 반발, 언론 관심 등으로 문 판사 비위 사실과 행정처의 조직적 은폐까지 문제 될” 상황을 우려했다.
이를 막으려 고영한 전 처장이 윤아무개 부산고법원장에게 연락하고, 윤 원장이 다시 2심 재판장을 불러 ‘선고연기·추가 변론 진행·그 사이 문 판사 사직·사직 후 선고’를 지시해 실행에 옮기도록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정운호 게이트가 터지자 임 전 차장은 신광렬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을 시켜 영장전담판사들에게 제출된 검찰 수사기록의 주요 내용을 정리해 보고하도록 했다. 이를 토대로 게이트 연루 부장판사 7명의 신상정보를 파악한 임 전 차장은 이를 영장전담판사들에게 전달하면서 “영장 청구대상에 이 법관의 가족이 있는지 잘 살피고, (청구되면) 통상의 영장심사보다 엄격히 하라”는 가이드라인을 주었다고 한다.
또 검찰의 서울서부지법 집행관 사무소 수사, ‘정운호 게이트’의 김수천 부장판사 영장청구서 사본 등을 빼내 검찰 수사 확대에 대비하기도 했다.
검찰은 임 전 차장 공소장에서, 행정처가 “(이석기 전 의원 판결 앞당겨 선고하기 등) 조치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향후 유사한 ‘사법부 위기 상황’이 발생하면 ‘면밀한 수사 상황 점검 및 상황 발생 시 신속한 대응전략 수립’(윤리감사관실·기획조정실 담당), ‘언론의 관심을 돌릴 수 있는 기삿거리 제공’(공보관실 담당) 등의 방법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매뉴얼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남의 비리를 재판하며 유·무죄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사법부가 정작 자신의 치부는 가능한 한 덮거나 뭉개려 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대법원의 비리 대응책은 여느 기업들이 보여주는 행태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고 말했다.
강희철 선임기자
hckan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