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박병대 전 대법관이 19일 오전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박병대 전 대법관이 19일 피의자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았다. 전직 대법관이 검찰에 공개소환된 건 사법부가 만들어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박 전 대법관은 이날 오전 9시20분께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현관 앞에 마련된 포토라인에 섰다. 그는 “법관으로 평생 봉직하는 동안 최선을 다했고 법원행정처장으로 있는 동안에도 그야말로 사심 없이 일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경위를 막론하고 많은 법관이 자긍심에 손상을 입고 조사를 받게 된 데 대해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거듭 송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이번 일이 지혜롭게 마무리돼서 국민들이 법원에 대한 믿음을 다시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검찰은 그를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고영한 전 대법관과 함께 이번 사법농단 사태의 ‘정점’으로 보고 있다.
그가 출석할 때 민중당 당원 5~6명은 “박병대를 구속하라” “양승태를 구속하라” 등 구호를 외쳤다. 서류가방을 들고 뒤따라온 변호사와 함께 조사실로 들어간 그는 밤늦게까지 조사를 받았다.
서울중앙지검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은 이날 나온 박 전 대법관을 상대로 △일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처분 관련 행정소송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댓글 사건 형사재판 △옛 통합진보당 국회·지방의회 의원들의 지위확인 소송 등의 재판에 개입한 의혹을 집중적으로 캐물었다. 2014년 2월부터 2016년 2월까지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그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2014년 10월 소집한 이른바 ‘2차 공관 회동’에 참석해 청와대·외교부와 징용 소송의 처리 방향을 논의한 사실이 검찰 수사로 드러난 바 있다. 또 헌법재판소 내부 동향 수집, 통합진보당 관련 재판 개입, 법관 사찰과 소모임 와해 시도, 부산 판사 비리 은폐, 공보관실 운영비 불법 집행으로 인한 국고 손실 등의 혐의도 받는다.
검찰 관계자는 “박 전 대법관을 상대로 조사할 내용이 방대하다”며 추가 소환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재판에 넘겨진 임종헌 전 차장은 구속 전 네차례 검찰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조사를 마치는 대로 박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을 청구할지 검토할 방침이다.
한편 ‘양승태 대법원’이 대법원장에게 비판적인 판사들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인사에 불이익을 줬다는 의혹과 관련된 파장도 커지고 있다. 앞서 대법원은 세차례 자체 조사를 통해 “비판적 법관에게 인사상 불이익을 줬다고 인정할 만한 자료는 발견할 수 없었다”고 발표했지만, 이를 뒤집는 증거들이 검찰에 포착된 것이다. 문건은 행정처 기획2심의관실에서 파일 형태가 아닌 출력된 서류 형태로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과 법원 안팎의 말을 종합하면, 법원행정처는 2015년부터 3년에 걸쳐 인사를 앞두고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보고’라는 문건을 작성했다고 한다. 이 문건에는 비위를 저지르거나 법정에서 폭언을 하는 등 물의를 일으킨 법관들의 리스트가 작성돼 있는데, 당시 행정처는 여기에 대법원 정책에 반대했던 법관들을 상당수 포함하고 실제로 인사상 불이익까지 줬다고 한다.
2014년 8월 권순일 행정처 차장의 대법관 제청을 비판했던 송아무개 판사는 2015년에 이어 2016~17년에도 리스트에 포함돼 인사 불이익을 받았던 것으로 확인됐다. 기존 인사 원칙을 무시하면서 원하지 않는 곳으로 발령을 내고, 형사재판을 맡기지 않거나 합의부 재판장에서 배제하는 등의 방식이었다.
2014년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을 맡았던 김아무개 판사 역시 의장을 맡았다는 이유만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라 인사상 불이익을 받은 사실이 추가로 확인되는 등 ‘피해 법관’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최우리 김양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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