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경기 고양시 사법연수원에서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진행되고 있다. 이번 회의에는 ‘재판거래’ 등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과 관련된 법관의 탄핵 소추를 판사들이 선제적으로 국회에 촉구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고양/사진공동취재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사법농단에 관여한 ‘현직 법관 탄핵 검토’ 의견을 공식화한 다음날인 20일 자유한국당 등 보수세력은 ‘무죄 추정 원칙 위반’ ‘여론 탄핵’ ‘국회 권한 침해’ 등을 들어 ‘탄핵 흔들기’에 나섰다. 법조계에서는 탄핵 제도의 취지를 왜곡하는 등 2016년 12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소추 당시 ‘방탄 국회’ 풍경이 재연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 혐의만 갖고 여론 탄핵? 법관대표회의에서도 “확실하지도 않은 혐의를 가지고 국민 여론을 들어 동료 법관을 탄핵한다”는 반대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보수 언론은 이런 발언 등을 들어 ‘여론 탄핵’이라는 주장을 크게 부각했다.
하지만 헌법상 법관 탄핵 소추 요건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과 법률 위배’ 행위는 검찰 수사는 물론 대법원 자체 조사에서도 구체적으로 확인된 사안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의 2차 조사,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진행된 3차 조사에서 2014~16년 법원행정처에서 작성한 재판개입 및 법관 사찰 관련 문건 수백건이 공개된 바 있다. 내용이 워낙 구체적이어서 검찰 수사도 상당 부분 이를 근거로 진행됐고, 문건 작성 등을 지시한 임종헌 전 행정처 차장은 구속까지 됐다. 행정처 문건 외에도 일제 강제징용 사건 재판개입 등과 관련해 ‘제3의 기관’인 외교부 문건을 통해 전·현직 법관들이 관여한 사실도 확인됐다.
과거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이 주도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소추, 새누리당 상당수 의원이 참여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소추 때도 ‘수사와 재판으로 확정된 사실’을 근거로 탄핵 소추를 하지 않았다. 한나라당은 2004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 위반’이라는 ‘유권해석’을 내세워 노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을 밀어붙였다.
2016년 12월 박 전 대통령 탄핵 소추안 내용 상당 부분은 대통령 본인과 최순실씨 등이 저지른 국정농단에 대한 언론보도, 국회 국정조사 내용 등이 중심이었다. 당시 국회 탄핵소추위원단(단장 권성동 현 자유한국당 의원) 쪽은 ‘객관적 증거 없는 탄핵 소추’라는 박 전 대통령 쪽 주장에 “탄핵 소추는 형사처벌 절차가 아닌 공무원 파면 절차로 자유로운 심증으로 각종 증거·참고자료를 기초로 충분히 판단할 수 있다”고 했다.
판사 출신 한 변호사는 이날 “사실이나 혐의가 확정돼야만 탄핵 소추가 가능한 게 아니다. 사실 여부는 탄핵 절차에서 밝히면 된다. 대법원 자체 조사보고서나 관련 피의자의 공소장 내용만으로도 소추가 가능하다”고 짚었다.
■ 형사처벌 확정 안됐다? 자유한국당은 법관 탄핵에 대해 “재판 시작도 전에 위헌 행위를 주장하는 것은 무죄 추정 원칙에 반한다”고 주장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쪽도 같은 주장을 했었다. 이에 국회 탄핵소추위원단 쪽은 “무죄 추정 원칙은 인권이 유린되기 쉬운 피의자나 피고인에게 인정되는 것이지, 위법 행위를 한 공무원의 신속한 파면을 목적으로 한 탄핵 소추 절차에 적용되는 원칙이 아니다”라고 못 박았다. 당시 주심이었던 강일원 전 헌법재판관도 “탄핵심판은 100% 형사재판처럼 진행될 수 없다”며 박 전 대통령 쪽 주장을 일축했다. 헌재는 이듬해 3월 아직 기소되지 않은 박 대통령을 파면했다.
이처럼 헌법은 형사처벌 여부와 상관없이 현직 고위공무원(법관)이 직무와 관련해 헌법과 법률을 위반했다면 탄핵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탄핵 심판의 ‘목적’이 처벌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국회에서 열린 법관 탄핵 토론회에서 “탄핵 심판은 피소추자가 공직에 계속 재임하는 것이 헌법질서 수호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거나, 국정을 담당할 자격을 상실했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라며 “법원의 유죄 판결 확정이나 무죄 추정의 원칙 등 형사재판 절차가 적용될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한 판사는 “형사재판을 거쳐 형이 확정되려면 적어도 2~3년은 기다려야 한다. 이럴 경우 적절한 징계 시기를 놓칠 수 있다. 이를 대비해 헌법이 예정해둔 수단이 탄핵”이라고 설명했다.
■ 삼권분립 침해? 법관대표회의에서 ‘법관 탄핵 필요성’을 의결한 것이 국회 권한을 침해해 ‘삼권분립 위반’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유한국당은 “탄핵은 헌법이 정한 국회의 권한이다. 이런 권한 행사에 법관회의가 관여하는 것은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난다”고 주장했다.
말 그대로 탄핵 소추는 국회의 권한이다. 법관대표회의 결정을 따를지 말지는 국회가 결정하면 된다. 그에 따른 책임도 국회가 지면 된다. 한 부장판사는 “탄핵은 임기가 보장된 법관을 사법부에서 파면할 수 없으니 헌법이 국회와 헌재에 준 권한”이라고 했다. 또 다른 부장판사는 “청와대와 특정 재판을 논의하고 재판부에 판결 방향을 요구한 것보다 심각한 재판 독립 침해는 없다. 이에 미온적으로 나서는 것은 이런 행위를 앞으로도 용인하겠다는 의미밖에 안 된다”고 지적했다.
김민경 고한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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